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미국의 대표적 콜로라투라 Gail Robinson (게일 로빈슨)

정준극 2008. 2. 27. 09:54
 

▒ 미국의 대표적 콜로라투라 Gail Robinson (게일 로빈슨)


테네씨주 출신의 게일 로빈슨은 메트로폴리탄에서 35년을 활동하면서 질다(리골레토), 파미나, 로지나, 오스카, 노리나, 루치아, 콘스타체 등으로 이름을 떨쳤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이다. 게일의 첫 성공은 디트로이트에서였다. 로베르타 피터스(Roberta Peters)의 제자였던 그는 메트로의 일원으로 디트로이트에서 루치아를 공연하게 되었다. 잘 아는대로 루치아의 ‘광란의 장면’은 20여분이나 계속되는 아리아로서 끝부분은 E플랫으로 마무리하게 되어있다. 루치아의 역할은 원래 로베르타가 맡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아프게 되는 바람에 게일이 대신 맡았던 것이다. 단 하루전에 루치아를 맡으라는 통보를 받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신데렐라 스토리가 전개되었다. 그날 밤, 상대역은 플라치도 도밍고였다. 당시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지(Free Press)는 제1면에 게일의 사진을 크게 싣고 A Star is Born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마침 쥬디 갈란드 주연의 ‘스타의 탄생’(A Star is Born)이란 할리우드 영화가 히트를 하고 있던 때였다. 게일에게 장래 남편이 될 헨노 로마이어(Henno Lohmeyer)를 소개해준 사람도 도밍고였다. 로마이어는 독일 TV 프로듀서로서 1시간반짜지 오페라 특집을 만들고 있었다. 게일은 도밍고의 주선으로 이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 두 사람은 결혼하여 독일에서 5년을 살았다. 두 번째 아이가 태어나자 로마이어는 아이들을 미국에서 교육시키기로 결심하여 코네티커트에 정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미국이민 이유는 게일의 메트로 활동을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게일은 메트로와의 인연을 계속할수 있었다.

 

 

 헨젤(헨젤과 그레텔)

 

테네씨주 잭슨 마을 토박이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말을 더듬는 습관이 있다. 토박이들은 말더듬 증세를 버리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말대로 쉽게 해결하지는 못했다. 이들은 특히 m, n 또는 s로 시작하는 단어에서 머뭇거리며 말을 더듬기가 일수였다. 게일도 처음에는 그런 습관이 무척 심했다. 그러나 그는 아리아와 가곡의 딕션을 통해서 그 습관을 상당히 고쳤다. 하지만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에는 혹시 그런 증상이 자기도 모르게 나타나지 않을까 해서 걱정이 많았다. 그건 그렇고, 게일은 19세 때부터 류마티즘 관절염이 있었다. 게일은 결국 관절염 때문에 무대에 서는 것을 포기했어야 했다. 많은 움직임이 요구되고 힘을 다하여 노래를 불러야 하는 오페라 무대에서 관절염은 치명적이었다. 어느때 게일은 ‘헨젤과 그레텔’을 공연한 일이 있다. 그레텔은 마귀할멈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집안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했고 높은 데서 뛰어내려야 하는가 하면 테이블 밑을 기어 다니기도 해야 했다. 관절염이 있는 게일로서는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객석에 앉아 있는 두 아들을 위해서 열심히 뛰고 돌아다녔다. 두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게일은 모처럼 이 아이들에게 엄마의 오페라를 보여주기 위해 데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 힘들었던 게일은 ‘헨젤과 그레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귀할멈을 아궁이에 밀어 넣는 일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일은 ‘만일 어느날 하나님이 나에게 너무 많이 준것 같으니 도로 가져가야겠다고 하시면서 말더듬이와 관절염 중에 하나를 가져가시겠다고 하면 나는 말더듬이를 가져가시라고 말할 겁니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남에게 설득력 있게 표현할수 있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로베르타 피터스는 게일의 성악적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차렸다. 그러나 오페라에 대하여는 공부한 것이 없었다. 사실, 게일은 처음에 피아노를 공부했다. 그러다가 멤피스대학교에서 그예 성악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그리고 ‘여자는 다 그래’에 캐스팅되었다. 로베르타는 게일을 메트로경연대회에 나가도록 권했다. 게일은 우승을 차지했다. 게일은 생전 처음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떠났다. 그리고 메트로의 디트로이트 공연에서 스승인 로베르타를 대신하여 대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는 메트로 은퇴후 현재는 켄터키대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하는데 온갖 힘을 다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