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감미로운 호주아가씨 Frances Alda (프란시스 알다)

정준극 2008. 2. 27. 09:47
 

▒ 감미로운 호주아가씨 Frances Alda (프란시스 알다)


프란시스 알다는 1879년 뉴질랜드에 살았던 명망있는 호주인 가정에서 홰니 제인 데이비스(Fanny Jane Davis)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노래에 재능을 보인 홰니는 아직 소녀시절에 호주로 가서 음악을 공부하였으며 18세 때부터 오페레타에 출연하며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22세때 유럽으로 건너간 그는 파리에서 유명한 성악교사 마르케시(Marchesi)로부터 본격적인 오페라 공부를 하였다, 마르케시는 홰니의 이름을 프란시스 알다로 고쳐주었으며 2년후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에 출연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1904년 마농이었다. 이 공연으로 알다는 ‘감미로운 22세의 호주 아가씨’라는 별명을 듣게 되었다. 파리에서 명성을 쌓기 시작한 프란시스 알다는 이어 코벤트 가든, 라 스칼라 등 유럽의 주요 오페라 극장에 등장하여 인기를 끌었으며 이윽고 1908년 메트로에 데뷔하여 위대한 카루소의 상대역으로 리골레토에서 질다역을 맡아 갈채를 받았다. 당시 지휘는 토스카니니였다. 알다는 토스카니니를 라 스칼라에서 샤펜티어의 루이제 초연때 출연하여 만난 일이 있었다. 그후 프란시스 알다는 1929년 은퇴할때까지 20년이 넘게 메트로의 프리마 돈나로서 각광을 받았다.

 


프란시스 알다는 뛰어난 기교와 순수한 리릭 음성을 지닌 디바였다. 그러한 재능으로 그는 데스데모자, 마농 레스코, 미미의 역할에서 남다른 재능을 보여주었다. 특히 라 보렘에서 ‘내 이름은 미미’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한한 감동을 주는 대표적 아리아였다. 그는 담로슈(Damrosch), 허버트(Herbert), 하들리(Hadley)와 같은 미국 작곡가들의 오페라 초연에 출연하여 주인공들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창조했다. 또한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라디오 방송의 오페라 프로그램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1910년 그는 메트로의 총감독인 유명한 줄리오 가티-카자짜(Giulio Gatti-Casazza)와 결혼하였으나 1928년 이혼하였다. 1937년 출판된 자서전 ‘남자들, 여자들, 그리고 테너들’에는 그의 화려한 오페라의 세계와 인생, 그리고 노래 부르는 기교에 대하여 자세히 적혀있다. 그는 1952년 향년 73세로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질다(리골레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