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우아한 아름다움 Kiri Te Kanawa (키리 테 카나와)

정준극 2008. 2. 27. 14:35
 

▒ 우아한 아름다움 Kiri Te Kanawa (키리 테 카나와)


키리 테 카나와는 그 특이한 이름이 말해주듯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족 출신이다. 엄밀히 말하면 어머니는 프랑스인이었지만 아버지가 마오리족이었다. 테 카나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힘들고 괴로운 형편에서 자라났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티스트이며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Dame이라는 귀족 칭호를 받은 유명인사가 되었다. 테 카나와는 탁월한 미성과 뛰어난 미모를 겸비한 소프라노이다. 그러한 미모와 미성때문에 ‘피가로의 결혼’에서 백작부인, ‘장미의 기사’에서 마샬린은 도저히 다른 사람들이 따라올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또한 아라벨라는 테 카나와 이외의 다른 사람은 생각할수 없으며 ‘여자는 다 그래’에서의 데스데모나역도 더 이상 완벽할수 없다는 평을 받고 있다.


테 카나와는 1944년 3월 6일 뉴질랜드 북섬의 기스본(Gisborne)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오리족이었고 어머니는 프랑스인이었다. 이들은 합법적인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무척이나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던 이들에게는 이미 아들 하나가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테 카나와가 태어나자 도저히 기르기 힘들다고 생각하여 다른 집에 양녀로 보내어 제대로 살게 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어린 키리는 태어난지 몇 달후 기스본에 있는 테 카나와(Te Kanawa)씨 부부의 양녀로 입양되었다. 키리가 양녀로 들어간 집도 아버지가 마오리 원주민이었고 어머니는 프랑스인이었다. 이들은 합법적인 부부였다. 프랑스인 양어머니는 테 카나와와 재혼하였으며 이미 전 남편과의 사이에 딸이 둘이나 있었다. 그러므로 키리는 입양되어 들어간 집에서 막내였다. 이들 자매는 자라면서 참으로 다정하게 지냈다. 양어머니는 유명한 오페라 작곡가 아더 설리반과 먼 친척이 되는 사람으로서 음악을 좋아하였기에 어린 테 카나와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다. 어머니는 어린 키리에게 특별한 음악적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고 테 카나와에게 음악 교육을 집중적으로 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어머니는 테 카나와의 재능을 잃고 싶지 않아서 테 카나와가 12살 때 기스본을 떠나 대도시인 오크랜드로 이사갔다. 테 카나와가 훌륭한 선생님으로부터 성악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위대한 예술가의 뒤에는 위대한 어머니의 보살핌이 있었다. 테 카나와는 20세가 되기도 전에 이미 뉴질랜드에서 소프라노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뉴질랜드는 세계의 무대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테 카나와가 본격적으로 성악을 공부할수 있도록 테 카나와가 22세의 아름다운 여인일때에 런던오페라센터로 보냈다. 입학시험이 엄격한 곳이었으나 테 카나와는 오디션 없이 입학을 허락받았다. 그로부터 테 카나와는 영국에서 살게 되고 Dame 이라는 귀족 칭호까지 받지만 시민권만은 아직까지 뉴질랜드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테 카나와가 27세 때인 1971년은 그를 세상에 한껏 알린 해였다. 무명의 테 카나와는 ‘피가로의 결혼’에서 백작부인을 맡아 그야말로 화려한 데뷔를 하였다. 백작부인으로서의 키리는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역사상 최적의 백작부인이라는 평을 들었다. 아름다운 음성과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순식간에 각인되었다. 그리하여 테 카나와는 하루밤 사이에 런던 오페라계의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 출연한 들리브의 Le Roi l'a dit, 볼프-페라리의 ‘호기심 많은 여인’등에서는 특별한 눈길을 끌지 못했다. 그러다가 또 다시 대단한 호평을 받게 된것은 모차르트의 이도메네오 중에서 이다만테역을 맡았던 공연이었다. 테 카나와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작품은 보리스 고두노프에서의 크세니아(Xenia)역이라고도 할수 있지만 그보다고도 ‘장미의 기사’에서 마샬린역과 역시 ‘피가로의 결혼’에서의 백작부인역을 맡아서였다.

몇 년후 메트로폴리탄에서의 데뷔는 뜻밖의 행운이었다. 마침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테 카나와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메트로의 제작자로부터 오텔로의 데스데모나의 역할을 맡아 달라는 급한 제안이 들어왔다. 개막을 불과 몇시간 앞둔 때였다.데스데모나역을 맡은 테레사 스트라타스(Teresa Stratas)가 갑자기 사정이 생겨 도저히 출연할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테 카나와는 영국에서 데스데모나 역을 맡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별도로 리허설이 필요한 입장은 아니었다. 키리는 즉각 분장을 하고 출연하였다. 대단한 성공이었다. 신문마다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축하하는 논평으로 지면을 뒤 덮었다. 테 카나와는 드디어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가장 촉망받는 오페라 아티스트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키리의 명성이 피크를 이룬것은 1981년이었다. 테 카나와는 런던의 성 바울성당에서 거행된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스펜서의 결혼식에서 헨델의 오라토리오 ‘삼손’에 나오는 Let the Bright Seraphim(빛나는 천사의 노래)을 축가로 불렀다. 트럼펫 솔로와 오르간 반주의 장엄하고 빛나는 곡이다. 사람들은 테 카나와의 노래를 천사의 노래와 같았다고 말했다. 테 카나와의 황태자 결혼축가는 전세계에 TV로 중계되었다. 테 카나와의 노래에 감격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듬해 테 카나와에게 대영제국의 Dame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뉴질랜드의 한적한 시골에서 태어나 가난했기에 돌도 지나기 전에 남의 집에 양녀로 들어가야 했던 키리 테 카나와! 아버지가 원주민인 마오리 족이어서 보이지 않는 편견을 받아야 했던 그는 이제 전세계에 찬란히 빛나는 노래의 천사가 되었다.


테 카나와는 영국의 런던오페라센터에 입학한 다음해에 친구의 소개로 데스몬드 박(Desmond Park)이라는 청년을 만나 6개월후에 뉴질랜드의 오크랜드에서 결혼했다. 데스몬드는 광산 기술자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광산 일을 때려 치고 테 카나와의 매니저로서 충성 봉사키로 다짐했다. 데스몬드는 원래 호주 출신이다. 영국에서 1년쯤 일하려고 런던에 왔던 터에 우연히 테 카나와와 데이트를 하게 되어 결혼까지 성공한 것이다. 사실 데스몬드는 미국 일리노이에 상당히 좋은 일자리가 확정되어서 런던에서 지내다가 곧 미국으로 가야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테 카나와와 결혼하는 바람에 모든 것을 포기했다. 테 카나와 부부에게는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 대신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입양하였다. 안토니아와 토마스였다. 토마스는 테 카나와의 양아버지 이름이었다. 남편 데스몬드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일은 그가 음악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비록 100% 테 카나와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지만 오페라가 뭐하는 것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이었다. 테 카나와가 공연할 때에는 언제나 무대 뒤의 분장실에서 차를 마시면서 책을 읽던지 신문이나 뒤적이면서 기다렸으며 단 한번도 객석에서 테 카나와의 공연을 감상한 일이 없다. 이들은 결혼생활 30년만인 1997년 이혼하였다.


1994년 3월 10일, 키리 테 카나와는 로열 알버트 홀에서 50회 생일 기념 음악회를 가졌다. 연주회의 타이틀은 단순히 Kiri였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연주회였다. 연주회가 끝났지만 관객들은 자리를 뜰줄 몰랐다. 2005년으로 환갑을 마지한 테 카나와는 런던에서 사회봉사 활동을 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

 

 

 

 

                                                                       미미 

   

  아라벨라                                                   장미의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