구약의 세계/유월절의 모든 것

유월절 포도주 잔 이야기

정준극 2020. 4. 5. 17:03

유월절 포도주 잔 이야기


성경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드시면서 두번에 걸쳐 포도주를 잔에 따라 제자들에게 주었다고 되어 있다. 누가복음 22장 17-20절을 보면 당시의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17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기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라히라 하시고 19 또 떡을 가져 감시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나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 또는 최후의 만찬에서 두번에 걸쳐 포도주를 잔에 부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마시도록 하였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전통적인 유월절 만찬에서 포도주 잔을 네개 사용한다. 그렇게 네번에 걸쳐 포도주를 마시지만 오리지널 유월절 스토리에서는 포도주 잔에 대한 언급조차 없으니 흥미로운 일이다. 사실 유월절과 관련하여 포도주 잔이 언급된 경우는 구약이 아니라 신약에서이다. 앞에서도 소개한 대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면서 두번에 걸쳐 포도주 잔을 잡으셨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일까? 그것보다 어찌하여 유대인들은 유월절 만찬에서 포도주 잔을 네개나 사용하는 것일까?


유대인의 유월절 만찬에는 네 개의 포도주 잔이 준비된다.


구약이나 유대인들의 다른 경전을 보면 잔이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으로 자주 사용되었음을 알수 있다. 예를 들면 분노의 잔, 심판의 잔, 공포와 황폐함의 잔 등이라는 표현이 구약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시편에서는 잔이 구원의 상징처럼 인용되기도 했다. 시편 116편 13절을 보면 '내가 구원의 잔을 들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잔은 분노와 구원, 심판과 축복이라는 두가지 상반된 모습을 가지고 있음을 알수 있다. 이렇듯 잔에 대하여 여러 표현이 있지만 유월절과 관련한 표현은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심판과 구원이 서로 묘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짐작할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심판을 애급사람들에게 마치 포도주를 잔에 붓듯이 부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재앙을 피할 방법을 일러 주셨다.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놓으면 죽음의 천사가 비껴 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원이다. 이 위대한 이야기는 매년 유월절 음식을 먹는 자리에서 반드시 얘기되는 내용이다. 아무튼 잔이 유월절의 상징이 되어 있는 것은 미스테리이기도 하고 흥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유월절 포도주와 마짜(무교병)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잡수실 때에 식사 중에, 그리고 식사 후에 포도주를 잔에 따르신 것은 단순히 목이 말라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유월절 의식에 따른 절차로서 그렇게 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유월절 만찬에서 네개의 잔을 사용하게 되었는가? 그 연유는 분명치 않지만 유대인의 규범이라고 하는 미슈나와 탈무드에 의하면 유월절 식사 중에는 포도주를 네번 마시되 매번 다른 잔을 사용하도록 기록되어 있는 것이 유일한 근거이다. 그 전통이 오늘날 까지 이어온 것이다. 잔마다 다른 명칭이 있다 그러나 네개의 잔 중에서 어떤 것이 진정한 유월절을 상징하는 잔인지는 분명치 않다. 사람들은 대체로 첫번째 잔이 축복 또는 성결(聖潔)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으며 또한 노예생활로부토의 구원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역병의 시작을 깃점으로 구원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첫잔을 시작으로 유월절 만찬이 시작되는 것은 중요한 의미이다. 두번째 잔은 역병의 잔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대체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로소 애급을 떠나게 된 것을 축하하는 잔이다. 세번째 잔은 홍해가 갈라져 그런 연후에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전한 해방을 이루었음을 선언하는 잔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 추격군대의 공포로부터 이스라엘 구원해 주신 것을 감사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세번째 잔은 일면 '미리암의 잔'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에 다른 여인들과 함께 소고치며 춤주고 노래하여 백성들을 안심되게 인도했기 때문에 그를 기념해서이다. 네번째 잔은 시나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를 이룬 것을 감사하는 잔이다. 오늘날에는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라는 의미로 포도주를 따르고 있다. 네번째 잔은 간혹 할렐(Hallel)이라고 부른다. 할렐루야의 그 할렐이다. 여호와를 찬양한다는 뜻이다. 또 다른 전통에 의하면 네번째 잔은 '수락의 잔'이라고 하며 다른 세개의 잔은 '엘리야의 잔'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애급에 역병의 재앙을 내리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얻었다. 따라서 역병의 잔과 찬양의 잔은 서로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잔에 채우는 포도주는 붉은 포도주여야 한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포도주를 네번에 걸쳐 따라 마실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생각한다. 그래서

첫번째 잔에서는 '내가 너희를 이끌어 낼 것이다'(I will take you out), 두번째 잔에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I will save you), 세번째 잔에는 '내가 너희를 구속할 것이다'(I will redeem you), 네번째 잔에는 '내가 너희로 한 나라를 이루도록 할 것이다'(I will take you as a nation)라는 말을 상고한다. 


네 종류의 유월절 와인. 라벨에 적힌 글들이 흥미롭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네개의 잔 중에 하나에 대하여 명칭을 부여한 사실이 있다. 예수께서 식사 후에 사용했던 잔이다. 유대인의 전통으로 보아 그것은 세번째 잔에 해당한다. 예수께서는 이 잔을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누가복음 22장 20절). 사도 바울은 이를 두고 '축복의 잔'이라고 말했다. 고린도 전서 10장 16절을 보면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를 보면 알수 있다. 그로므로 유월절 만찬의 포두주 잔은 다른 말로 '주님의 잔'(The Cup of the Lord)라고도 말한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유월절에 대한 유대의 전통을 바탕으로 그것으로부터 무언가 과거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도출코자 했다. 그것이 바로 '내 피로 세우는 새로운 언약'이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레미아 선지자의 약속을 직접적으로 연관시키고자 했다. 예레미나 31장 32절의 말씀이 그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니'이다. 이어 32절에는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급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인즉 하나님께서 새로운 언약을 주실 것인데 왜냐하면 지난 날의 언약은 이미 깨뜨려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트린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때의 잔은 무서운 잔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을 약속하시었다. 이 때의 잔은 은혜와 구원의 잔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유월절 만찬. 그림에는 유리잔이 놓여 있다


예수께서는 이 새 언약은 그의 피로 잔을 채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였는데 이것은 곧 구원의 잔을 말하는 것이다. 구원의 잔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서 해방시킬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보면 분노와 구원과 구속이 모두 함께 하나의 잔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유월절 만찬을마치신 예수님은 밤 늦게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가서 기도에 힘쓰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옮기옵소서 그러나 내 원재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다. 예수는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의 잔이 그에게서 건너 뛰기를 원하였다. 그 심판이란 것은 예수님 한분 만을 제외하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깨뜨렸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순종하는 아들인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축복의 잔이 채워져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잔을 먼저 들어서 마시기로 한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심판의 잔을 마시기로 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죄 사함을 받고 자유스러워질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진실로 커다란 축복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마신 잔이 축복의 잔이라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메시아가 우리를 위해서 죽임을 당하고 무덤에 뉘이고 부활하신 것보다 더 위대한 축복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고백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전통적인 유월절과 기독교의 성찬식이 굳게 연계되어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축복의 잔은 두 경우에 모두 해당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축복의 잔에 대한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애급 총리 요셉에 대한 이야기이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시기를 받아서 애급으로 종으로 팔려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귀중하게 사용하시어 애급의 총리가 되도록 하신다. 세상이 기근이 들어 고통을 당하지만 애급은 요셉의 지혜로 기근을 피한다. 요셉을 팔아먹은 형제들이 애급으로 식량을 구하러 온다. 이들은 애급의 총리대신이 요셉인줄 모른다. 그러나 요셉은 형제들을 알아 본다. 요셉은 자기의 정체를 감춘채 이들을 스파이로 몰고 만일 아니거든 고향에 가서 막내 동생을 데리고 다시 오라고 요구한다. 마침내 요셉의 바로 아래 동생인 벤야민이 형들과 함께 애급에 온다. 요셉은 가만히 벤야민의 곡식 자루에 자기의 은잔을 넣는다.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고향으로 떠난다. 그러다가 중간에서 요셉이 보낸 병사들에 의해 도둑으로 잡힌다. 벤야민의 짐에서 요셉의 은잔이 나온다. 병사들은 벤야민을 체포한다. 은잔은 벤야민을 심판하는 증거가 된다. 밴야민은 죽임을 당할수도 있다. 형제들은 모두 두려움에 옷을 찟고 울부짖는다. 애급으로 다시 돌아온 형제들은 그제서야 요셉의 정체를 알게 된다. 형제들은 은잔을 훔쳤기 때문이 아니라 요셉을 노예로 팔았던 것을 상기하고 모두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다. 그러나 이 잔으로 인하여 형제들은 구원과 용서함을 받는다.  


애급 총리 요셉이 벤야민을 비롯한 형제들을 만나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