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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바그너 소프라노 Johanna Gadski (요한나 가드스키)

정준극 2008. 2. 27. 14:08
 

▒ 최고의 바그너 소프라노 Johanna Gadski (요한나 가드스키)


독일 출신의 미국 소프라노인 요한나 가드스키(1872-1932)는 바그너의 작품에  당대의 비르기트 닐쓴, 키르스텐 플라그슈타트, 올리브 프렘슈타드, 릴리 레만, 마가레테 마체나우어(Margarete Matzenauer)보다 더 많이 출연한 것으로 유명하다. 1872년 독일의 안클람(Anklam)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가드스키는 일곱 살때부터 유명한 안나 슈뢰더-챨룹카(Anna Schröder-Chaloupka)에게서 성악 레슨을 받았으며 16세 때에는 베를린의 크롤(Kroll)오페라단의 전속 멤버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 오페라단에 스카웃된것은 ‘마적’에 나오는 3명의 소년중 한 사람을 맡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리허설을 하는중 음악감독이 가드스키의 재능을 발견하고 당장 파미나(Pamina)를 시켰다. 파미나가 대성공을 거두자 음악감독은 그에게 로르칭(Lortzing)의 운디네(Undine)에서 타이틀 롤이 맡겼다. 그후 4년동안 가드스키는 베를린에서뿐만 아니라 브레멘, 프랑크푸르트, 마인츠 등에서 파우스트의 마르게리트, 예언자의 베르테(Berthe), 케루비노로부터 돈나 엘비라에 이르기까지 모차르트의 여러 역할, 마르슈너와 로르칭의 코믹 오페라, 그리고 달베르(d'Albert)의 첫 오페라인 Der Rubin에서 여주인공인 베두라(Bedura)를 작곡자 자신의 지휘아래 출연하였다. 베를린의 유명한 평론가 오토 레쓰만(Otto Lessmann)은 가드스키가 ‘한스 하일링’(Hans Heiling)에서 안나(Anna)를 맡은데 대하여 ‘젊고 신선하며 명랑하고 활발한 그의 존재는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그보다도 그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완숙한 음성을 들려주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그때 가드스키는 19세였다.

 


1894년, 발터 담로슈(Walter Damrosch)라는 흥행가가 미국순회공연을 떠날 오페라단을 구성하고 가드스키를 초청하였다. 가드스키가 21세때였다. 당시 이 오페라단에는 당대의 내노라하는 바그너 성악가들이 여러명이나 합류하고 있었다. 에밀 피셔(Emil Fischer), 로사 주허(Rosa Sucher), 마리 브레마(Marie Brema), 카테리네 클라프스키(Katherine Klafsky), 막스 알바리(Max Alvary)등이었다. 이런 쟁쟁한 성악가들 틈에서 가드스키는 최연소 소프라노로서 최고의 주역을 맡았다. 첫 뉴욕 공연은 1985년 3월 1일이었다. 가드스키는 로엔그린에서 엘자를 맡았다. 가드스키의 엘자는 당시 뉴욕의 오페라 팬들이나 평론가들에게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당시 미국의 오페라 팬들은 유럽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은 긴 이력서의 성악가들을 선호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음성이 우렁차게 하늘을 찌를듯 높이 올라가면 무조건 박수를 보냈다. 신세계 미국으로서 전통의 유럽 아티스트들의 공연은 일종의 문화적 열등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가드스키는 경력도 화려하지 않았고 소리도 강하거나 크지가 않았다. 오히려 여리고 가벼웠다. 뉴욕 타임스는 가드스키에 대하여 ‘참고 들어줄만 하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그리고 ‘깊은 인상을 줄것 같지는 않은 보통의 성악가’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오페라의 황금시기’(The Golden Age of Opera)라는 책을 쓴 로버트 터글은 가드스키에 대하여 ‘당대의 당당한 바그너 성악가들보다 더 많이 바그너에 출연한 뛰어난 소프라노’라면서 찬사를 보냈다.


그는 그후 몇 년동안 맘로슈오페라단과 함께 미국의 각지를 순회하며 가벼운 바그너 역할, 카르멘의 미카엘라, 휘델리오의 마르첼리나, 그리고 담로슈 자신이 작곡한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의 초연에서 헤스터 프린(Hester Prynne)을 맡아하였다. 1899년은 가드스키의 경력에 일대 전환점이 된 해였다. 그 한해 동안에 그는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엘리자베트(탄호이저), 바이로이트에서 에바(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부르는 대활동을 했으며 게다가 메트로의 상임 멤버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가드스키는 메트로에 있으면서 자기의 가벼운 바그너 역할에 무거운 역할을 첨가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브륀힐데와 이졸데였다. 물론 계속 가벼운 바그너 역할을 불렀으며 이밖에도 아이다, 레오노라(일 트로바토레), 아멜리아(가면무도회)와 같은 이탈리아 역할도 맡아하였다. 가드스키의 레퍼토리는 대단히 폭이 넓고 종류가 많았다. 그는 대중들이 어떤 작품을 어떤 형태로 원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로서 당시 릴리안 노르디카, 올리브 프렘슈타드, 에미 데스틴과 같은 쟁쟁한 소프라노들과 당당히 경쟁할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메트로의 책임자들은 모두 가드스키를 좋아하였다. 가드스키의 공연은 언제나 초만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드스키는 급여문제로 메트로측과 의견이 맞지 않아 1904년 메트로를 떠났다가 3년후인 1907년 급여문제가 해결되어 돌아왔다. 그 3년동안 가드스키는 미국 전역과 캐나다에서 순회 리사이틀을 가져 열화와 같은 갈채를 받았으며 한편코벤트 가든, 쾰른, 뮌헨, 잘츠부르크에서오페라에도 출연하였다. 메트로로서는 보물과 같은 가드스키를 다른 무대에 뺏기는 것같은 생각이 들어 가드스키의 급여조정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한편, 가드스키는 메트로를 잠시 떠나 있었던 그 기간에 바바리아 왕국으로부터 ‘루드비히대왕예술과학훈장’을 받기까지 했다. 


가드스키는 1차 대전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았다. 남편 한스 타우셔(Hans Tauscher)는 프러시아제국 군대의 예비역 장교로서 미국에서 총포상을 하고 있었다. 전쟁이 터진후 미국주재 독일 대사관은 간첩단을 이용하여 캐나다의 웰란드(Welland)운하를 폭파할 계획을 세운 일이 있었고 이때 가드스키의 남편 타우셔는 아무것도 모른채 무기와 폭탄을 지원했었다. 일이 더 악화되느라고 남편이 체포될 때 가드스키가 잔뜩 화가 나서 ‘미국은 독일의 적국이다. 미국 군수품 공장을 폭파해 버리고 싶다’고 소리쳤다. 나중에 남편은 혐의가 없어서 석방되었지만 가드스키의 친독반미 발언은 신문에 보도되어 상처를 받았다. 1917년 미국이 1차 대전에 참전하자 메트로는 독일 오페라의 공연을 중지했고 독일 성악가의 출연을 금지했다. 메트로에서 가드스키의 영광스런 오랜 경력은 영광스럽지 못하게 끝을 맺었다. 가드스키는 심지어 연주회 활동도 제약을 받았다. 그러다가 금족령이 해제된 것은 전쟁이 끝나고도 한참후인 1921년이었다.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의 리사이틀이었다. 음악전문지 ‘뮤지컬 아메리카’는 ‘세상을 떠난 카루소가 다시 살아서 무대에 섰다고 해도 이만한 열광적인 갈채는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라고 썼다. 그후 몇 년동안 가드스키는 미국의 곳곳과 캐나다를 방문하여 리사이틀을 가졌으며 그때마다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1929년 가드스키에게는 또 다시 오페라 무대의 기회가 주어졌다. 뉴욕의 어떤 돈 많은 친구가 ‘독일 그랜드 오페라단’을 창단하고 가드스키를 간판스타로서 초청했기 때문이다. 가드스키는 브륀힐데를 주로 불렀으며 간혹 이졸데와 젠타(방랑하는 화란인)를 불러 감동을 주었다. 그의 가벼우면서도 강렬한 소리는 모든 사람에게 뜨거운 감동을 주었다. 당시 이 새로운 독일 오페라단에는 요한네스 젬바흐, 마르가레테 보이머, 오틸리에 메츠거등 쟁쟁한 성악가들이 합류하고 있었다. 이 오페라단은 뉴욕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세차례나 순회공연을 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가드스키는 비록 나이가 60을 넘었지만 네 번째 순회공연에 꼭 참여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네 번째 순회공연이 출범하기 직전인 1932년, 베를린을 방문했다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파란만장의 가드스키의 최후가 베를린의 길거리일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가드스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메트로를 비롯한 미국내 주요 오페라 극장들은 빈소를 차려놓고 조문객들을 맞이하였다. 베를린에서의 가드스키 장례식에서는 지휘자 겸 작곡자인 막스 폰 쉴링스(Max von Schillings)가 눈물을 뿌리며 조사를 했다.


당대의 드라마틱 소프라노로서 가드스키는 다행이 여러 음반을 남겨놓았다. 레코드가 처음 나오기 시작하던 시기였으므로 녹음 상태가 좋을 리가 없어서 최근 모두 CD로 옮겨졌다. 어떤 아리아에서는 고음이 잘 들리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에는 가드스키의 음성이 취약해서인지 그렇지 않으면 녹음 기술에 문제가 있어서인지 알지 몰랐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가드스키는 강렬한 고음을 내야하는 대목에서 일부러 자제하여 피아니시모로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고음을 계속 내면 녹음 시설의 왁스가 터져 버리기 때문에 자제했다는 것이다.

 

 

 젠타(방랑하는 화란인)                                 이졸데(트리스탄과 이졸데)

 

 

 브륀힐데(라인의 황금)                                 엘자(로엔그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