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북
세계 여러 나라의 과학기술장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서울에서 열리는 아태경제협의체(APEC)과학기술장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지나 11월 중순, 장충동의 신라호텔에서였다. 대덕의 정부출연 연구소들도 이 회의에 일조하기 위해 나름대로 몇 가지 업무를 맡게 됐다. 그중 하나는 각국 대표단을 영접하고 안내하는 일이었다. 우리 연구소는 멕시코 대표단을 책임 맡게 되었다. 멕시코는 다음번 APEC과학기술장관회의를 개최할 나라이기 때문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할 입장이었다. 멕시코 대표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사무총장(장관급)인 까를로스 바즈드레슈 빠라다라는 양반이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과 잘 가다듬은 수염이 무척 보기 좋은 점잖은 노신사였다.
개회식 하루전날 오후에 약간의 시간 여유가 있어서 멕시코 양반에게 무얼로 소일하고 싶으냐고 물어보았다. 서울시내 주요 건물들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를 둘러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특히 관공서가 어느 위치에 자리 잡고 있으며 어떤 규모인지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기왕에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인 블루 하우스도 보고 싶다고 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어서 우리는 차를 타고 삼청동 쪽으로 올라간후 청와대 앞길을 거쳐 효자동 쪽으로 내려왔고 이어 정부 제1종합청사 등이 있는 세종로를 찬찬히 구경했다. 청와대를 지날 때 이 사무총장님은 한쪽에 세워져 있는 멋있게 생긴 커다란 북에 대하여 유별난 관심을 가지고 차에서 내려 보자고 하더니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신문고(申聞鼓)였다. 그래서 옛날 국사교과서에서 배운 기억을 열심히 되살려 나름대로 설명해 주었다.
신문고는 지금으로부터 약 6백년전, 조선왕조 3대 임금인 태종때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설치된 디렉트 민원시스템이었다. 누구든지 일반관청이 해결할 수 없는 억울한 사연이 있으면 아무 때나 대궐 앞의 신문고를 울릴 수 있었다. 임금은 북이 울리는 소리를 직접 듣고 북을 친 백성의 억울한 사안을 듣고 처리해주었다. 말하자면 민의상달(民意上達)시스템의 대표적인 것이었다. 물론 나중에는 담당 공무원을 두어 대신 처리토록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새로운 조치로서 아무나 시도 때도 없이 마음대로 북을 치지 못하도록 했다. 아무나 마음대로 북을 칠 것 같으면 임금님 및 담당 공무원들도 골치 아플 것이기 때문에 엄격한 제한을 두기로 했다. 하급자가 상관을 고발하는 일, 다른 사람을 매수하거나 사주하여 고발하는 일, 관찰사나 수령방백 등 임금이 임명한 고위관리를 고발하는 일 따위는 접수를 하지 않았으며 만약에 엉터리 민원일 것 같으면 벌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조건에도 불구하고 스피드한 사건해결을 위해 사소한 사건까지도 신문고를 이용하는 무질서한 현상이 나타났었다. 그래서 연산군은 귀찮다고 생각하여서 신문고 제도를 아예 폐지하기까지 했다. 무슨 제도든지 미흡한 점이 있기 마련이다. 신문고 제도에도 문제들이 있었다. 우선 본래 취지와는 달리 일반국민들, 특히 하층 계급의 사람들은 이용하기가 어려웠다. 주로 관리들이 이용했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지방에서 알아서 해결할 일이지 왜 서울대궐까지 와서 난리를 피냐는 핀잔 때문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용자는 주로 서울에 사는 배부르고 등 따스한 양반층들이었다.
신문고에 이어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국의 북에 대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농악에 쓰는 소고(小鼓)는 자루가 달려 있어서 빙글빙글 돌리며 앞뒤를 나무채로 채서 장단을 맞춘다는 얘기, 장고(杖鼓)는 오동나무나 소나무의 통에 오른쪽에는 쇠가죽을, 왼쪽에는 말가죽을 뚜껍게 매어 손이나 나무채로 친다는 얘기, 또 군악대가 쓰는 용고(龍鼓), 대궐 행사때 쓰는 건고(建鼓) 등등.... 시간 가는줄 몰랐다. 그 양반은 한국에 웬 북의 종류가 그렇게 많으냐면서 무척 재미있어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동네북’이라는 것도 있다고 설명했다. 원래 ‘동네북’이란 것은 마을 행사때 쓰는 공용의 북이지만 요즘에는 공연히 구박받는 사람, 얼토당토 않게 미움받는 사람을 말할 때 ‘동네북’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그리고 속으로 바로 오늘의 우리 원자력연구소야말로 동네북 신세라고 생각했다. 사면초가인 것 같기 때문이다. (1996년 12월)
* 원자력연구소가 한것이 무엇 있느냐는 일부 주장에 대한 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