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남몰래 읽는 366편

304. Verdi, Giuseppe (베르디) [1813-1901]-아이다

정준극 2007. 7. 5. 11:12

주세페 베르디

 

[아이다]

 

 

타이틀: Aïda (Aida). 전4막의 그랜드 오페라. 아이다는 에티오피아 공주의 이름. 프랑스의 이집트학 전문가인 오거스트 마리에트(Auguste Mariette)의 개요에 의해 카미유 뒤 로클(Camille Du Locle)이 프랑스어 산문시로 썼으며 이를 안토니오 기스란조니(Antonio Ghislanzoni)가 오페라 대본으로 만들었다. 베르디 자신도 대본작성을 위해 기여했다. 
초연: 1871년 12월 24일 이집트의 카이로 오페라하우스
주요배역: 아이다(에티오피아의 공주), 라다메스(이집트군 사령관), 암네리스(이집트의 공주), 아모나스로(에티오피아의 왕, 아이다의 아버지), 람피스(이집트의 고승), 이집트 왕
음악 하이라이트: 라다메스의 로만짜, 아이다의 로만짜, 개선행진곡(승리의 송가), 3막 나일강변에서의 아이다의 로만짜, 아이다와 라다메스의 피날레 듀엣, 이집트 승려들의 합창, 나일의 음악(바이올린 모티프, 첼로 모티프, 플륫 모티프)

 

아이다역의 비올레타 우르마니 


베스트 아리아: Celeste Aida[청아한 아이다](T), Ciel! Mio padre[하늘이여, 나의 아버지](S), Ritorna vincitor[이기고 돌아오라](S), O patria mia[오, 나의 조국](S), Fuggiam gli ardori inospiti[이 벌거벗고 뜨거운 사막에서 벗어나자](S+T)
사전지식: 고대 이집트를 무대로 한 3각 관계 사랑의 비극. 아이다는 베르디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으로 실제로 세계무대에서 가장 많은 공연을 기록한 작품이다. 대형 무대장치 때문에 제작비가 엄청나게 들어서 제작자를 괴롭히는 작품이다. 하지만 너무나 훌륭하기에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라마메스장군의 개선장면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장관이다. 순수한 인간의 열정과 감성을 주제로 프랑스 스타일의 스펙터클한 무대 연출은 다른 오페라에 비하여 지루한 느낌을 거의 주지 않는다.
에피소드: 이집트 총독(Khedive)이 새로 짓는 카이로 오페라하우스의 개관을 기념하여 당대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인 베르디에게 당시로서는 거금 2만 달러를 주고 의뢰한 작품이다. 케다이브는 1년 앞서서 준공된 수에즈 운하를 기념하여 공연토록 요청하였으나 베르디가 시간을 맞출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카이로의 초연은 유명한 콘트라베이스 주자인 보테시니(Bottesini)가 지휘했다. 카이로에서의 초연 이후, 이탈리아에서의 초연은 베르디 자신의 지휘로 이듬해에 밀라노에서 있었다. 열광의 도가니였다. 관중들은 기립박수로 기록적인 32번의 커튼콜을 하였다. 

 

바르셀로나 리세우극장의 아이다 공연 


아이다의 아버지 아모나스로는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60년에 에티오피아의 왕이었다. 역사적으로 그에게 딸이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기록에 있는 사항은 아모나스로가 사자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용맹한 왕이었다고 한다. 

 

1908년도 미국 클리브랜드 오페라 포스터 

 

줄거리: 제1막. 파라오의 이집트는 인접한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수많은 에티오피아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왔다. 그 중에는 에티오피아 공주인 아이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다는 이집트 공주인 암네리스의 노예가 되었다. 아이다가 에티오피아의 공주인 것은 아무도 모른다. 이집트에 항거하는 에티오피아가 또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분노로 광폭해진 에티오피아 병사들이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로 진군하고 있다. 민속음악과 같은 곡조와 비트가 이들을 더욱 몰아세운다 (그러나 이 장면은 간혹 삭제되어 공연되지 않는다). 늠름한 청년 장군 라다메스(Radames)는 자기가 이들을 물리칠 대장으로 선발되기를 기도한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 국왕의 신임을 얻게 되어 자기가 사랑하는 아이다와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라다메스는 저 유명한 ‘청아한 아이다’(Celese Aïda)를 부른다. ‘왜 이집트 청년이 이탈리아어로 노래를 부르냐?’고 묻지 말아 주기 바란다. ‘왜 그 당시에는 사랑의 세레나데를 저토록 힘들게 불렀나?’라고도 묻지 말아주기 바란다.

 

2008년도 퍼시픽 오페라의 아이다 공연. 아이다역은 안젤라 브라운

 

그건 그렇고 사랑은 복잡하고 힘든 것이라는 말처럼 라다메스의 사랑에도 복잡하고 힘든 일이 자리 잡고 있다. 첫째는 국왕의 딸 암네리스(Amneris)가 청년 장군 라다메스를 열렬히 사모하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아이다는 바로 암네리스 공주의 개인 시녀라는 점이다. 라다메스는 암네리스공주가 자기를 아주 특별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면서도 노예 처녀인 아이다만을 생각하고 있다. 이 삼각관계에서 불행의 싹이 움트기 시작한다. 라다메스가 토벌군 대장으로 선발된다. 적군은 아모나스로(Amonasro)왕이라는 대단히 거친 사람이 이끌고 있다. 우연의 일치라고나 할까? 바로 아이다의 아버지이다. 또다시 복잡함이 전개된다. 만일 아이다가 라다메스의 승리를 기원한다면 아버지의 죽음을 원하는 것이 되고 만일 아버지의 승리를 기원한다면 사랑하는 낭군님이 죽게 되는 것이다. 라다메스의 군대가 출정하자 군중들은 ‘이기고 돌라오라’(Ritorna vincitor)를 소리친다. 제1막은 화려하고 관능적인 이집트 댄스로 막을 내린다. 라다메스는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다.

 

미국 사크라멘토 오페라. 암네리스와 라다메스

 

제2막. 라다메스가 승리를 거두었다. 폭도와 같은 에티오피아 군대를 쓸어 버렸다. 무대는 병사들, 포로들, 트럼펫, 코끼리, 그리고 군대의 모든 휘장들로 가득하다. 개선행진곡이 장관이다. 이집트 국왕은 라다메스에게 소원이 있으면 무엇이던지 원하라고 말한다. 라다메스는 ‘폐하의 공주....의 노예 처녀인 아이다와 결혼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할 생각이다. 우선 라다메스는 전쟁포로들을 모두 석방한다. 다만 아이다와 아이다의 아버지인 에티오피아왕만 남는다. 아이다의 아버지는 일반 병사처럼 보이게 변장하여 신분이 탄로 나지 않는다. 이집트 국왕은 개선장군에 대한 보상으로 라다메스에게 자기의 딸 암네리스 공주의 손을 잡도록 한다. 결혼의 상징이다. 군중들이 환호를 하며 ‘이집트에 영광을!’이라고 외친다. 라다메스와 아이다를 제외하고 모두 행복하다.

 

아이다역의 아말릴리 니짜

 

제3막. 나일강은 달빛에 고요하다. 강변에 우뚝 솟은 사원에서 아이다가 라다메스를 기다린다. 라다메스가 오기 전에 아이다의 아버지가 나타난다. 아버지는 딸 아이다에게 라다메스 장군을 설득하여 다음날 이집트 군대가 에티오피아를 총공격하려는 계획을 알아내도록 한다. 아버지는 만일 그런 정보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조국 에티오피아의 군대는 전멸을 당할 것이며 아이다의 가족도 모두 살육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 조국인가? 사랑인가? 아이다는 마지못해 아버지의 말대로 하겠다고 승낙한다. 라다메스가 달빛을 받으며 나타난다. 아이다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와 멀리 떠나자고 애원한다. 마침내 라다메스도 그렇게 하자고 약속하고 이집트 군대에게 발각되지 않고 도피하려면 이러이러한 방향으로 가면 된다고 말한다. 이집트 군대가 에티오피아를 공략하지 않는 유일한 방향이라는 중요한 전략을 은연중에 말한 것이다. 암네리스공주는 라다메스가 자기를 만나지 않고 어디론가 혼자 가는 것을 보고 따라왔다가 두 사람의 사랑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에티오피아의 왕이며 아이다의 아버지인 아모나스로가 숨어있던 곳에서 뛰쳐나온다. 이제 전략을 알게 된 것이다. 역시 숨어있던 암네리스도 뛰쳐나온다. 군사전략 이상의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이다의 작곡을 요청한 이집트의 케다이브 이스마일 파샤 

 

제4막. 암네리스 공주는 그래도 라다메스의 목숨을 구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라데메스가 거절한다. 라다메스는 오로지 죽음을 택하겠다고 말한다. 사원의 승려들이 나와 라다메스에게 ‘배반자!’라고 외친다. 오페라는 유명한 더블 신으로 막을 내린다. 무대는 두 층으로 나뉜다. 위쪽에서는 암네리스 공주가 눈물을 흘리며 사원 안으로 몸을 던진다. 모든 것을 잊고 여승이 되기 위해서이다. 아래쪽에는 깊은 구덩이가 있다. 이 안에는 라다메스가 처형만을 기다리며 갇혀있다. 라다메스는 혹시 아이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볼수 있을까 하지만 볼수가 없다. 아이다가 몰래 구덩이 안의 감방으로 숨어 들어갔기 때문이다. 아이다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죽을 결심을 하고 목숨이 다 할 때까지 잠시라도 더 있을수 있다는 기쁨에 차 있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기막히게 감동적인 듀엣을 부른다.

 

라다메스 역의 로리츠 멜키오르

 

[아이다 에피소드]
1869년 11월 17일 수에즈 운하 개통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이집트의 케다이브(Khedive: 1867-1914년 기간 동안 터키 제국이 임명한 이집트 총독)는 카이로에 새로운 오페라 극장을 지었다. 1869년 11월 7일에 있었던 개관 기념 공연은 베르디의 리골레토였다. 사실 케다이브는 개관 기념 공연을 위해 베르디에게 새로운 작품의 제작을 부탁했었다. 하지만 베르디는 ‘무슨 기념행사를 위해 작곡한다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아서...’라면서 슬며시 거절했다. 케다이브는 체면도 있고 해서 여러 루트를 통해 베르디에게 끈질기게 접촉했다.

결국 1870년 베르디는 특별히 카이로를 위해 이집트를 소재로한 작품을 쓰기로 승낙했다. 케다이브는 공전의 유례가 없는 거금을 작곡료로 선지불했다. 여기에는 베르디의 친구 카미유 뒤 로클이란 사람의 공로가 컸다. 베르디는 뒤 로클과 파리에서 돈 카를로를 위해 함께 일한 일이 있다. 어느날 뒤 클로가 베르디에게 시나리오 한권을 보냈다. 프랑스의 이집트학 전문가인 오거스트 마리에트가 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시나리오였다. 마리에트는 케다이브를 위해 일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베르디는 뒤 로클이 보낸 시나리오를 보고 상당히 구미가 당겼다. ‘야, 거저 이거 관찮은 스토리인데...’라고 생각한 베르디는 시나리오를 부분별로 나누어서 이 부분은 레시타티브로 하면 되고 이 부분은 무대 배경을 이렇게 하면 되며 아리아는 이 부분에서 하면 좋을것 같다는 식의 초안을 만들었다. 특히 소프라노 아리아는 베르디의 부인인 주세피나를 염두에 두고 배려하였다. 베르디는 곧 이 계획서를 대본가인 시인 안토니오 기스란초니에게 보냈다. 베르디는 대본의 완성을 위해 신경을 무척 썼다. 직접 대사를 이곳저곳 뜯어 고치기도 했다. 결국 베르디는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대본을 몰고 간 것이다.

 

아이다의 초연을 지휘하는 베르디

 

카이로에서의 초연은 1871년 1월로 예정되어있었다. 그런데 그 전해의 7월에 프러시아(독일)가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11월에는 파리를 점령하는 바람에 카이로 초연이 지연되었다. 아이다의 무대 장치 및 의상 등등의 모든 제작을 뒤 로클과 마리에트의 감독으로 파리에서 해서 배편으로 카이로로 가져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전쟁 때문에 일할 사람을 구하지 못해 완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베르디로서는 공연 지연이 다행이었다. 사실, 대본가인 기슬란초니로 말하자면 사람이 약간 게으른 구석이 있어서 베르디에게 대본을 제때에 보내주지 않았다. 연습 날자는 다가오고...베르다는 거의 매일 성화를 해서 겨우 몇 장의 대본이 완성되면 번개처럼 가져와서 작곡을 계속했다. 결과, 성악 부분은 다 되었지만 오케스타라 파트가 하나도 안 되어 있었다.

 

물론, 위대한 베르디 선생 역시 원래 만만디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라 다른 오페라의 경우에도 오케스트라 부분을 연습도중에 작곡하는 전력이 자주 있었으므로 공연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아이다의 오케스트라 파트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해서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베르디는 카이로 공연의 지연으로 직접 리허설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집에 편안히 앉아서 부인과 함께 차도 마시면서 오케스트라 부분을 완성할수 있었다. 1871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아이다 초연은 글자그대로 대성공이었다. 베르디는 터키 제국으로부터 ‘오토만 대 훈장’을 받았다. 베르디는 다른 일 때문에 바빠서 훈장 수여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베르디는 카이로에서의 아이다 공연이 지연되자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우선 공연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주위에서 ‘아니, 초연을 카이로에 약속했는데...’하면서 눈치를 주는 바람에 라 스칼라 공연은 이듬해 2월에 실현할수 있었다. 만만디이면서도 꼼꼼하기로는 자타가 알아주는 베르디인지라 주역들이 연습하는 곳에 가서 코치하기가 일수였고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의 규모를 크게 확장토록 했다. 실제로 베르디는 아이다의 밀라노 공연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로 신경을 썼다. 의상 디자이너까지 직접 선정한 것만 보아도 알수있다. 또 베르디는 원래의 전주곡대신 별도로 서곡을 작곡하여 붙이려 했으나 나중에는 원래의 전주곡을 쓰는 것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아이다의 밀라노 초연은 오래전부터 대단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티켓 값은 사상 최고였다. 라 스칼라 극장에는 무대 장치를 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1872년 2월 8일 역사적인 공연이 이루어졌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 공연을 보려고 몰려왔기 때문에 한 좌석에 두 사람씩 앉는 경우도 많았다.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극장 문밖에서 서성거리며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라다메스 장군

 

이탈리아의 극장들은 아이다를 공연하게 해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밀라노 공연 이후 2년 동안 아이다는 아주 특별한 극장에서만 공연될수 있었다. 베르디가 과연 그 극장이 아이다를 공연할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직접 검토하고 공연을 결정했다. 예를 들어 파르마극장은 베르디의 인정을 받아 아이다를 공연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온 동리 사람들이 아이다를 다 좋아 한것은 아닌것 같았다. 어느날 베르디는 어떤 청년으로부터 편지 한 장을 받았다. 파르마에서의 아이다를 보기위해 먼 마을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두 번이나 와서 보았지만 음악에 대하여 실망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베르디 선생에게 왕복 기차표 값 및 입장료, 그리고 공연에 들어가기 전에 먹기나 잘 먹어야겠다고 생각해서 기차역 식당에서 비싼 돈을 주고 사먹었던 식사비를 갚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자기 생각에는 아이다가 앞으로 다른 극장에서 두어번 공연하고 그만두게 될것 같다는 말도 덧 붙였다. 베르디는 전에 없었던 이같은 뜻밖의 이상한 주장을 일종의 모욕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공연 관계자에게 당장 그 청년이 요구한 돈을 갚아 주라고 지시했다. 단, 저녁밥은 집에 가서 먹을 수도 있는 문제이므로 갚아 주지 말도록 했다. 그리고 지불한 돈에 대하여 영수증을 보내주도록 요청하되 다시는 베르디의 신작 오페라를 관람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으라고 했다. 이 청년의 예견은 빗나갔다. 아이다는 카이로 초연이후 1백 몇십년을 지나면서 세계 각국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오페라의 하나가 되었다. 실제로 아이다는 초연이후 단 10년 동안에 세계 각 극장에서 155회 공연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이름난 음악 축제인 베로나 야외극장 음악제는 1913년 첫 음악제를 시작할 때에 아이다를 공연했다. 끝으로 한마디! 아이다가 수에즈운하의 개통을 기념하여 작곡되었다하면 그 말을 전적으로 믿지 말것!

 

라다메스 역의 전설적인 프랑코 코렐리

 

[아이다 일지 정리]
아이다가 수에즈 운하의 개통을 위해 작곡되었다는 설명은 합당치 않다. 아이다가 카이로 오페라극장의 개관 기념으로 공연되었다는 설명도 맞지 않는다. 그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아이다에 얽힌 배경 스토리를 시기별로 다시 정리하여 보았다.
 
- 1869. 봄: 이집트의 케다이브(Khedive)궁에서 어떤 사람이 밀라노의 베르디를 찾아와 수에즈 운하 개통 기념식에서 연주할 찬가(Hymn)을 작곡하여 달라고 요청했다. 베르디는 '나는 무슨 기념식을 위한 작품을 쓰지 않습니다'라고 하며 거절했다.
- 1869. 11월: 카이로에 왕립카이로오페라(Royal Opera Cairo)가 오픈되었고 개관 기념으로 베르디의 리골레토가 공연되었다.
- 1870. 1월: 프랑스의 이집트학 전문가인 오거스트 마리에트(Auguste Mariette)가 당시 파리 오페라의 직원인 카미유 위 로클(Camille du Locle)에게 24페이지에 달하는 이집트에 포로로 잡혀온 에티오피아 공주의 얘기를 제공하고 오페라의 소재로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고 얘기했다.
- 1870. 5월: 베르디와 친분이 있는 뒤 로클은 마리에트의 원고를 베르디에게 보였다. 베르디는 스토리에 깊은 흥미를 느끼고 오페라로 작곡할 생각을 가졌다. 뒤 로클은 카이로의 케다이브 궁과 협의하여 오페라 작곡에 합의했다. 베르디는 15만 프랑의 작곡료를 요청했다. 돈 카를로 작곡료의 3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케다이브 궁은 흔쾌히 수락하였다.
- 1870. 6월: 뒤 로클과 베르디가 오페라의 내용을 구성하고 타이틀은 여주인공의 이름인 아이다로 결정했다.
- 1870. 7월: 베르디와 케다이브간에 계약이 체결되었다. 1871년 1월 카이로에서의 공연을 목표로 정했다. 의상과 세트 등은 파리 오페라가 제공키로 했다.
- 1870. 9월: 보-불전쟁이 일어나 프러시아군이 파리를 점령했다. 파리 오페라에서의 의상과 세트 제작이 지연되었다.
- 1871. 1월: 베르디와 케다이브 궁은 아이다의 공연을 1871년 겨울 또는 1872년으로 연기하는데 합의했다.
- 1871. 9월: 베르디는 아이다의 스코어를 완성하고 이를 밀라노에서 왕립 카이로 오페라의 책임자에게 전달했다.
- 1871. 12월 24일: 왕립카이로오페라극장에서 역사적인 아이다의 초연이 있었다. 아이다는 그 시즌에 12회의 공연이 있었다.
 
- 1872: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이탈리아 초연이 있었다. 이후 1878년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론극장에서부터 비엔나의 슈타츠오퍼에 이르기까지 세계 130개 극장에서 아이다가 공연되었다.
- 1912: 왕립카이로오페라극장이 화재로 전소되었다.

 

 

 

아이다가 초연되었던 왕립카이로오페라극장. 외관의 모습은 남아 있지만 내부는 1912년의 화재로 모습을 찾아 볼수 없다. 지금은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앞의 광장은 아직도 Opera Square(Median El Opera)라고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