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슈트라우스가 찬사를 보낸 Florence Easton (플로렌스 이스튼)

정준극 2008. 2. 27. 09:45
 

▒ 슈트라우스가 찬사를 보낸 Florence Easton (플로렌스 이스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그의 ‘엘렉트라’와 ‘장미의 기사’ 영국 초연에서 엘렉트라와 조피(Sophie)를 맡은 플로렌스 이스튼을 개인적으로 코치하여주었다. 그만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이스튼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스튼은 자니 스키키의 미국 초연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으며 테일러(Taylor)의 ‘왕의 심복’(The King's Henchman)의 세계초연에서 엘프리다를 맡았다. 이스튼은 1920년 메트로에서 마스카니의 로돌레타(Lodoletta) 초연에 카루소와 함께 공연하였다. 이스튼은 카루소의 마지막 무대인 ‘유태여인’(La Juive)에서도 함께 공연하였다. 카루소는 엘레아자를, 이스튼은 라헬을 맡았었다. 이스튼이 카루소와 함께 공연한 것은 1913년이 처음이었다. ‘황금서부의 아가씨’였다. 카루소는 딕 잭슨을, 이스튼은 미니(Minnie)를 불렀다. 플로렌스 이스튼은 20세기 초반 ‘오페라의 황금시대’를 장식한 위대한 디바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진정한 리릭 드라마틱 소프라노였다.

 

 

이스튼은 1882년 영국의 요크셔에서 태어났다. 그가 다섯 살때에 가족들이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이스튼은 토론토에서 피아노, 올갠, 성악 레슨을 받았다. 8년후인 1900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는 남은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이스튼이 18세때였다. 이스튼은 런던의 왕립음악원에 들어갔으며 1년후에는 파리에 가서 당시 이름을 떨치던 성악교사 엘리오트 하스람(Elliott Haslam)에게서 레슨을 받았다. 이스튼이 20세때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는 할아버지 집에 기숙하게 되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스튼에게 좋은 신랑감을 구해주어 어서 결혼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이스튼은 마침 전국순회공연을 떠나는 무디-맨너스(Moody-Manners)오페라단에 입단하여 새로운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듬해인 1903년 이스튼은 뉴캐슬에서 공연된 탄호이저에서 양치기소년을 맡아 오페라 무대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후 이 오페라단의 코벤트 가든 연주회에서 이스튼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스테파노(Stephano)를 맡아 주역급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주역을 맡은 것은 ‘보헤미나 소녀’에서 아르린(Arline)을 맡은 것이었다. 이스튼에 대한 인기는 날로 높아갔다.

 

 

엘리자베트(탄호이저)                                     에바

 

1904년, 이스튼은 22세때에 같은 무디-맨너스 오페라단에 있던 미국출신의 바그너 테너 프란시스 맥레논(Francis MacLennon)과 결혼하였다. 이듬해 남편 테너가 미국에서 순회공연할 일이 생겨 두 부부는 미국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를 계기로 이스튼은 그해에 보스턴에서 질다(리골레토)를 맡아 북미 데뷔를 하였다. 그는 또한 토론토와 몬트리올에서 질다와 마르게리테(파우스트)로 데뷔하여 호평을 받았다. 이스튼의 첫 번째 대성공은 ‘나비부인’으로였다. 이스튼은 영어대본으로 된 ‘나비부인’의 미국 첫 공연에서 초초상을 맡아 대대적인 갈채를 받았다. 이스튼은 남편 맥레논이 다시 베를린에서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독일로 돌아갔다. 남편 맥레논은 투리두를 맡아 그런대로 호평을 받았다. 한편 이스튼은 베를린 제국오페라(나중에 슈타츠오퍼)의 초청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첫 역할은 파우스트의 마르게리테였다. 독일어 대사를 열흘 이내에 마스터하여 훌륭한 공연을 했다. 다음에 맡은 역할은 아이다였다. 이스튼으로서는 처음 맡는 역할이었다. 이스튼은 막이 오르기까지 단 48시간의 여유가 없었지만 하루 후에 리허설까지 마치는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다. 아마 오페라 아티스트 중에서 처음 맡는 역할은 단 이틀 남겨두고 마스터한 사람은 플로렌스 이스튼 밖에 없을 것이다. 아이다의 놀라운 성공으로 이스튼은 베를린 제국오페라와 5년 계약을 맺게 되었다. 그로부터 이스튼은 레퍼토리의 폭을 넓히면서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독일에 머무는 동안 그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각별한 관심을 끌었다. 결국 이스튼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코치로 살로메도 공연하였다.

 

 

조콘다                                                         성엘리자베트(리스트의 성엘리자베트의 전설)


1912년 이스튼은 다시 미국을 밟았다. 카루소와 함께 ‘황금서부의 아가씨’를 공연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이스튼은 남편 맥레논과 함께 미국을 순회하였다. 가장 두드러진 성공은 시카고에서였다. 브륀힐데를 맡아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후 1차대전이 터졌다. 이스튼 부부가 독일로 돌아가는 데에는 위험부담이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미국에 남기로 작정했다. 이스튼은 1917년 메트로에서 산뚜짜로 성공적인 데뷔를 하였다. 그로부터 이스튼은 12개 시즌을 메트로에서 보냈다. 메트로에서의 이 기간동안 41개 역할로서 295회의 공연을 가졌지만 전체 활동 기간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모두 88개 역할을 맡아하였다. 여러 시대의 작품, 여러 스타일의 작품을 모두 소화한 놀라운 재능을 보여준 것이다. 특히 바그너의 경우에는 거의 모든 소프라노 역할을 맡아하였다. 메트로에서의 최고 프리마 돈나로 인정받은 공연은 1918년 리스트(Liszt)의 ‘성 엘리자베트의 전설’(Die Legende von der heiligen Elisabeth)의 무대 버전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표적인 역할은 초초상과 조피였다.


이스튼은 참으로 재능이 뛰어난 성악가였다. 그의 악보를 암기하는 능력은 가히 천재적이었다. 예를 들어 1927년 11월 3일부터 17일까지의 2주 기간동안 이스튼은 안드레아 셰니에의 맛달레나, 라 조콘다의 타이틀 롤, 유태여인의 라헬, 나비부인의 초초상, 장미의 기사의 마샬린을 한점 착오도 없이 모두 소화하며 공연하였다. 그같은 짧은 기간에 그토록 여러 역할을 맡을수 있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그저 존경과 찬사였다. 아마 릴리 레만(Lilli Lehmann)만이 이스튼과 필적할수 있었을 것이다. 이스튼에 대한 국제적인 존경과 명성은 독일과 미국, 캐나다에서 쌓은 기반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영국 출신의 다른 성악가들과는 상당히 다른 독특함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