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남몰래 읽는 366편

55. Debussy, Claude (드빗시) [1862-1918]-플레아와 멜리상드

정준극 2007. 7. 4. 13:09

클로드 드빗시

 

[플레아와 멜리상드]


타이틀: Pelléas et Mélisande (Pelleas and Melisande). 전3막. 상징주의 시인 모리스 매테르린크(Maurice Maeterlinck)의 희곡을 오페라 대본을 다시 손질하였다.

초연: 1902년 파리 오페라 코믹극장

주요배역: 멜리상드(플레아를 사랑하게 된 여인), 플레아(멜리상드의 남편 골러드의 이복동생), 골러드(골러: 멜리상드와 결혼), 즈느비에브(골러드의 어머니: 왕비), 아르켈(알레몽드의 왕)

 

플레아와 멜리상드

 

음악적 하이라이트: 멜리상드의 노래

사전지식: 무대는 알레몽드(Allemonde)라고 하는 신화 속의 나라. 전설적인 어느 시기이다. 음악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분위기이다. 남편의 동생을 사랑한 어느 여인의 비극적인 삶을 그린 오페라. 모리스 메테르링크의 5막짜리 희곡 ‘플레아와 멜리상드’는 1892년에 발간되었으며 이듬해에 연극무대에 올려져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메테르링크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높여준 작품이다. 이 드라마는 프랑스 상징주의(심볼리즘) 드라마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중세에 있었다는 상상의 나라를 무대로한 이 드라마의 중심은 멜리상드에 대한 플레아의 비극적 사랑에 있다. 메테르링크는 이 꿈과 같은 동화속에서 무서울 정도로 전율케 하는 사랑의 힘을 주제로 삼았지만 드빗시는 극적인, 그리고 음악적인 분위기를 더 강조하였다. 인상주의적인 대화는 멜랑콜리하고 마법적인 분위기를 전해주고 있다. 드라마에서 단어 하나하나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감정을 유발한다. 주인공들의 대사는 어떤 때는 침묵으로 대신하며 어떤 때는 같은 대사를 계속 반복하여 무언가 탄원하는 듯한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멜리상드


줄거리: 사냥을 나갔다가 숲속에서 길을 잃은 아르켈(Arkel)왕의 손자 골러드(Golaud: 또는 골러: 골라우드)가 샘물 옆에서 어떤 가련한 소녀를 발견한다. 길을 잃고 두려워하고 있는 멜리상드(Melisande)이다. 멜리상드는 자기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못한다. 밤이 짙어지자 멜리상드는 마지못해 골러드를 따라 나선다. 골러드는 결혼하였으나 얼마전 혼자 몸이 된 신세이다. 장면은 바뀌어 왕궁이다. 왕비 즈느비에브(Geneviève)가 늙고 눈먼 아르켈왕에게 편지를 읽어주고 있다. 손자 골러드가 이복 동생인 플레아(Pelleas)에게 보낸 편지이다. 골러드가 멜리상드라고 하는 아가씨와 결혼했다는 것이며 할아버지인 아르켈 왕이 자기의 신부를 선택해 주고자 했는데 돌연히 멜리상드와 결혼하였으므로 이들을 반겨하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워서 왕궁에 돌아가기를 주저한다는 얘기를 적었다. 그러나 이미 저질러진 일, 늙은 아르켈 왕은 손자 골러드의 결혼을 받아들인다. 이때 플레아가 들어와 친구가 죽어가고 있으므로 가서 보고 오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늙은 아르켈 왕은 플레아에게 플레아의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있는데도 찾아보지 않고 친구한테 가 보겠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하며 그보다는 이복형인 골러드가 신부와 함께 곧 올것이므로 마중하라고 지시한다.

 

플레아와 멜리상드


골러드와 멜리상드가 배를 타고 도착한다. 왕궁에 들어온 멜리상드는 모든 것이 생소하다. 더구나 골러드는 왕국의 일 때문에 이곳저곳을 자주 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멜리상드와 함께 있을 시간이 부족하다. 왕비 주느비에브는 플레아에게 형 골러드가 없으니 그럴수록 멜리상드를 잘 보살펴 주도록 당부한다. 어느날 플레아와 멜리상드가 왕궁의 정원에 있는 우물가를 거닐고 있을 때 멜리상드가 우물을 들여다본다. 멜리상드는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매혹 당하여 물을 저으면서 어린아이처럼 좋아한다. 그러다가 잘못하여 결혼반지를 우물 속에 빠트린다. 겁에 질린 멜리상드가 플레아에게 만일 남편 골러드가 결혼반지는 어디있냐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설명하면 되겠느냐고 묻자 플레아는 사실대로 말하면 될것이라고 대답해준다. 골러드가 숲속에서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한다. 부상당한 남편 골러드가 침상에 누워 있고 그 옆에서 멜리상드가 간호를 하고 있다. 갑자기 멜리상드가 눈물을 흘리며 이 우울한 성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한다. 골러드가 멜리상드의 손을 잡고 위로하다가 손가락에 결혼반지가 없는 것을 보고 어찌된 일이냐고 묻는다. 멜리상드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 잃어 버렸다고 말한다. 골러드는 멜리상드에게 플레아와 함께 동굴에 가서 반지를 찾아오라고 부탁한다. 어두운 동굴에서 플레아와 멜리상드는 나중에 골러드에게 동굴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설명할수 있도록 손으로 바위들을 더듬으며 잘 익혀둔다. 두 사람은 어느덧 서로 손을 잡고 있다.

 

골러드와 멜리상드


제2막. 멜리상드가 왕궁의 한쪽 탑에 있는 자기 방의 창문에서 노래를 부르며 머리를 빗는다. 멜리상드는 플레아의 모습이 보이자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어 보려다가 창문 밖으로 떨어진다. 마침 플레아가 떨어지는 멜리상드를 손으로 받는다. 두 사람의 얼굴이 겹치게 되자 플레아가 멜리상드에게 키스를 한다. 마침 이 모습을 본 남편 골러드가 어린아이처럼 입 맞추면서 장난하면 안된다고 하며 두 사람을 꾸짖는다. 골러드는 플레아에게 멜리상드가 곧 자기의 아기를 낳게 될 것이라고 얘기해 주며 더 이상 어린아이들처럼 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경고한다. 그러면서도 골러드는 플레아와 멜리상드가 서로 이상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의심한다.

 

우물 속에서 반지를 찾고자하는 멜리상드


제3막. 멜리상드를 찾아서 만난 플레아는 다음날 먼 곳으로 떠날 생각이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밤중에 샘물가에서 만나기로 한다. 멜리상드가 늙은 아르켈왕과 함께 있는데 골러드가 성큼 들어와서 멜리상드를 보고 부정한 여인이라고 비난하며 멜리상드를 바닥에 쓰러트린다. 그런후 골러드가 밖으로 뛰쳐나가자 멜리상드는 골러드가 자기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흐느낀다. 측은하게 생각한 늙은 아르켈왕이 만일 자기가 신이라면 남자들의 마음을 불쌍히 여길 것이라고 말한다. 샘물가에서 플레아와 멜리상드가 만난다. 행여나 남이 볼까봐 두려운 중에도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약속한다. 멜리상드는 누가 어둠 속에서 엿보는 것을 눈치 챈다. 그러나 두 연인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듯, 마치 어떠한 두려움도 없다는 듯, 또한 자포자기한듯 키스를 한다. 이 모습을 지켜본 남편 골러드가 격분하여 뛰쳐나와 칼로 플레아를 찔러 죽인다. 그리고는 도망치는 멜리상드를 쫓아간다. 멜리상드가 쓰러진다. 장면은 바뀌어 멜리상드의 침실이다. 골러드는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하여 깊이 후회하고 있다. 의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멜리상드가 조산아를 낳지만 멜리상드는 점점 죽어가고 있다. 멜리상드는 플레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플레아를 사랑했었다는 생각만 난다. 의사가 아기를 보여준다. 멜리상드는 아기의 얼굴에서 슬픔을 본다. 이윽고 멜리상드가 조용히 숨을 거둔다.

 

즈느비에브 왕비와 플레아와 멜리상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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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비쉬의 사생활 점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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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비쉬는 겉으로 보기에 점잖고 지성적인 사람으로 보인다. 드비쉬의 음악을 들어보면 침으로 철학적이면서도 지성적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그래서 드비쉬를 더 지성적인 사람으로 간주한다. 그런 드비쉬인데 사생활은 어떠한가? 간단히 말해서 대단한 여성 편력의 소유자였다. 복잡다단하고 파란만장한 여성편력이었다. 그래서인지 사생활만 보면 '그럴리가 없는데 그렇다니!'라면서 드비쉬에 대하여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연일까? 중요한 여성 편력만 짚어보자. 드비쉬는 18세의 약관일 때에 사랑에 눈을 떠서 마리 블랑셰 바스니에라는 여인과 죽자사자 8년이나 연애했다. 그런데 마리 블랑셰 바스니에는 앙리 바스니에라고 하는 파리의 공직자의 부인이었다. 그런 드비쉬인데 1884년 파리음악원에서 프리 드 롬(Prix de Rome) 상을 받게 되자 어쩔수 없이 막을 내려야 했다. 왜냐하면 프리 드 롬을 받으면 무조건 로마에 가서 지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로마에서 파리로 돌아온 디비쉬는 뤼 드 베를린(rue de Berlin)에 있는 부모님 집에서 기거하기 시작했다. 뤼 드 베를린은 현재 뤼 드 리에즈(rue de Liege)이다. 이때에 드비쉬는 리수(Lisieux)에서 올라온 양복공의 딸인 카브리엘르 뒤퐁과 열정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마침내 뤼 드 롱드레(rue de Londres)에서 동거생활을 시작했고 얼마후에는 뤼드 귀스타브 도레(rue de Gustave Dore)로 옮겨서 살았다. 드비쉬는 가비(Gaby)라는 애칭의 가브리엘르와 동거생활을 하면서 가수인 테레스 로저와 연애를 하였다. 드비쉬는 테레스 로저와 결혼할 생각까지 했다. 그래서 약혼을 했다. 그러나 얼마후에는 약혼을 파기했다. 드비쉬를 아는 사람들은 그런 드비쉬를 신사답지 못하다면서 비난했다. 작곡가인 에르네스트 쇼송은 드비쉬의 철없는 행동에 몹시 실망하고 분노하여서 결국 오랜 교우관계를 단절한 일도 있다.


드비쉬는 결국 양복공의 딸인 가브리엘르 뒤퐁을 떠났다. 떠난 이유는 가브리엘르의 친구인 로살리 텍시어와 새로 사귀기 위해서였다. 릴리라는 애칭의 로살리 텍시어는 패션 모델이었다. 드비쉬는 릴리에게 결혼해 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위협했다. 드비쉬와 릴리는 1899년에 정식으로 결혼했다. 드비쉬가 36세 때였다. 릴리는 드비쉬의 친구들 사이에서 사랑스럽고 살림을 잘하며 솔직한 성격이라는 찬사를 받아서 모두들  좋아했다. 그러나 드비쉬는 그렇게도 죽자사자했던 릴리였지만 점점 싫어하기 시작했다. 릴리의 지적 수준이 한계에 있으며 특히 음악적인 센스가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게다가 릴리는 나이가 들수록 늙어보여서 더 이상 매력적인 여성으로 보기가 어려웠다. 또한 릴리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드비쉬는 아이들을 무척 사랑했다.


드비쉬는 1904년에 엠마 바르다크(Emma Bardac)라는 여인을 알게 되었다. 엠마 바르다크의 아들인 라울이 드비쉬의 피아노 제자였기 때문에 라울을 통해서 엠마를 소개 받았던 것이다. 엠마의 남편은 파리에서 명망있는 은행가인 시기스몬드 바르다크였다. 엠마는 릴리와는 달리 화술이 뛰어나서 누구와도 무슨 대화든지 재미있게 했다. 무엇보다도 엠마는 재능있는 성악가였다. 노래를 아주 잘 불렀다. 엠마는 복잡하고 미묘한 여인이었다. 드비쉬는 아직 부인인 릴리를 친정집으로 보내고 엠마와 함께 노르만디의 영국령 저지 섬으로 휴가여행을 떠났다. 휴가에서 돌아온 드비쉬는 그해 7월에 친정집에 가서 있는 부인 릴리에게 편지를 보내어서 '우리들의 결혼관계는 막을 내렸다'고 선언했다. 그렇지만 엠마에 대하여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릴리는 파리로 급히 올라와서 드비쉬에게' 제발 이러지 말라'고 사정도 하고 '어디 잘 사나 보자'라며 협박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드비쉬는 릴리가 귀찮아서 잠시 아무도 모르는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가기도 했다. 그해 10월 14일, 마침내 릴리는 참을수가 없어서 자살을 기도하였다. 드비쉬와 릴리의 결혼 5주년 기념일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릴리는 콩코르드 왕장()에 서서 피스톨로 자기 가슴을 쏘았다. 그러나 무슨 모진 목숨이라고 죽지 않고 살아났다. 그러나 총알은 릴리의 척추에 평생 남아 있었다. 이런 끔찍한 사건이 있자 드비쉬의 친구들은 거의 모두 드비쉬에게 등을 돌리고 만나지도 않았다. 그리고 문제의 엠마 바르다크는 시집식구들로부터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듬해인 1905년 봄, 디비쉬와 엠마 바르다크는 주위의 비난과 따가운 눈초리를 견디다 못해서 런던으로 도피하였다. 이때 엠마는 이미 임신중이었다. 그리고 그해 5월에 드비쉬와 릴리의 이혼은 겨우 성립되었다. 두 사람은 이스트본의 그랜드 호텔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그해 8월 말까지 지냈다. 드비쉬는 이스트본에 머물면서 교향적 모음곡인 '바다'(La Mer)의 마지막 손질을 하였다. '바다'는 드비쉬가 릴리와 이혼한 것을 기념하여서 완성한 작품이다. 두 사람은 9월에 파리로 돌아와서 볼로뉴 숲 부근의 아파트에 주거지를 정했다. 10월에는 이들의 유일한 딸인 클로드 엠마가 태어났다. 두 사람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것은 1908년이었다. 두 사람의 파란많은 결혼생활은 드비쉬가 1918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슈슈라는 애칭의 클로드 엠마는 드비쉬에게 '어린이 코너'라는 피아노 모음곡을 작곡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슈슈는 아버지 드비쉬보다 1년을 더 살다가 1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질부사에 걸렸는데 의사가 처방을 잘못하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드비쉬는 과연 누구를 얼마나 사랑했던 것일까? 1902년에 오페라 '플레아와 멜리상드'의 초연에서 멜리상드의 이미지를 창조한 메리 가든은 드비시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드비시가 과연 누구를 진실로 사랑했는지 정말로 모르겠다. 그는 그의 음악을 사랑했을 뿐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했다. 그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드비쉬와 엠마


드비쉬는 1918년 3월 25일 파리의 자택에서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5세였다. 그가 불치의 암으로 진단 받은 것은 1909년이었다. 엠마와 정식으로 결혼한지 1년 후였다. 드비쉬는 초조한 나날을 보내기 시작했다. 드비쉬는 1915년에 당시로서는 새로운 의술에 의한 항문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나 임시적인 방편에 불과했다. 수술은 오히려 그에게 더 많은 좌절감을 주었을 뿐이었다. 얼마나 쇠약해졌느냐하면 예를 들어서 아침에 옷을 입으려면 마치 헤라클레스와 같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당시는 1차 대전의 와중이었다. 드비쉬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날에도 독일은 춘계 대공세로서 파리에 공중으로나 지상으로나 폭격을 가하고 있었다. 1차 전쟁의 와중이어서 프랑스에서는 평상대로의 장례식을 치룰수 없었다. 드비쉬의 시신은 독일군이 계속 파리에 포격을 가하고 있는 중에 이리저리 길을 피하여서 페레 라셰이스(Pere Lachaise) 공동묘지로 옮겨졌다. 매장하기 전에 교회의 의식도 치룰 처지가 못되었다. 드비쉬의 유해는 이듬해에 트로카데로 뒤편에 있는 파시(Ppassy)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드비쉬는 평소에 나무들이 우거지고 새가 우는 곳에서 영원히 쉬고 싶다고 말했다. 파시 공동묘지는 그러한 곳이었다. 1년 후에 딸 슈슈도 그곳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더 얼마후에는 부인인 엠마도 그곳에 안장되었다.   


드비쉬와 딸 클로드 엠마(슈슈). 19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