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환상의 베를리오즈

베를리오즈와 트로이 사람들

정준극 2020. 5. 5. 17:34

베를리오즈와 트로이 사람들


'트로이 사람들' 콘서트. 스트라스부르. 대규모 오케스트라 편성임을 무대에서 볼수 있다.


1862년에, 그러니까 베를리오즈가 59세 때에 두번째 부인인 마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마리는 48세였고 결혼한지 8년째 였다. 베를리오즈가 외국에 나가 있을 때에는 마리의 친정어머니가 마리를 돌보아 주었다. 베를리오즈는 그런 마리의 어머니에게 평생을 보살펴 주었고 반대로 마리의 어머니도 베를리오즈를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돌보아 주었다. 마리가 세상을 떠나기 4년 전인 1858년에 완성한 '트로이 사람들'은 전 5막에 공연시간만 다섯 시간이 걸리는 대작 중의 대작이었다. 파리 오페라는 그렇게 오래 걸리는 대작을 공연하기가 부담스러웠다. 베를리오즈가 설득도 하고 간청도 하였지만 결국 성사되지 못하였다. 베를리오즈로서 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체를 두 파트로 나누어 따로 공연하는 것이었다. '트로이의 함락'과 '카르타고의 트로이 사람들'로 나누는 것이다. 두번째 파트로사 후반부의 세 막인 '카르타고의 트로이 사람들'은 1863년 11월 파리의 테아트르 리리크에서 처음 공연되었으나 그렇게 줄였는데도 너무 길다고 해서 또 줄여야 했다. '카르타고의 틀이 사람들'은 테아트르 리리크에서 22회의 공연을 가졌으나 공연 때마다 줄여야 했다. 자기의 작품이 계속 잘려나가자 베를리오즈는 실망했다. 그리고 이후로는 작곡에서 손을 뗐다.


'트로이 사람들'. 메트로폴리탄 2013년


베를리오즈는 '트로이 사람들'의 리바이발을 바라지 않았다. 그런 관계로 '카르타고의 트로이 사람들'이 초연을 가진지 30년이 지나도록 '트로이 사람들'은 무대에 올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는 '트로이 사람들'의 출판권을 거액을 받고 팔았다. 그래서 그 돈으로 여생을 편안히 지낼수 있었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그는 평론도 그만 두었다. 마치 사회와 담을 쌓고 사는 사람 같았다. 그러다보니 절망감이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돌이켜 보면 그는 부인 두 명을 모두 잃었다. 여기에 그가 사랑하던 두 누이까지 잃었다. 그의 친구들도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음이란 것을 실감하며 지냈다. 다행하게도 그는 아들 루이와 부자간의 정을 다지면서 지낼수 있어서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아들 루이는 작은 상선의 선장이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시간보다도 배를 타고 나가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때 쯤해서 베를리오즈는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간혹 장염으로 고생을 했다. 아마도 크론병(Crohn's disease)일 것이다. 만성 염증성 장질환을 말한다.


'트로이 사람들'의 비엔나 슈타츠오퍼 무대. 대규모 스케일이어서 제작비가 많이 든다.


그건 그렇고, 베를리오즈는 두번째 부인인 마리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역시 로맨틱한 감정을 주체하기가 어려워서인지 두번에 걸친 로맨스가 있었다. 하나는 1862년, 그러니까 마리가 세상을 떠난 바로 그 해에 만난 여인이다. 그것도 마리를 땅에 묻는 몽마르트 공동묘지에서였다. 아멜리라는 이름의 젊은 여인으로 나이는 아마 베를리오즈 나이의 절반도 안되는 2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아마 결혼한 여자인지도 모른다. 베를리오즈와 아멜리의 관계는 거의 1년이나 지속되었다. 하지만 은밀한 만남이어서 두 사람의 내로남불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년 쯤 지나서 베를리오즈는 아멜리와의 관계를 끊게 되었다. 그런데 무슨 운명인지 그렇게 두 사람이 결별하고 나서 얼마 후에 아멜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때 아멜리는 26세였다. 베를리오즈는 아멜리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공동묘지에서 아멜리의 묘비를 보고 그때서야 그가 죽은 줄 알았다. 아멜리의 급작스런 죽음은 베를리오즈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소년 시절에 그가 짝사랑했던 에스텔을 생각하고 그 첫사랑의 여인을 만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가졌다. 베를리오즈는 수소문해서 에스텔을 소재를 알아 냈다. 에스텔은 이미 미망인으로서 그때 67세였다. 그는 에스텔을 1864년 가을에 찾아갔다. 에스텔은 베를리오즈를 따듯하게 대해 주었다. 그후로 베를리오즈는 몇번 만났으며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에스텔에게 거의 매달 한번씩 편지를 보냈다. 그것도 피치 못할 로맨스라면 로맨스였다.


'트로이 사람들'. 현대적 연출. 파리국립오페라. 에니(이니아스)에 브라이언 하이멜, 디동(디도)에 엘리나 가란차. 2019.년.


1867년에, 그러니까 베를이오즈가 64세 때에 그는 아들 루이가 하바나에서 황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듣는다. 베를리오즈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수 없을 정도였다. 그에게는 비통함에서의 탈출구가 필요했다. 마침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일련의 콘서트가 계획되고 있었다. 러시아 지휘는 그에게 기쁨을 안겨주기는 커녕 그에게서 남아 있는 에너지가 빠져나가게 만들어준 것이었다. 러시아 연주회는 성공이었다. 러시아의 신세대 작곡가들은 그에게 따듯한 환영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파리로 돌아오는 그의 모습은 눈에 보이게 편안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요양을 위해 니스로 갔다. 그러나 이 또한 무슨 운명인지 그는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넘어져 바위에 부딪혔다. 아마 갑자기 심장마비가 왔던 모양이었다. 베를리오즈는 급히 파리로 돌아왔고 그로부터 몇 달 후에는 그나마 건강을 회복할수 있었다. 베를리오즈는 1868년 8월에 그레노블의 합창경연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초대를 받았다. 그때만 해도 그레노블까지 여행을 하는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여행은 대단히 힘든 것이었던 모양이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점차 쇠약해졌고 마침내 1869년 3월 8일 Rue de Calais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는 65세였다. 베를리오즈는 몽마르트에 안장되었다. 그의 두 부인, 즉 해리엣과 마리도 몽마르트에 믇혀 있었다. 두 부인의 유해는 베를리오즈의 묘지 옆으로 이장되었다.


 파리 몽마르트 공동묘지의 베를리오즈 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