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환상의 베를리오즈

의학도 베를리오즈

정준극 2020. 5. 1. 05:38

의학도 베를리오즈


엑토르 베를리오즈는 말할 나위도 없이 현란하고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머리 모습만 보아도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낄수 있다. 분명히 당시 파리의 남자 머리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베를리오즈니까 그런 머리 스타일이 용인되었다. 실상 그는 모든 면에서 충격을 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특히 오케스트라의 악기를 사용하는 테크닉으로부터 오케스트라 악기들의 배치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전통을 벗어난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가 쓴 오케스트라 논문집은 아직도 관현악 편성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논문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아직도 음악대학에서 교과서로 사용되고 있다. 베를리오즈에 대하여는 할 말이 많다. 하나하나 짚어보고자 한다.


'베를리오즈에게'라는 타이틀의 판화. 앙리 팡땡 라투르 작. 1897년. 대영박물관 소장. 음악의여신 뮤즈가 베를리오즈에게 면류관을 씌어주려고 하는 장면


베를리오즈는 1803년 12월 11일 프랑스 동남부 이세르(Isère) 지방의 라 코트 생 탕드레(La Côte-Saint-André) 지방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인 루이 베를리오즈였으며 어머니는 평범한 가정주부인이지만 이름은 대단한 마리 앙투아네트 조세핀이었다. 베를리오즈는 장남이었다. 아래로 동생들이 다섯명이나 있지만 그 중에서 셋은 어린 시절에 세상을 떠났다. 생존한 여동생들인 낭시와 아델르는 생애 동안 베를리오즈와 가깝게 지내면서 그의 작품 활동에 이런저런 영향을 주었다. 베를리오즈의 아버지 루이는 비록 지방도시이지만 상당히 존경받는 의사였다. 그는 또한 보수적이 아니라 진보적인 의사였다. 그가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중국식 침술을 환자에게 적용한 사람인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그는 자유사상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한편으로는 비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반면에 베를리오즈의 어머니 마리 앙뚜아네트는 엄격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그래서인지 융통성이 부족하고 전통을 고집하는 성격이었다. 베를리오즈는 라 코트 생 탕드레 초등학교에 다녔지만 10세 때부터는 무슨 연유인지 학교 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집에서 아버지에게 개인교습을 받았다. 베를리오즈는 훗날 그의 비망록(Mémoires)에서 그 때 아버지로부터 지리학을 배우는 것이 아주 즐거웠다고 기술했다. 그래서인지 베를리오즈는 그때부터 세계의 이곳저곳을 찾아가는 여행에 대하여 관심이 깊었지만 그렇다고 나중에 여행을 자주 다녔던 것은 아니다. 라틴어도 아마 그 즈음에 배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로 라틴어 고전은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었다. 특히 비르질의 디도와 이니아스에 대한 비극을 읽고는 너무나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연유때문인지 그는 훗날 '트로이 사람들'을 통해서 디도와 이니아스의 사랑과 모험에 대한 이야기를 그랜드 오페라로 만들었다. 베를리오즈는 또한 아버지로부터 철학, 수사학, 그리고 해부학도 배웠다. 해부학은 그의 아버지가 엑토르를 의사로 만들려는 생각에 미리 가르친 것이다.  하여튼 작곡가가 의사들처럼 인체 해부도 할수있었으니 대단하기는 대단했다.  


베를리오즈가 태어난 라 코트 생 탕드레의 집. 지금은 베를리오즈 기념관이다.


베를리오즈의 음악수업은 어떠했는가? 집에서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음악은 비중이 없었다. 다만, 아버지는 베를리오즈에게 플레절렛(Flageolet)이라는 간단한 악기를 가르쳤을 뿐이었다. 오늘날의 오카리나와 비슷한 악기이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지방에 있는 음악교사로부터 플루트와 기타를 배웠다. 피아노는 정식으로 배운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피아노를 칠 일이 있으면 그저 창피할 정도로 떠듬떠듬 칠수 밖에 없었다. 훗날 베를리오즈는 피아노를 정식으로 배우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키보드에 종속되면 다른 악기들을 등한시하는 버릇이 생기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특히 피아노에 빠지면 재래적인 하모니의 유혹에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에 오히여 피아노를 모르는 것이 작곡에 더 유리할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건 그렇고 사랑 또는 평범하게 말해서 연애라고 하면 베를리오즈도 한 연애하는 사람이었는데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베를리오즈는 12살 때에 대단한 첫사랑에 빠진 일이 있어서 전도가 촉망되었다. 상대방은 이웃집에 사는 18세의 에스텔 뒤뵈프라는 처녀였다. 소년 베를리오즈의 에스텔에 대한 사랑은 유별나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고 이웃 사람들은 그런 베를리오즈에게 조숙하다느니 또는 사춘기엔 그럴 수도 있다느니 하면서 놀렸다. 하지만 그때 에스텔에 대한 열정적인 감정은 베를리오즈의 전생애를 통해서 떠나지 않았다. 물론 연상도 한참 연상인 에스텔과의 첫사랑은 에스텔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바람에 싱겁게 끝났지만 대신에 그는 작곡을 통해 그의 열정을 표현코자 노력하였으니 그것도 이득이라면 이득이었다.


베를리오즈 생가에 마련된 기념관의 한 방. 그의 부모의 초상화와 그의 흉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베를리오즈는 음악이론 등을 거의 독학으로 마스터했다. 하모니를 마스터하기 위해서는 라모(Rameau)가 쓴 Traité de l'harmonie(화성학)를 앍고 또 읽었다. 하지만 정식 음악교육을 받지 못한 그로서는 라모의 글이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가 샤를르 시몽 카텔(Charles-Simon Catel)의 알기 쉬운 화성학을 읽고서는 충분히 이해할수 있었다. 그는 청년 시절에 몇 편의 실내악을 작곡한바 있다. 그러나 나중에 유치하다고 생각해서 악보들을 없애버렸다. 다만, 그 중에서 하나의 주제는 나중에 비록 미완성이지만 오페라 Les Francs-juges(비밀법정의 판사: The Free Judges) 서곡의 제2주제로 재현되었다. 그가 19세 때에 시도한 오페라였다.


19세기 라 코트 생탕드레의 거리. 베를리오즈는 이 거리를 수없이 다녔을 것이다.


베를리오즈는 17세 때에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20세까지 3년 동안 의학도로서 공부한 일이 있다. 1821년 3월에 그는 그레노블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다가 그해 9월에 파리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베를리오즈는 아버지의 강권에 못이겨 파리대학교 의과대학에 복학하였다. 나중에 그는 사람의 몸을 해부한다는 것이 제일 싫었다면서 아버지의 권유에 못이겨서 의과대학에 들아갔지만 의학도로서의 생활은 힘들었다고 토로하였다. 의과대학 생활이 두렵고 지겨웠지만 단 한가지 마음에 들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가 생활비를 넉넉하게 대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리의 문화 생활, 특히 음악 생활을 충분히 엔조이하며 지낼수 있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당시 파리에서는 음악보다는 문학이 더 특별했다. 말하자면 사교계에서 이름을 알리기에는 음악가보다는 작가가 더 쉬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 애호가들에게도 자랑스러운 것이 있었다. 파리에 두 개의 훌륭한 오페라 극장이 있었으며 또한 음악도서관은 그야말로 유럽에서도 알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베를리오즈는 이 두가지 잇점을 충분히 활용하였다. 베를리오즈는 파리에 오자마자 오페라(국립오페라극장)부터 찾아갔다. 별로 이름없는 작곡가의 오페라였지만 무대, 그리고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는 그의 가슴을 뛰게 만든 것이었다. 베를리오즈는 파리에 온지 3주 후에 또 다시 오페라를 찾아갔다. 다시 말하지만 그때 그는 17세의 청년이었을 뿐이다. 이때 본 오페라는 글룩의 '터리드의 이피제니'(Iphigénie en auride)였다. 그는 전율을 느낄 정도고 감동을 받았다. 그는 글룩의 오케스트라 사용으로부터 특별한 영감을 받았다. 그는 또다시 글룩의 '터리드의 이피제니'를 보러 갔고 두번째 보고 나서는 의사보다 작곡가로서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베를리오즈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글룩의 '터리드의 이피제니'의 한 장면. 수잰 그레이엄, 플라시도 도밍고. 런던 코벤트 가든


당시에 파리의 오페라 상황은 이탈리아 오페라들이 판치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에티엔 메율 또는 프랑수아 아드리앙 부엘듀의 오페라들이 간혹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다. 베를리오즈는 이탈리아 오페라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프랑스 작곡가들이 만든 오페라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프랑스 스타일의 오페라를 작곡한 외국 작곡가들, 예를 들면 가스파레 스폰티니, 그리고 말할 나위도 없이 글룩의 작품들을 듣고 마음 속에 흡수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글룩의 작품에 대하여는 대표적인 다섯 오페라를 보다 깊이 연구하기 위해 파리음악원의 도서관에 가서 필요한 파트의 스코어를 필사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1822년에 작곡을 하려면 아무래도 정식으로 레슨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로열 채플의 음악감독이며 파리음악원의 교수인 장 프랑수아 르 쉬에르(Jean-Francois Le Sueur: 1760-1837)를 찾아가서 제자로 받아 달라고 간청했다. 그로부터 그는 장 프랑수아 르 쉬에르의 제자로서 개인레슨을 받았다. 


베를리오즈의 스승인 장 프랑수아 르 쉬에르


베를리오즈는 글쓰는 재주도 있었다. 그는 1823년, 즉 그가 20세의 청년일 때에 처음으로 음악잡지인 Le Corsaire에 이탈리아 라이발의 침입에 대하여 프랑스 오페라를 보호해야 한다는 글을 써서 기고했다. 그는 로시니의 오페라를 모두 합쳐도 글룩, 르 쉬에르, 스폰티니의 몇 소절에도 못미친다는 식으로 프랑스 오페라를 옹호하였다. 그때 쯤해서 그는 몇 작품을 완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Estelle et Némorin(에스텔과 네모랭), Le assage de la mer Rouge(홍해를 건너서) 등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작품의 스코어는 모두 분실되었다. 베를리오즈는 21세 때인 1824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러니까 마음만 먹으면 의사로서 돈을 벌수 있었다. 그러나 졸업하자마자 의사가 되기를 포기하였다. 부모의 반대가 극심했지만 어쩔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정 의사가 싫다면 변호사가 되거라'면서 대안을 제시했지만 그것도 결국은 허사였다. 참다 못한 아버지는 베를리오즈에 대한 생활비를 줄여서 주거나 또는 아예 보내지 않기도 했다. 그러기를 몇 년이나 했고 그동안 베를리오즈는 경제적으로 상당히 곤란했었다. 베를리오즈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해에 저 유명한 '장엄 미사'(Messe Solennelle)를 작곡하였다. '장엄 미사'는 두번 연주되었다. 그런데 베를리오즈는 무언가 흡족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악보를 설합 속에 파묻혀 두었다. 이후, 베를리오즈의 '장엄 미사'는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에 악보가 발견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베를리오즈는 1825년과 1826년에 걸쳐서 첫 오페라인 '비밀법정의 판사'(Les Francs-juges)를 작곡했다. 이 오페라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미완성이어서 공연되지 않았다. 다만 몇 파트의 음악만이 생존하였는데 그 중에도 서곡은 아직도 콘서트에서 연주되고 있다. 베를리오즈는 이 오페라의 몇 파트의 음악을 훗날 재활용했다. 예를 들면 '경비병 행진곡'(March of the Guards)이다. 4년 후에는 '환상적 교향곡'에 '단두대 행진곡'(March to the Scaffold)에 사용하였다.


환상적 교향곡 중에서 '단두대 행진곡'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


베를리오즈는 25세 때인 1826년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할수 있었다. 르 쉬에르 교수에게서 정식으로 작곡을 배우게 되었으며 체코출신으로 프랑스에 귀화한 안톤 라이하(Anton Reicha: 1770-1836)로부터는 대위법과 푸가를 배울수 있었다. 베를리오즈는 그 해에 프리 드 롬(Prix de Rome)에 응모하였으나 예선에서 탈락되고 말았다. 이듬해인 1827년에 그는 생활비에 보태려고 누보테극장(Théatre des Nouveaustés)의 합창단원으로 들어갔다. 아무튼 그는 테너로서 노래도 잘 불렀던 모양이다. 그해에 그는 다시 프리 드 롬에 도전하였다. 그의 첫번째 프리 칸타타인 '오르페의 죽음'(La Mort d'Orphée)을 제출했다. 그러나 역시 본선에 들지 못했다. 그해 말쯤해서 그는 파리에서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인기가 높자 연극에 대한 관심을 갖고자 극장을 찾아갔다. 파리의 오데온극장(Théatre de l'Odéon)에서 영국의 챨스 켐블 순회극단이 공연하는 '햄릿'과 '로미오와 줄리엣'을 관람하였다. 베를리오즈는 영어를 거의 못했지만 연극 자체로부터는 압도를 당하였다. 그로부터 그는 셰익스피어 연극에 대하여 평생의 열정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챨스 켐블 극단의 여주인공인 해리엣 스미슨을 보고 첫눈에 반하여 깊은 열정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베를리오즈 전기작가인 휴 맥도날드는 이 때의 사건을 한마디로 '감성적인 장애'(emotional derangement)였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베를리오즈는 해리엣에 대하여 거의 광적으로 집착하여 쫓아다녔다. 하지만 해리엣은 이름도 없는 작곡지망생에 대하여 눈길도 주지 않았다. 베를리오즈가 만나자고 간청하였지만 만나주지도 않았다.


'햄릿'에서 오펠리아 역의 해리엣 스미슨. 베를리오즈가 첫 눈에 반하였다.


베를리오즈의 작품만으로 첫 연주회가 열린 것은 1828년 5월이었다. 그의 친구인 나탄 블로크가 지휘를 맡아서 오페라 '비밀법정의 판사'의 서곡과 '웨이벌리'(Waverley) 등을 처음 선보인 콘서트였다. 그런데 연주회장에는 청중들이 생각보다 적게 왔다. 베를리오즈는 없는 살림에 주머니를 털어서 콘서트를 마련했는데 청중들이 없어서 손해를 크게 보았다. 하지만 뜻하지 아니한 성과도 있었다. 연주를 끝낸 오케스트라 멤버들이 베를리오즈에게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객석에 있던 음악가들로부터도 열화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그중에는 음악원 담당교수였던 르 쉬에르와 안톤 라이하, 파리 오페라와 오페라 코미크의 음악감독들, 그리고 당대의 작곡가인 다니엘 오버(Daniel Fracois Esprit Auber)와 페르디낭 에롤드(Louis Joseph Ferdinand Herold)도 있었다. 베를리오즈가 셰익스피어의 연극에 깊이 몰두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바 있다. 아무튼 그 때문에 그는 영어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목적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원어로 읽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때 쯤해서 그는 두명의 정말로 위대한 인물들을 알게 되어 그들로부터 깊은 영감을 받았다. 하나는 불멸의 작곡가인 베토벤이며 따른 하나는 세기의 문호 괴테였다. 베를리오즈는 음악원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3번, 5번,7번의 연주를 듣고 크게 감동했다. 그리고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고 또한 한없이 감동했다. 베를리오즈에게 있어서 베토벤은 이상적인 인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방해가 되기도 했다. 선배로서 많은 영감을 주었지만 그의 위대함에 오히려 위축이 되었기 때문이다. 괴테의 작품은 베를리오즈의 Op 1인 Huit scènes de Faust(파우스트의 여덟 장면)의 바탕이 된 것이다. 베를리오즈의 Op 1은 나중에 La Damnatio de Faust(파우스트의 겁벌)로 수정보완되었다.


'환상적 교향곡'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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