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광과 고난의 역정 Emma Albani (엠마 알바니)
디바의 세계에서 캐나다 퀘벡 샹블리 출신의 엠마 알바니는 하나의 혜성과 같다. 그는 뛰어난 오페라 소프라노로서 영광과 고난이 함께 엮어져 있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엠마는 1847년 11월 1일, 전문 음악인인 조셉 라주느쎄(Joseph Lajeunesse)의 딸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마리 루이스 세실 엠마 라주느쎄(Marie Louise Cecille Emma Lajeunesse)였다. 알바니는 4살때부터 11살때까지 7년 동안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음악 교육을 받았다. 그후 정식 교육을 위해 몬트리올의 수녀원에 들어가 또 다시 7년을 지냈다. 어머니는 알바니가 9살 때 세상을 떠났다. 알바니는 아버지, 그리고 여동생인 코넬리아와 함께 몬트리올을 떠나 온타리오로 이사 갔다가 나중에는 미국 뉴욕주의 알바니에 가서 살게 되었다. 엠마 알바니는 알바니에서 인기있는 성악가가 되어 여러 연주회에 초청을 받아 출연하기 시작했다. 엠마는 연주회에 출연하여 번 돈으로 성악공부를 더 하기 위해 21세 때에 단신 파리로 떠났다. 그리고 이름도 제2의 고향인 알바니를 생각하여 엠마 알바니로 바꾸었다. 이탈리아에서는 테너 길베르-루이 뒤프레(Gilbert-Louis Duprez)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뒤프레는 1835년 도니제티의 루치아 세계초연에서 에드아르도를 맡아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했던 인물이었다. 2년후인 1870년 알바니는 이탈리아의 메시나(Messina)에서 ‘사랑의 묘약’의 아디나로 오페라에 첫 데뷔하였다. 대성공을 거둔 데뷔였다. 뛰어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인 알바니는 그후 유럽의 여러곳에서 초청을 받아 본격적인 오페라 디바로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출연한 오페라는 람메무어의 루치아, 로베르토 일 디아볼로(마이에르베르), 아프리카 여인(마이에르베르), 로지나(세빌리아의 이발사)등이었다.
메씨나에서 데뷔한 다음해에 엠마는 런던 코벤트 가든의 총감독인 프레데릭 가이(Frederick Gye)로부터 5년 전속계약 제안을 받았다. 다음해에 알바니는 '몽유병자'(벨리니)의 아미나로서 코벤트 가든에 데뷔하였다. 1874년 알바니는 당대의 디바들인 아델레 패티(Adele Patti), 소피아 스칼키(Sophia Scalchi)와 함께 영국의 알프레드 왕자와 러시아의 마리 공주와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해 말, 알바니는 뉴욕에 도착하여 음악아카데미(당시 가장 대표적인 오페라 극장)에서 몽유병자, 람메무어의 루치아, 미뇽에 출연하여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이어 알바니는 미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공연을 했다. 이 연주여행에는 코벤트 가든에서 알바니를 발탁한 프레데릭 가이의 아들 어네스트 가이(Ernest Gye)가 함께 하였다. 아버지 프레데릭이 동행해야 했지만 병환으로 아들이 대신 가게 된것이다. 순회 연주를 가지면서 어네스트와 엠마 알바니는 사랑에 빠지고 두 사람은 영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2년후인 1878년 런던의 바바리안 채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불행하게도 어네스트의 아버지인 프레데릭이 몇 달후 세상을 떠났다. 알바니는 마치 아버지를 잃은 것처럼 상심에 빠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태어난 아들의 세례명을 프레데릭-어네스트라고 붙였다.
엠마는 이탈리아의 콜로라투라보다는 바그너에 보다 심취하기 시작했다. 사실 1974년 뉴욕에서도 2주일을 남겨 놓고 엘자(로엔그린)를 맡아 바그너 소프라노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바 있다. 영국에 돌아온 1876년에는 코벤트 가든에서 탄호이저의 엘리자베트를 맡아 대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1889년에는 애비-그러(Abbey-Graw) 순회 연주회단과 함께 미국 전역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이 때 출연진은 유명한 아델레 패티, 릴리안 노르디카(Lillian Nordica), 프란테스코 타마뇨(Francesco Tamagno) 등이었다. 미국에서 순회 연주회를 갖는 동안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가 개관되었다. 알바니는 메트로의 개관 기념 공연인 오텔로에서 데스데모나를 불러 열광적인 기립박수를 받았다. 1890년 3월 24일이었다. 이날의 연주회는 갈라 형식이었다. 같은해 12월 알바니는 리골레토의 질다로서 메트로에 정식 데뷔하였고 이어 메트로의 디바로서 군림하였다.
알바니의 인기는 1896년 6월 코벤트 가든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맡음으로서 최고의 정상에 올라갔다. 알바니는 그로부터 한달후인 7월에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하였다. 알바니는 1852년부터 1896년 은퇴할 때까지 40년 이상을 코벤트 가든과 인연을 맺으며 공연활동을 했다. 코멘트 가든에서의 마지막 공연은 위그노에서 발렌타인을 맡은 것이었다. 오페라에서 은퇴한 후에 엠마는 고국인 캐나다 전역을 순회하는 연주회에 참가하는등 콘서트에는 계속 출연하였다. 이러한 콘서트 연주도 1911년 런던의 앨버트 홀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이 고별 연주회에는 아델레 패티와 넬리 멜바가 우정 출연하였다. 1925년 알바니는 영국 왕실로부터 Dame의 작위를 받았다. 같은 해에 남편 어네스트가 세상을 떠났다. 남편의 죽음 이후 엠마는 무척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남편이 남긴 빚 때문이었다. 런던과 엠마의 고향 마을인 캐나다의 챔블리(Chambly)에서 넬리 멜바가 주동이 되어 ‘엠마 돕기 자선 음악회’가 열렸다. 이 음악회의 수익금으로 알바니는 그나마 여생을 빈곤에서 벗어나 보낼수 있게 되었다. 1930년 4월 3일 엠마 알바니는 세상을 떠났다. 엠마는 런던의 브롬튼(Brompton) 공동묘지에 있는 남편 어네스트의 묘지 옆에 안장되었다. 1980년 캐나다 정부는 엠마 알바니 서거 50주년을 기념하여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이어 몬트리올 시당국은 지하철 Place-des-Arts 역에 엠마 알바니의 초상화를 대형 스테인드 글라스 벽화로 제작하여 기념하였다. 엠마 알바니는 캐나다를 빛낸 최초의 국제적 디바였다.
1980년 캐다나 정부가 엠마 알바니의 서거 50주년을 기념하여 발행한 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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