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노르웨이의 발키리 Kirsten Flagstad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

정준극 2008. 2. 27. 14:36

노르웨이의 발키리 Kirsten Flagstad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


노르웨이의 키르스텐 말프리드 플라그스타드(Kirsten Malfrid Flagstad)는 금세기 최고의 바그너 소프라노이다. 독일의 영웅적 소프라노라고도 하는 바그너 소프라노는 대단한 체력과 폐활량과 기교를 필요로 하는 소프라노의 마라톤이며 아마존이다. 우리가 보통 오페라 여주인공으로 생각하는 뿔달린 투구를 쓰로 창과 방패를 든 여걸들이 바로 바그너 소프라노이다. 금세기 최고의 바그너 소프라노로서는 스웨덴의 비르기트 닐슨과 노르웨이의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를 꼽는다. 두 사람 모두 독일 출신이 아니란 것이 흥미롭다. 그는 메트로에서 ‘바그너 황금시대’를 새로 일으킨 주인공이었다.


브륀힐데의 키르스틴 플라그스타드


플라그스타드는 노르웨이의 남부 하마르(Hamar)라는 곳의 음악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미하엘(Michael)은 지휘자였으며 어머니 마리(Marie)는 성악 코치 겸 피아니스트였다. 그러므로 플라그스타드가 음악의 길로 들어선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플라그스타드는 어릴때부터 오슬로에 가서 음악교육을 받았다. 그의 첫 오페라 출연은 1913년, 18세 되던해에 달베르(d'Albert)의 티프랜드(아랫마을)에서 누리(Nuri)역을 맡은 것이었다. 스톡홀름에서 공부를 계속한 플라그스타드는1928년부터 1932년까지 스웨덴의 요테보리(Göteborg) 극장에 전속되어 활동했다. 요테보리에서는 주로 오페레타에 출연하였다. 그러다가 더 신중한 역할을 해보려는 생각이 들었다. 바그너의 오페라는 플라그스타드가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분야였다. 1932년 플라그스타드는 처음으로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이졸데 역을 맡았고 이로서 자기의 진정한 위치를 찾게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이어 노르웨이 성악가인 엘라 굴브라손(Ella Gulbrason)이 바이로이트 음악제를 주관하고 있는 빈프레드 바그너(Winfred Wagner)에게 요청하여 플라그스타드를 바이로이트 경연대회에서 오디션을 볼수 있도록 해주었다. 플라그스타드는 발퀴레에서 지그린데(Sieglinde)를 맡아 자기의 진가를 보여주었다. 바이로이트는 금세기에 단 하나뿐인 새로운 바그너 소프라노라가 탄생하였다고 하면서 흥분에 휩싸였다.


'신들의 황혼'에서 브륀힐데를 맡은 키르스틴 플라그스타드


1934년 플라그스타드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메트로 오디션에 참가하였다. 메트로는 전설적 바그너 소프라노인 프리다 라이더(Frida Leider)의 후계자를 찾고 있었다. 오디션에 당당히 합격한 플라그스타드는 이듬해에 지그린데로서 역사적인 메트로 데뷔를 했다. 이 공연은 전국에 방송되었고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4일후 플라그스타드는 이졸데를 불렀고 다시 며칠후에는 처음으로 발퀴레와 ‘신들의 황혼’에서 브륀힐데(Brühnhilde)를 공연했다. 사람들은 지칠줄 모르는 플라그스타드의 힘과 소리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해 마지막 시즌에 플라그스타드는 '로엔그린'의 엘자, '탄호이저'의 엘리자베스, '파르지팔'의 쿤드리를 맡아 노래하였다. 사람들은 신이 주신 최대의 능력이라고 하면서 감탄의 찬사를 보냈다. 플라그스타드는 이제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바그너 소프라노의 1인자로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키르스텐이 2차대전 이전에 메트로에서 바그너가 아닌 작품을 출연한 것은 베토벤의 '휘델리오'가 유일하다. 1936년, 플라그스타드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 바그너의 링 사이클에 나오는 브륀힐데 역을 모두 공연했으며 다음 해에는 시카고 리릭 오페라에서 같은 레퍼토리에 출연하여 무대를 압도했다. 이어서 플라그스타드는 영국의 로열 오페라와 코벤트 가든에 진군하여 이졸데, 브륀힐데, 젠타(방랑하는 화란인)을 불러 만장의 관중들을 열광케 하였다. 명지휘자 토마스 비첨, 프리츠 라이너,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는 모두 플라그스타드와 공연하고 나서 그의 위대한 음악적 능력에 감탄했다.


'휘델리오'에서 레오노레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플라그스타드는 노르웨이에 남아있던 남편과 합류하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가서 전쟁이 끝날때까지 노르웨이에 머물렀다. 전쟁중 플라그스타드는 노르웨이를 점령한 나치를 위해 어떠한 활동도 하지 않았다. 바그너를 특히 좋아했던 나치는 플라그스타드에게 나치 집회에서 바그너를 불러 주도록 요청하였으나 그는 단 한번도 그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나치로서도 이 세계적인 바그너 소프라노를 마음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플라그슈타드였으나 남편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자 남편은 나치에 협력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나치에게 전쟁 물자를 팔아왔다는 죄목이었다. 남편은 늙고 병들어서 체포된지 얼마후에 세상을 떠났다. 대신 남편의 소유하고 있던 재산은 모두 국가에 환수되었다. 플라그스타드가 나치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미국을 떠나 노르웨이에 왔던 것을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 특히 미국에서 그러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후에도 당분가 플라그스타드는 메트로의 무대에 다시 서지 못했다. 그러다가 루돌프 빙이 메트로의 음악 총감독으로 되고 나서부터 메트로의 무대를 다시 밟게 되었다. 키르스텐은 이졸데, 브륀힐데, 그리고 휘델리오에 이르기까지 독일 오페라의 진수를 미국시민에게 다시한번 보여주었다. 


오슬로에 있는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 기념상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의 메트로 고별 공연은 1952년 4월 1일 이었다. 플라그스타드는 글룩의 '알체스테'(Alceste)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했다. 실제로 그의 마지막 오페라 무대는 1953년 런던 머메이드 극장(Mermaid Theater)에서 헨리 퍼셀의 ‘디도와 이니아스’에서 디도역을 맡은 것이었다. 플라그스타드는 비록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하였지만 콘서트와 음반 취입은 계속하였고 노르웨이에 정착하여 노르웨이국립오페라 총감독을 맡는등 활발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의 수많은 레코드 취입중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은 푸르트뱅글러와 함께 취입하였던 ‘트리스탄과 이졸데’였다. 플라그스타드는 바그너 오페라를 가장 탁월하게 해석한 바그너 소프라노로 기억되고 있다.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의 모습을 넣은 노르웨이의 100 크로너 지


노르웨이 국민들의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에 대한 애정과 존경은 각별하다. 이는 스웨덴에서 비르기트 닐슨(Birgit Nilsson)을 국가적 인물로 존경하고 있는 것보다 한층 더하다. 예를 들어 노르웨이의 100크로네짜리 지폐에는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의 초상화가 담겨져 있다. 성악가로서 국가의 지폐에 초상화가 담겨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호주의 넬리 멜바, 스웨덴의 제니 린드가 지폐를 장식하였을 뿐이었다. 플라그스타드의 출생지인 하마르에는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 기념박물관’이 있다. 개인 성악가 박물관으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전시관이다. 특히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가 링 사이클에서 입었던 의상은 역사적인 귀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실제로 그가 입었던 브륀힐데 의상은 그후 브륀힐데 역을 맡는 모든 소프라노들의 모델 의상이 되었다.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는 1962년 12월 7일 오슬로에서 세상을 떠났다.

 

노르웨이의 저가항공사인 Norwegian은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를 기념하여 비행기의 심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