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하우스/유명 오페라극장 2

트리에스테 주세페 베르디 오페라극장

정준극 2007. 9. 4. 13:25

트리에스테 주세페 베르디 오페라극장(Teatro Lirico Giuseppe Verdi)

Teatro Nuovo: Teatro Verdi Comunale


 트리에스테의 테아트로 리리코 주세페 베르디

 

트리에스테의 테아트로 리리코 주세페 베르디는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를 기념하는 오페라 극장이다. 지금부터 2백여년 전인 1801년 4월 21일 오프한 극장이다. 당시에 그 자리에는 체사레오 레지오 테아트로 디 산 피에트로(Cesareo Regio Teatro di San Pietro)라는 8백석 규모의 작은 극장이 있었다. 그것을 철거하고 새로 1천 4백석 규모의 오페라 극장을 지었기 때문에 처음 오픈하였을 때의 명칭은 테아트로 누오보(Teatro Nuovo: 신극장)이었다. 테아트로 누오보는 트리에스테 시당국이 지은 극장이 아니라 시민들 몇 명이서 자금을 내어 지은 사립극장이었다. 테아트로 누오보의 개관기념 공연은 요한 시몬 마이르(Johann Simon Mayr)의 '스코틀랜드의 지네브라'(Ginevra di Scozia)였다. 그후 1821년부터는 명칭이 테아트로 그란데(Teatro Grande: 대극장)로 바뀌었다. 그러나 1천 4백석 규모의 극장은 날로 발전해 가는 트리에스테로서 적합하지 않았다. 더 규모가 크로 더 현대적인 새로운 극장이 필요했다. 사실 트리에스테에는 성베드로극장(Teatro di San Pietro)도 있었지만 이것도 규모가 작아서 만족스럽지 못했다. 성베드로극장은 마침내 1800년에 문을 닫았다. 트리에스테의 유지인 조반니 마테오 토마시니는 성베드로극장이 문을 닫기 전부터 새로운 극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공감하고 1795년에 트리에스테의 오스트리아 총독부에 극장신축에 대한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1798년에는 시당국과 조반니 마테오 토마시니 사이에 계약이 체결되었다. 계약의 조건은 새로 오페라 극장이 완성되면 운영비는 매년 시당국이 부담하며 건축비를 부담한 토마시니는 극장의 일부 박스 좌석을 판매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트리에스테 주세페 베르디 극장의 오디터리움
 

베니스의 라 페니체 극장을 설계했던 지안 안토니오 셀바(Gian Antonio Selva)가 새로운 오페라 극장의 설계를 맡았다. 고전적인 말편자 모양의 오디터리움으로 설게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극장의 외관은 오스트리아측에서 보았을 때 너무나 평범하였다. 시당국은 외관의 설계를 마테오 페르츄(Matteo Pertsch)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밀라노의 라 스칼라와 비슷한 외관의 극장이 완성되었다. 그리하여 1801년 오픈한 신극장은 내부가 라 페니체 스타일이며 외관은 라 스칼라 스타일이었다. 이 극장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몇번이나 명칭이 바뀌었다. 1821년에는 테아트로 그란데(대극장)으로 바뀌었다. 오늘날의 주세페 베르디 극장의 이름이 테아트로 그란데일 때에 베르디의 오페라 '해적선'(Il Corsaro)가 이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1848년이었다. 오페라 '해적선'의 초연에서 여주인공인 메도라의 이미지는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가 창조하였다. 주세페 스트레포니는 '해적선'의 초연을 맡은 때로부터 약 10년 후인 1859년에 베르디의 부인이 되었다. 그리고 '해적선'이 초연된지 2년 후인 1850년에는 베르디의 또 다른 걸작인 '슈티펠리오'(Stiffelio)가 역시 테아트로 그란데에서 초연되었다. 그런데 실상 테아트로 그란데에서는 '해적선'과 '슈티펠리오'가 공연되기 전에도 베르디의 다른 오페라들이 대인기를 끌며 공연되었다. 이와 함께 바그너 또는 푸치니의 오페라들도 이 극장에서 트리에스테 초연을 가졌다. 


베르디의 오페라 '해적선'에서 콘라트와 메도라의 모습을 그린 작품. 챨스 윈느(Charles Wynne)작.  


테아트로 그란데가 개관된지 꼭 60년 후인 1861년에 극장의 이름이 다시 변경되었다. 이번에는 테아트로 코뮤날레(시립극장)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개인소유의 극장에서 시소유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1881년에는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이루어져서 좌석수를 2천으로 만들었다. 입석의 스페이스를 좌석으로 만들어서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몇달 후에 안전에 이상이 있다는 진단이 내려져서 재보수를 위해 다시 한동안 문을 닫아야 했다. 이 때에 조명을 가스에서 전기로 바꾸는 공사도 이루어졌다. 1889년에 보수가 끝나고 테아트로 코뮤날레는 1천석의 아담한 극장으로 다시 태어났다. 1901년 1월 27일에 베르디가 서거했다는 소식이 전이탈리아에 전해졌다. 그런 소식이 전해진지 몇 시간 후에 테아트로 코뮤날레는 극장의 이름을 주세페 베르디 극장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테아트로 리리코 주세페 베르디라는 명칭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그후 1992년부터 5년동안 다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쳐서 1천 3백석으로 확장하였다. 1997년의 재개관 때에는 '비바 베르디'라는 타이틀의 갈라 콘서트로서 베르디 오페라의 하일라이트들이 공연되었다. 공사기간 중에는 살라 트립코비치(Sala Tripcovich)가 임시 공연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규모가 작기 때문에 소류모 실내 오페라 또는 오페레타 등을 공연했다. 그런데 테아트로 베르디의 프로그램들은 과거 40여년 동안 오페라 보다는 오페레타를 주로 무대에 올린 것이었다. 오스트리아가 트리에스테를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는 1918년에 트리에스테에서 물러날 때까지 테아트로 베르디에서 국제오페레타페스티발을 매년 개최했었다.

 


 베르디의 슈티펠리오의 한 장면. 손드라 라드바노브스키와 호세 쿠라. 메트로폴리탄 무대


테아트로 리리코 주세페 베르디에서 초연을 가진 오페라들은 다음과 같다.


- 시몬 마이르의 '스코틀랜드의 지네브라'(Ginevra di Scozia). 1801년 4월 21일

-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카푸아의 한니발'(Annibale in Capua). 1801년 5월 20일

- 체사레 푸니(Cesare Pugni)의 '에딘버러의 리챠드'(Ricciarda di Edimburgo). 1832년 9월 29일

- 오토 니콜라이(Otto Nicolai)의 '헨리 2세'(Enrico II). 1839년 11월 26일

- 주세페 베르디의 '해적선'(Il Corsaro). 1848년 10월 25일

- 주세페 베르디의 '슈티펠리오'(Stiffelio). 1850년 11월 16일

- 안토니오 스마렐리아(Antonio Smareglia)의 '이스트리아의 결혼'(Nozze istiraine). 1895년 3월 28일


주세페 베르디 극장의 소극장인 살라 데 발로(Sala de Ball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