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하나의 칼라스 Maria Cebotari (마리아 체보타리)
1910년 당시 러시아-베싸라비아에 속했던 몰다비아의 치시뉴(Chisineu)라는 마을에서 평범한 노동자 가정의 12자녀중 다섯째로 태어난 마리아 체보타리(원래 이름은 Cebotaru)는 마리아 칼라스의 전임자라고 할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과 열정을 가진 아티스트였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4살 때 성당에서 노래부를 때부터 발견되었다. 마리아는 정말로 노래를 잘 불렀다. 마리아는 해가 지날수록 노래를 잘 불렀고 점점 예뻐졌다. 어느날, 모스크바에서 유랑극단이 마을을 찾아왔다. 마침 이 극단은 러시아어로 노래를 부를수 있는 젊은 아가씨를 급히 찾고 있었다. 그때쯤해서 마리아는 이미 뛰어난 노래솜씨로 잘 알려져 있었고 더구나 뛰어난 미모였다. 극단장은 배우인 러시아의 알렉산더 비루보프(Alexander Virubov)백작이었다. 백작은 당장에 마리아와 사랑에 빠졌다. 백작은 파리로 갈 계획이었고 마리아는 그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파리에서 결혼하였다. 얼마후 백작은 공연을 위해 마리아와 함께 베를린으로 가게 되었다.
베를린에서 어느날 당대의 음악교사인 오스카 다니엘(Oscar Daniel)이 마리아의 노래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오스카 다니엘은 마리아에게 석달 동안의 개인지도를 해 주었다. 드레스덴오페라의 프릿츠 부슈(Fritz Busch)가 마리아의 노래를 듣고 그 자리에서 드레스덴오페라에 3년간의 계약을 맺었다. 얼마후 거장 브루노 발터(Bruno Walter)가 마리아의 노래를 듣고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 초청하였다. 그때 마리아는 겨우 21세였다. 어학에도 재주가 뛰어났던 마리아는 어려서부터 루마니아어와 러시아어를 함께 사용했으며 독일로 온 이후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독일어에도 능숙하게 되었다. 마리아의 첫 오페라 데뷔는 드레스덴에서 미미(라 보엠)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당시로서 현대작품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달베르, 로타르, 헤거, 주터마이스터등의 오페라 초연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한것은 마리아의 재능이었다. 가장 중요한 이미지 창조는 1919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그림자없는 부인’(Die Schweigsame Frau)에서 아민타를 맡은 것이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마리아를 대단히 숭배하였다. 마리아는 1934년, 24세때에 드레스덴오페라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캄머쟁거린(Kammersänerin)에 임명되었다. 전통과 명예의 전당인 드레스덴오페라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캄머쟁거린에 임명된 경우였다. 1935년부터는 베를린오페라에 고정적으로 출연하였으며 가장 재능있는 소프라노로 인정을 받았다.
마리아의 대표적인 역할은 나비부인, 다프네, 미미, 아민타, 안토니다, 카르멘(와~), 살로메(와우~), 투란도트, 맛달레나, 올림피아-안토니아-줄리에타(호프만의 이야기), 가브리엘에(쇠크의 뒤란드성), 수잔나, 체를리나, 조피, 알마비바 백작부인, 타티아나, 비올레타, 콘스탄체, 아라벨라, 유리디체, 돈나 안나 등 끝이없다. 마리아는 수많은 역할을 맡아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스스로 가장 만족해한 여할은 살로메였다. 한편, 해마다 정기적으로 출연한 잘츠부르크에서는 모차르트의 역할로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당시는 나치가 정권을 잡은 히틀러의 치하였다. 마리아는 나치정권에서 대단한 대접을 받는 유명인사였다. 마리아는 여덟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몇편은 베냐미노 질리가 상대역이었다.
1938년 마리아는 비루보프백작과 헤어지고 10년 연상의 영화감독이었던 구스타프 디쓸(Gustav Diessl: 1899-1948)과 결혼하였다. 두 사람사이에는 아들 둘이 태어났다. 1943년, 베를린에 있던 그들의 집은 폭격으로 부서졌다. 집을 잃어 갈곳이 막막했던 마리아는 다행하게도 비에나 슈타츠오퍼와 계약을 맺게 되어 비엔나로 옮겨 살게 되었다. 1947년 마리아는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고트프리드 폰 아이넴(Gottfied von Einem)의 ‘단톤의 죽음’(Dantons Tod)의 초연에서 루실을 맡아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남편 구스타브 디쓸은 두어번 심장마비를 경험했으며 결국 1948년초에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후 마리아는 친구들에게 그가 없는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해왔다. 결국 마리아는 남편을 따라 바로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가 겨우 39세였던 1949년 6월이었다. 마리아의 마지막 오페라 출연은 세상을 떠나기 한달전에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밀뢰커(Millöcker)의 ‘거지학생’(Der Bettelstudent)이었다. 그의 두 아들은 유명한 피아니스트로서 마리아의 친구였던 클리포드 쿠르존(Clifford Curzon)이 양자로 입양했다. 마리아가 세상을 떠난후 드레스덴에서 그가 살던 파르크슈트라쎄는 마리아-체보타리슈트라쎄로 명칭을 바꾸었고 비엔나의 되블링(Dobling) 거리는 체보타리베그(Cebotariweg)로 이름을 바꾸었다.
마리아 체보타리는 대단히 뛰어난 재능의 성악가였다. 체타보리는 간혹 마리아 칼라스의 전임자로 간주되었다. 실제로 두 소프라노는 많은 면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진정한 아티스트로서 전적으로 예술에 전념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대단히 ‘신뢰할수 있는’ 디바였다. 리허설에 빠지는 법이 없었고 공연 약속은 모두 철석같이 지켰다. 두 사람은 무슨 작품이든지 아무리 새로운 것이라도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대단히 빠른 시일안에 마스터하였다. 세계의 유명 지휘자들이 이 두 마리아를 모두 깊이 사랑하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생활, 이것은 마치 영화의 스토리와 같은 것이었다. 열정, 사랑, 이혼, 전문분야에서의 위대한 성공, 그리고 개인적인 비극...모두 공통점이 있다. 베를린에서의 일이었다. 체타보리는 어느날 저녁 카르멘을 부른후 다음날 저녁에는 수잔나(피가로의 결혼)를 맡아 공연하였다. 비엔나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루 저녁에는 미미를 부르고 그 다음날 저녁에는 살로메를 불렀다. 아마도 이러한 놀라운 재능의 오페라 아티스트는 찾아보기 힘들것이다. 체타보리의 음악인생에 있어서 깊은 영향을 준 네 사람이 있다. 모차르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베르디, 푸치니였다. 체타보리는 이들의 작품을 공연하면서 예술과 인생을 공연하였다.
조피(장미의 기사)
투란도트 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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