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음성의 영광 Florence Jenkins (플로렌스 젠킨스)
196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태어난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Florence Foster Jenkins)는 노래 부르는 실력이 형편없었으나 음성만은 좋기 때문에 디바라고 인정받아 활동하여 유명해진 소프라노이다. 그는 어릴때부터 주위에서 ‘노래 참 잘한다!’고 치켜세우자 자기가 제일 노래를 잘하는 줄 알고 성악가가 되기 위해 유럽에 가서 레슨을 받겠다고 난리를 쳤으나 아버지가 반대하여 겨우 고향마을에서 음악학원에 등록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남들처럼 대학에 가서 더 공부할 생각으로 아버지에게 또다시 음악대학에 보내달라고 떼를 썼지만 아버지는 ‘노래는 무슨 노래’냐면서 만일 음대를 가면 학비를 대줄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플로렌스는 프랭크 젠킨스라는 젊은 의사와 눈이 맞아 아버지 몰래 필라델피아로 도망갔다. 얼마후 플로렌스 포스터는 프랭크와 결혼하여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1902년 이혼하였다. 남편이 소프라노가 되려는 플로렌스의 소망을 죽어라고 반대한 것이 이혼의 주요 이유였다. 당연히 위자료는 한푼도 받지 못했다. 플로렌스는 먹고 살기 위해 학교선생이 되었으며 시간 나는 대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피아노 레슨도 했다. 1909년, 딸 때문에 속이 상할대로 상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고맙게도 어느 정도의 재산을 플로렌스에게 남겼다. 아버지는 유언장에 ‘만일 플로렌스가 재혼하면 그 날로 당장 상속된 유산은 회수!’라고 못박아 놓았다. 아무튼 그는 아버지가 남겨준 약간의 재산으로 어머니와 함께 뉴욕으로 와서 버라이어티 극장의 삼문 배우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가 다니던 극장에서는 막간에 그래도 이름이 알려진 전문성악가들이 출연하여 노래를 선사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사람들은 플로렌스가 나오는 연극보다는 소프라노들의 노래에 더 많은 박수를 보냈다. 플로렌스는 자기도 노래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여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베르디클럽을 만들어 음악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베르디클럽에 대한 재정지원은 플로렌스 담당이었다.
그는 음반을 내면 사람들이 자기를 크게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비를 들여 레코딩을 하였다. 그 음반을 들어본 사람들은 플로렌스가 피치와 리듬에 둔하다는 것을 당장 알수있었지만 대단하다고 칭찬하였다. 아무튼 플로렌스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목소리 하나만은 상당히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음악적 재능보다는 얼마나 틀리는지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몰려오는 관중들도 많았다. 평론가들은 플로렌스의 공연을 보고 솔직히 못했다고 하기는 미안하므로 빗대어서 음악평을 썼다. 어느 평론가는 ‘인간 음성의 영광’(The Glory of Human Voice)라고 치켜세웠다. 그런 음악평을 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소프라노일까 라면서 호기심을 더했다. 그는 자신을 유명 소프라노인 프리다 헴펠(Frieda Hempel)이나 루이자 테트라찌니(Luisa Tetrazzini)와 비슷하다고 주장했으며 (어림없는 소리이지만) 간혹 관중석에서 자기를 보고 조소하는 것을 ‘질투에 불탄 라이벌들이 보내는 비난성 웃음’이라고 간주하여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물론 그는 평론가들이 호평을 보내주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내가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플로렌스는 리사이틀을 비교적 자주 가졌다. 레퍼토리는 통상적인 오페라 아리아(모차르트, 베르디, R 슈트라우스 등)들과 가곡(브람스 등)이었으며 간혹 그가 직접 작곡했거나 그의 반주자가 그를 위해 작곡한 노래로 구성되었다. 플로렌스는 연주회때 자기가 직접 디자인한 굉장한 옷을 입기를 좋아했다. 어떤 때는 천사처럼 날개를 달거나 딸랑거리는 방울을 단 드레스를 입고 나와서 움직일때마다 방울소리가 나도록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노래를 부르면서 꽃을 관중들에게 던져주기도 했다. 아마, 청중들이 자기에게 꽃다발을 보내주지 않기 때문에 반항하는 의미에서 그랬다는 얘기였다. 한번은 무대에 가지고 나온 꽃을 다 던져 주었지만 관중들이 더 달라고 소리치자 그나마 무대위에 흩어진 꽃들을 다시 주서서 던져준 일도 있다. 사람들은 플로렌스가 나이 때문에 전처럼 자주 출연하지 못하자 오히려 섭섭해하며 제발 오페라건 리사이틀이건 출연해 줄것을 요청했다. 아무튼 즐겁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플로렌스는 자기가 좋아하는 장소에서만 연주했고 자기가 선정하는 사람만 초청했다. 그는 매년 리츠칼튼 호텔에서 디너쇼를 가졌다. 당연히 자기가 초청한 사람만 참석할수 있는 연주회였다. 모두들 그를 추종하는 찬미자로만 한정했다. 플로렌스는 일반 대중들의 성화에 못이겨 76세의 나이로 카네기 홀에서 오페라에 출연했다. 1944년 10월 25일이었다. 사람들은 이 공연을 무척이나 기다렸다. 그래서 표가 모조리 매진되었다. 그로부터 한달후 플로렌스는 32년에 걸친 음악 생활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플로렌스 젠킨스는 두 장의 CD를 남겼다. 하나는 ‘인간 음성의 영광’(The Glory of the Human Voice)라는 타이틀이며 다른 하나는 ‘하이 C에서의 살인’(Murder on the High Cs)라는 타이틀이다. 첫 번째 타이틀은 어떤 평론가가 자기를 위해 쓴 기사의 제목이었으며 두 번째 제목은 당시 추리소설 붐이 있었기 때문에 흉내를 내본 것이다. 그는 1944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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