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환상의 베를리오즈

열정의 엑토르 베를리오즈

정준극 2020. 4. 30. 12:17

열정의 엑토르 베를리오즈


엑토르 베를리오즈


베를리오즈라고 하면 '환상적 교향곡'(Symphonie fantastique)이 우선 생각나고 그리고 해리엣이라는 예쁜 여배우와의 열정적인 사랑이 생각난다. 그런 베를리오즈는 음악의 장르에서 프랑스 낭만주의 작곡가로 분류된다. 베를리오즈는 오케스트라 작품이 주무기이지만 합창곡과 오페라로서도 명성을 떨치고 있는 작곡가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의 대표작은 오케스트라 작품으로서 앞서 언급한 '환상적 교향곡' 이외에 '이탈리아의 해롤드'(Harold en Italie)가 있고 합창곡으로서는 '레퀴엠'(Requiem)과 '그리스도의 어린시절'(L'Enfance du Christ)이 있으며 오페라로서는 정식으로 세편이 있는데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to Cellini), '트로이 사람들'(Les Troyens), '베아트리스와 베네딕트'(Béatrice et Bénédict)가 있다. 한편, 하이브리드 장르로서 드라마틱 교향곡(Dramatic symphony)인 '로미오와 줄리엣'(Roméo et Juliette)을 작곡했으며 드라마틱 레전드(Dramatic legend)로서 '파우스트의 겁벌'(La Damnaton de Faust)이 있다. 이 두 하이브리드 작품은 간혹 오페라로서 간주되어 무대에 올려지기도 한다. 아무튼 베를리오즈는 19세기 프랑스 음악을 대표하는 위대한 작곡가이다. 그리고 열정에 넘쳐 있던 작곡가였다.


'벤베누토 첼리니'의 한 장면. 잉글리쉬 내셔널 오페라


위대한 작곡가들 중에는 음악가정 출신인 경우가 많지만 베를리오즈는 그런 배경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아버지는 지방 의사였다. 아버지는 아들 엑토르가 자기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기를 바랬다. 그래서 엑토르는 파리에 있는 의과대학에 입학해서 다녔다. 하마트면 위대한 작곡가 베를리오즈는 찾아볼수 없고 대신 시골의사 베를리오즈가 있을 뻔했다. 그러나 하늘의 섭리인지 베를리오즈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어찌할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와 가족들의 뜻에 반기를 들고 음악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그것만 해도 베를리오즈가 특이한 인물이라는 것을 짐작할수 있다. 아무튼 그의 독립정신, 그리고 전통적인 규범이나 형식을 거부하는 그의 자세는 보수적인  파리의 음악계에서 별난 인물로 간주되어 종종 낭패를 보기도 했다. 물론 그도 전통적인 보수에 짐짓 머리를 굽힌 일도 있어다. 1830년에, 즉 그가 27세 때에 파리음악원에서 프리 드 롬(Prix de Rome)의 상을 받은 것이 좋은 예이다. 하지만 그는 사실상 파리음악원에서 별로 배운 것이 없었다. 아마도 혼자의 힘으로 개척해 나갔기 때문에 '프리 드 롬' 상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지 파리의 음악계에서는 오래동안 베를리오즈의 재능에 대하여 논란이 많았다. 일부는 그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음악이 기초가 부실해서 형식과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베를리오즈는 22세의 약관 시절에 아일랜드 출신의 셰익스피어 여배우인 해리엣 스미슨(Harriet Smithson)을 극장에서 보고 사랑에 빠졌다. 베를리오즈는 7년 동안이나 해리엣을 따라 다니면서 열렬하게 구애하여 결국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베를리오즈는 해리엣을 생각하여서 저 유명한 '환상적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실제로 이 작품에는 해리엣을 이상적으로 묘사한 음악이 전편을 수놓고 있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처음에는 행복하였으나 나중에는 마치 배가 침수하듯 실패한 것이었다.


아일랜드 출신의 셰익스피어 여배우 해리엣 스미슨


베를리오즈는 세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첫번째 것은 '벤베누토 첼리니'이다. 하지만 초연부터 실패였다. 두번째는 대서사시인 '트로이 사람들'이다. 너무나 스케일이 방대하여서 그의 생애 중에 전체가 완벽하게 무대에 올려진 일이 없었다. 마지막 오페라는 '베아트리스와 베네딕트'이다. 셰익스피어의 코미디인 '헛소동'(Much Ado About Nothing)을 바탕으로 삼은 작품이다. 초연은 성공이었으나 그후 스탠다드 레퍼터리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작곡가로서 베를리오즈는 프랑스에서나 간혹 성공하였을 뿐,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지휘자로서 활동하여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이름을 떨쳤다. 다만, 영국, 독일, 러시아에서는 베를리오즈가 작곡가 겸 지휘자로서 널리 존경을 받았다. 베를리오즈는 작곡만으로는 여유있는 생활을 할수 없어서 음악 잡지에 기고하여 생활비를 충당하였다. 그는 작가적인 재질이 있어서 많은 글을 남겼는데 상당부분은 책자로도 발간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1844년에 출판된 Treatrise on Instrumentation(악기편성법 논문)으로 19세기와 20세기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이다. 베를리오즈는 비교적 한창 나이인 65세에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베를리오즈의 저서 '악기편성법 논문집'의 커버


*********************************************************

[프리 드 롬](Prix de Rome: Grand Prix de Rome) - 로마 대상

*********************************************************


글자 그대로 로마에 갈 수 있는 상이다. 이탈리아는 르네상스의 중심지이며 유럽 문화의 바탕이기 때문에 전도 유망한 문화예술인을 로마로 보내어 이탈리아 문화의 기본을 배우고 돌아오면 프랑스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보았던 것이다. 프리 드 롬은 일찍이 1683년에 루이 14세 때에 처음 시작되었다. 원래는 화가와 조각가를 지망하는 우수 학생에게 주는 프랑스 정부의 스칼라쉽이었다. 수장자는 국가 예산으로 로마에 3-5년을 체류할수 있는 경비를 지원받았다. 1720년에는 건축분야가 추가되었고 1803년에는 비로소 음악분야가 포함되었다. 1803년이면 베를리오즈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그후 프리 드 롬은 20세기까지 이어져 왔으나 1968년에 당시 문화장관인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가 중단했다. 19세기 작곡가로서 프리 드 롬을 받은 유명 인물들은 대강 다음과 같다. 20세기에 들어서서도 거의 매년 수상자가 있었으나 19세기처럼 두드러진 인물이 없었다.


- 1803 알베르 안드로(Albert Androt)

- 1809 조셉 메울(Joseph Méhul)

- 1812 페르디낭 에롤드(Ferdinand Herold)

- 1819 프로멘탈 알레비(Fromental Halévy)

- 1830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 1832 앙브루아즈 토마(Ambroise Thomas)

- 1857 조르즈 비제(George Bizet)

- 1863 쥘르 마스네(Jules Massenet)

- 1884 클로드 드비시(Claude Debussy)

- 1887 귀스타브 샤르팽티에(Gustave Charpentier)

- 1893 앙드레 블로흐(André Bloch)

- 1894 앙리 라보(Henri Rabaud)


프리 드 롬 수상자들이 로마에서 공부하는 장소인 빌라 메디치의 오늘날 모습. 투스카니 대공인 메디치의 페르디난도 1세(Ferdinando I de' Medici)가 지은 건물이므로 빌라 메디치라고 부른다. 1803년, 엑토르 베를리오즈가 태어난 해부터 이 건물은 프랑스 정부의 소유가 되어 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로서 사용되었다. 로마의 Trinita dei Monti 인근 Pincian Hill 에 위치하고 있다.






è é ê ç 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