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프리마 디바 Maria Callas (마리아 칼라스)

정준극 2008. 2. 27. 15:32
▒ 프리마 디바 Maria Callas (마리아 칼라스)


마리아 칼라스를 세계 최고의 소프라노라고 인정하는 데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마리아 칼라스의 음성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있다. 다시 말하여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에 매력을 느끼면 헤어날수가 없다. 마리아 칼라스는 1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하는 특별한 소프라노이다. 이와 함께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그의 성공과 좌절, 사랑과 비애는 마리아 칼라스에 대한 경외와 연민의 정을 솟구치게 해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과연 어떤 인물인가? 우선 마리아 칼라스는 예명이다. 원래 이름은 세실리아 소피아 안나 마리아 칼로게로풀로스(Cecilia Sophia Anna Maria Kalogeropoulos)이다. 그리스 출신이지만 미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1923년 고향 그리스를 떠나 미국으로 이민온 게오르게 칼로게로풀로스(George Kalogeropoulos)였고 어머니는 에반젤리나 디미트리아디스(Evangelina Dimitriadis)였다. 마리아 칼라스는 아버지, 어머니가 미국으로 온지 넉달만에 뉴욕의 그리스타운에서 태어났다. 14년후, 어머니는 미국에서의 생활에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아버지와 헤어져 고향 그리스로 돌아갔다. 14세였던 마리아 칼라스도 어머니를 따라 그리스로 갔다. 노래에 재능을 보인 마리아 칼라스는 곧이어 아테네의 국립음악원에서 유명한 성악가인 엘비라 데 히달고(Elvira de Hidalgo)로부터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받았다.

 

 비올레타

 

3년후인 1940년, 칼라스는 생애 첫 번째의 오페라 무대 데뷔를 했다. 아테네의 국립리릭극장(National Lyric Theater)에서 폰 주페(von Suppe)의 보카치오(Boccaccio)에 주역으로 출연한 것이다. 칼라스가 불과 17세 때였다. 그러나 정작 칼라스의 첫 성공은 2년후였다. 칼라스는 아테네오페라극장으로부터 토스카 역을 맡아 달라는 청탁을 받았고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스타의 탄생이라면서 갈채를 보냈다. 이어 그는 휘델리오, 티프란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 출연하여 경력을 쌓아갔다. 그러나 그리스에서의 활동만으로는 만족할수 없었다. 오페라 아티스트로 당당하게 출발한 칼라스는 좀더 성공적인 경력을 쌓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몇군에 오페라단에서 오디션을 보았지만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총감독 에드워드 존슨(Edward Johnson)의 오디션에 발탁되었다. 칼라스의 노래를 들어본 존슨은 그 자리에서 메트로폴리탄이 1946/7년 시즌에 공연할 두편의 오페라의 주역을 맡아 달라고 제안했다. 휘델리오와 나비부인이었다. 그러나 칼라스는 놀랍게도 이 제안을 거절했다. 우선 위대한 베토벤의 작품인 휘델리오를 원어인 독일어로 부른다면 몰라도 영어로 부를수는 없다는 주장이었고 나비부인역을 거절한 이유는 자기의 체구가 연약하고 어린 여성의 역할을 맡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얘기는 단순히 지어낸 것일수도 있다. 왜냐면 메트로폴리탄은 나중에 칼라스의 오디션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다는 기록을 제시하고 그런 제안을 한일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의 데뷔가 생각보다 어려웠던 칼라스는 베로나에서 출연교섭을 받자 이탈리아로 눈을 돌렸다. 베로나는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에 칼라스를 초청하였다. 베로나에서의 오페라 출연후, 칼라스는 베니스 순회공연에 참가했다. 1948/49년 시즌에 바그너의 발퀴레에서 브륀힐데 역을 맡아했던 것이다. 마침 1주일 후에 산 카를로에서는 유명한 소프라노 마르게리타 카로시오(Margherita Carosio)가 주역으로 나오는 벨리니의 청교도가 예정되어 있었다. 산 카를로극장에는 청교도 의 선전 휘장이 크게 내걸렸고 발퀴레 공연에 대하여는 조그만 안내문 하나만 붙여 있었다. 사람들은 벌써부터 카로시오의 공연을 보기위해 표를 구하느라고 난리였다. 아무튼 그날도 칼라스는 발퀴레에 출연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브륀힐데의 ‘호-요-토-호...헤이아하...’라고 계속 소리질러야하는 아리아에 내심 피곤해 있던 칼라스는 무대 뒤에서 막을 오르기를 기다리면서 청교도의 악보를 보며 주인공 엘비라의 아리아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마침 지휘자 툴리오 세라핀(Tullio Serafin)의 부인이 이 모습을 유심히 보고 ‘누군데 발퀴레 공연을 앞두고 청교도 악보를 공부하고 있을까?’라면서 궁금해 했다. 무언가 큰 가능성이 엿보이는 키가 크고 마스크가 뚜렷한 여자였다. 세라핀 부인은 곧 남편을 불러 칼라스의 노래를 한번 들어보라고 권했다. 칼라스는 존경하는 지휘자 세라핀 앞에서 별다른 생각없이 엘비라의 아리아를 불렀다. 칼라스는 청교도의 엘비라를 맡은 카로시오가 몸이 아파 출연할수 없어서 급하게 대역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칼라스는 산 카를로 극장의 음악 총감독 앞에서 테스트를 받았다. 음악 총감독은 칼라스가 엘비라로 최적이라고 판정했다. 청교도 개막은 1주일 여유밖에 없었다. 그 1주일 동안 칼라스는 세 번의 발퀴레 공연을 해야 했고 그런 중에도 청교도의 스코어를 완전히 마스터해야 했다.

 


1949년, 칼라스가 26세 때에 출연한 청교도는 대성공이었다. 다음날 아침, 칼라스는 이탈리아 오페라계에서 단연 화제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물론 청교도 공연중에 한두군데 실수도 있었다. 특히 가사에서 실수를 했다. son vergin vezzosa(나는 매력적인 아가씨)라고 해야 하는 것을 son vergin viziosa(나는 타락한 아가씨)라고 불렀던 것은 두고두고 화제가 된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칼라스의 형용할수 없는 매력적인 음성에 갈채를 보내지 않을수 없었다. 그로부터 석달후 칼라스는 30년 연상의 죠반니 바티스타(Giovanni Battista)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베로나에서 있었다. 베니스에서의 엘비라역으로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유명인이 되었지만 밀라노의 라 스칼라로부터는 아무런 출연 교섭이 없었다. 마침 라 스칼라에서는 레나타 테발디(Renata Tebaldi)를 주역으로 하여 아이다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참으로 공교롭게도 테발디가 갑작스런 사정으로 출연하기 어렵게 되었다. 칼라스는 라 스칼라로부터 아이다를 맡아 달라는 교섭을 받았다. 이미 청교도로서 인기를 얻고 있는 칼라스였기에 테너 메네기니와의 공연은 대승리를 거둘 것으로 예상되었다. 드디어 1950년 4월 아이다가 막을 올렸다. 칼라스는 라 스칼라에서의 첫 데뷔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어서 있는 힘을 다했다. 그러나 칼라스는 그저 조용한 박수만 받았을 뿐이었다. 평론들도 미지근한 것이었다. 라 스칼라 극장측도 칼라스에 대하여 별로 큰 기대를 가지지 않는듯한 모습이었다. 라 스칼라와 밀라노의 평론가들이 칼라스에게 손을 들고 항복하기에는 그리 오랜 기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6개월후, 칼라스가 주역을 맡은 베르디의 ‘시실리의 만종’은 그야말로 공전의 대성공이었다. 박수갈채가 그칠 여유가 없었다. 평론가들도 입을 모아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1952년 칼라스는 EMI 레코드의 음악감독 월터 레게(Walter Legger)와 독점취입계약을 맺었다. 며칠후 레게와 그의 부인인 독일 최고의 소프라노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가 마침 베로나 야외극장에서 있은 라 트라비아타 공연을 구경하러 왔다. 사실상 슈바르츠코프는 남편 레게가 신인 칼라스를 너무나도 칭찬하는 바람에 어떻게 노래를 부르기에 그럴까하면서 베로나 야외극장을 찾아간 것이었다. 칼라스는 프리마 돈나인 비올레타였다. 공연이 끝나자 칼라스는 슈바르츠코프로부터 생애 최대의 찬사를 받았다. 슈바르츠코프는 자기는 앞으로 결코 비올레타 를 맡지 않겠다고 발표하였다. 칼라스처럼 비올레타를 완벽하게 해 낼수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 붙였다. 1955년 11월 17일, 이날은 30세가 갓 넘은 칼라스의 이미지를 맹수와 같도록 만든 날이다. 그날 칼라스는 시카고리릭오페라에서 나비부인의 공연을 마치고 분장실에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흥분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객석의 관중들은 그때까지도 자리를 뜨지 않고 앙코르를 외치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시카고 경찰서의 보안관이 칼라스에게 다가와 법원 출두 소환장을 내보였다. 전매니저가 칼라스를 상대로 약속불이행 소송을 일으킨 것이다. 1947년에 맺은 계약에 따르면 아직도 칼라스의 공연과 취입은 전매니저의 법적 소관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칼라스와 전매니저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서로 만나지 않은지가 몇 년이나 지났지만 전매니저는 칼라스의 취입과 공연 수입의 상당액을 받지 못했다고하며 무려 30만불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낸 것이다. 두 사람의 법정 투쟁은 2년이나 끌었다. 결국 칼라스는 전매니저와 화해하고 상당액의 손해배상을 했다. 그로부터 칼라스의 성격은 사람을 좀체로 믿지 못하는 사나운 맹수와 같이 되었다.

 

콘서트에서의 칼라스

 

1956년 칼라스는 고대하던 메트로폴리탄 데뷔를 하였다. 벨리니의 노르마였다. 기막힌 노릇은 공연을 앞두고 타임지가 칼라스의 어머니와의 인터뷰 기사를 낸 것이다. 칼라스는 어머니가 자기의 소녀 시절을 강탈해 갔다고 주장한바 있다. 칼라스가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6년전 멕시코에서였다. 그 이후로 칼라스는 어머니를 절대로 다시 만나지 않겠으며 말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바 있다. 실제로 칼라스는 죽을 때까지 이 다짐을 지켰다. 칼라스의 어머니는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딸 칼라스가 고마움을 모르는 불효자식이라고 주장했다. 이 기사를 읽은 뉴욕 사람들은 칼라스를 차가운 눈초리로 보며 메트로폴리탄의 데뷔 공연에서 박수를 보내지 않았다. 관객들은 오히려 아달지사역을 맡은 진카 밀라노프(Zinka Milanov)에게 더 많은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제3막에 가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관객들은 칼라스의 연기와 노래에 완전히 압도당하였다. 칼라스는 16회의 커튼콜을 받았다. ‘어느 누구도 칼라스처럼 손짓 하나하나에, 눈빛 하나하나에 감정을 쏟아 부어 표현할 사람은 없다. 그의 노래는 인간이 아닌 천상의 소리와 같다’라는 평을 받았다.

 


다음으로 칼라스가 신문지상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것은 1958년 로마 오페라극장에서였다. 칼라스가 출연하는 노르마 갈라 콘서트에는 이탈리아 대통령과 영부인이 참석토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칼라스는 그 전전날부터 파티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고 정작 공연이 몇시간 남지 않은 시간에는 어느 화려한 나이트클럽에 앉아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칼라스의 목소리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칼라스는 다른 사람과 말을 나누기도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당황한 극장측은 노르마의 대역을 찾아야 할 판이었다. 예상치 않았던 일이라서 로마오페라극장으로서는 말할수 없는 재앙을 만난 셈이었다. 그러나 칼라스의 출연 취소라는 재앙보다 더 어려운 사태가 발생했다. 칼라스가 의사의 지시를 무시하고 무대에 서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아무도 말릴수 없었다. 극장측은 요행만을 바랬다. 제1막에서 칼라스의 목소리는 미안하지만 폐허와 같았다. 1막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고 다른 관객들은 너무나 충격을 받아서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칼라스는 극장 뒷문을 통해서 겨우 도망갔고 극장측은 더 이상 공연할수 없다는 장내 안내를 해야 했다. 사람들은 너무 화가 나서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고 이 소란은 그날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얼마나 흥분을 잘 하는지는 설명이 필요없는 일이었다. 칼라스는 정말로 너무나 피곤하고 힘든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칼라스의 집으로 걸려온 전화 한통이 그를 크게 위로해주었다. 그롱키 대통령의 전화였다. 누구도 칼라스를 비난하지 않는다는 격려의 전화였다. 신문들은 이 얘기를 대서특필하였다. 이제 칼라스의 이름은 어린아이까지 아는 것이 되었다.

 

안나 볼레나. 1957년 라 스칼라

 

1959년, 칼라스는 남편 죠반니 바티스타와 이혼키로 결정했다. 칼라스는 1950년부터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사랑하는 사이였다. 결국 칼라스는 오나시스와의 결혼을 위해 이혼을 단행했다. 그러나 다 아는대로 오나시스는 1968년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하였다. 오나시스에게 진정으로 기대를 걸고 있었던 칼라스의 충격은 너무나 컸다. 그리고 1975년 오나시스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칼라스의 생명을 앞당기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서 칼라스는 1961년 라 스칼라에서 메데아(Medea)를 공연하였다. 그러나 목소리는 예전의 칼라스가 아니었다. 1막에서 상대역인 제이슨역의 욘 비커스(Jon Vickers)와 두엣을 부를 때에는 칼라스의 목소리가 너무 거칠고 쇠퇴하여서 듣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관중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칼라스에게 야유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칼라스는 관중들을 무시하면서 계속 힘들게 노래를 불러나갔다. 오페라 중간 부분에서 메데아가 제이슨을 ‘잔인한 사람’(Crudel)이라고 하면서 저주를 퍼붓는 장면이 나오자 처음에는 객석의 천정을 향해 손을 들고 ‘잔인한 사람’이라고 소리쳤으나 두 번째로 Crudel을 외칠때에는 무대 앞으로 걸어 나와 관중들을 향해 그 큰 눈을 부릅뜬채 ‘잔인한 사람들’이라고 소리쳤다. 이어서 칼라스는 다음 소절을 관중들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Ho dato tutto a te’(나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라는 소절이었다. 순간 관중들은 수군거리며 야유를 던지던 것을 중지했다. 마지막 막이 끝나자 관중들은 칼라스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비올레타

 

1965년, 칼라스의 목소리는 또다시 커다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칼라스는 파리 오페라에서 노르마를 공연하고 있었다. 조역인 아달지사(Adalgisa)역은 유명한 메조소프라노 휘오렌자 코소토(Fiorenza Cossotto)였다. 코소토는 칼라스가 상당히 지쳐있으며 소리도 전에처럼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엣을 부를 때에는 코소토가 일부러 음을 길게 끌어서 칼라스의 부족한 음성을 감싸주었다. 마지막 공연날, 그날은 칼라스의 콘디션이 최악의 상태였다. 때문에 이날따라 코소토는 칼라스와 두엣을 할때 있는 힘을 다하여 칼라스의 소리를 보호해야 했다. 그러나 관중들이 보면 마치 두 사람이 결투를 벌이는것 같은 극적인 분위기였다. 커튼이 내려지자마자 칼라스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정신을 잃은채 사람들에게 들려 분장실로 옮겨졌다.

 


1969년 칼라스는 ‘메데아’라는 영화를 촬영하게 되었다(체루비니의 오페라가 아니라 메데아에 대한 신화를 주제로 한것임). 칼라스의 건강상태는 상당히 쇠약했지만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하여 노래를 불렀다. 어느날 칼라스는 강변에서 뜨거운 태양아래 달려가는 장면을 촬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칼라스는 그 장면에 대한 촬영이 끝나자마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불행하게도 그 영화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후 한두해 동안 칼라스는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 칼라스는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고 의사들의 말에 따르면 그가 자포자기한 나머지 진정제를 과다 복용하여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칼라스가 실제로 자살을 기도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아무튼 당시 그는 불면증에 시달려 수면제를 계속 복용했고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진정제를 수시로 먹었다고 한다. 1973년 칼라스는 쥬세페 디 스테파노(Giuseppe di Stefano)와 함께 세계 순회공연을 가졌다. 8년만에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나서는 공연이었다.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있었던 첫 공연부터 이들의 공연은 예술적으로 볼때 재앙이었다. 피아노 반주자는 80 고령의 이보르 뉴톤(Ivor Newton)이었다. 순회 여행을 떠날때부터 뉴톤은 길을 걷다가 현기증을 일으켜 그 자리에 주저앉기도 했고 어떤 때는 죽음이 다가온다고 하면서 망상에 젖어 멍하니 서 있기도 했었다. 언젠가 뉴톤은 악보를 넘겨주는 로버트 서더랜드에게 ‘칼라스가 높은 음정을 노래 부를때에 내가 심장마비에 걸리면 나를 의자에서 밀치고 대신 피아노 연주를 해주되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도 눈치 못채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칼라스는 그런 뉴톤을 감히 해고하지 못했다. 만일 피아노 반주를 그만두어달라고 하면 충격을 받아 무슨 끔찍한 일을 볼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뉴톤의 건강이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워 서더랜드가 반주를 맡게 되었다. 마지막 순회공연은 1974년 일본 사포로에서였다. 사포로는 이 세상에서 칼라스의 노래를 들을수 있었던 마지막 장소였다.

 

 


1977년 9월 16일, 칼라스는 파리의 집에서 잠을 설쳤는지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다. 그는 침대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친후 목욕탕으로 향해 걸어갔다. 갑자기 그의 왼쪽 머리에서 참을수 없는 통증이 일어났다. 칼라스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칼라스를 돌보아 주던 가정부가 그를 급히 침대에 다시 눕히고 진한 커피를 마시게 했다. 칼라스는 커피를 몇 모금 억지로 마셨지만 그 후로는 어떤 것도 마시지 못했다. 급히 의사를 불렀다. 그러나 칼라스는 의사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차디찬 몸으로 변하였다. 나흘후인 9월 20일,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칼라스는 화장되었고 재는 파리의 라세이스 공동묘지에 묻혔다. 1979년 봄, 칼라스의 재는 그리스로 돌아가 에에게의 푸른 바다에 뿌려졌다. 이로서 칼라스의 54년 파란만장한 생애는 오나시스가 배를 타고 오가던 에에게 바다에 영원히 잠들게 되었다. 칼라스가 세상을 떠난지 25년후인 2002년, 칼라스가 스승인 엘비라 데 히달고에게 보냈던 편지가 미국의 경매장에서 6천불에 팔렸다. 파리 아파트에서 비통한 생활을 하고 있던 칼라스는 오나시스가 자기를 거절하고 재클린과 결혼하자 데 히달고게게 분노의 감정을 감추지 못하여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 편지에서 칼라스는 ‘잔인하다. 사실이 아닐것이다. 두 사람 모두 대가를 치루도록 할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대가를 치룰것이다. 두고 볼것이다’라고 썼다. 1969년 10월 29일, 그러니까 오나시스가 재클린과 결혼한지 9일후에 쓴 편지였다. 계속하여 칼라스는 ‘정말로 분노할 일은 그가 나에게 자기의 결혼에 대하여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9년간을 그의 편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적어도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얘기해 주었어야 했다. 신문을 통해서 알게 하지 말고 직접 얘기해 주었어야 했다. 그는 분명히 미쳐있었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런 미친 사람을 내 마음속에 두지 않고 지워버리겠다. 그것도 어서 속히’라고 썼다. 그러나 오나시스는 재클린과 결혼한 후에도 상당기간 칼라스의 마음을 지배하였다. 칼라스가 오나시스를 잊지 못하고 계속 분노속에서 지낸것이 그 증거였다. 그는 사랑에 상처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오나시스에게 배반당했어도 그를 거부하지 못한 창피스런 굴욕감 때문에 더욱 고통을 당했다.     

 

파리 페레 라셰스 공동묘지의 마리아 칼라스 상징묘

라 디비나(La Divina)라는 칭호를 받은 마리아 칼라스는 30편이 훨씬 넘는 오페라의 주역으로 무대에서 활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레코드 취입으로 그의 음성을 영원히 남겨놓았다. 칼라스가 레코드로 남겨 놓은 오페라는 다음과 같다. 노르마(노르마), 일 피라타(이모제네), 청교도(엘비라), 몽유병자(아미나), 카르멘(카르멘), 메데아(메데아), 안나 볼레나(안나 볼레나), 람메무어의 루치아(루치아), 폴리우토(파올리나), 안드레아 슈니에(맛달레나), 알체스테(알체스테), 터리드의 이휘게니(이휘게니), 팔리아치(네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산뚜짜), 라 죠톤다(죠콘다), 라 보엠(미미), 나비부인(초초상), 라 트리비아타(비올레타), 마농 레스코(마농), 투란도트(투란도트), 아르미다(아르미다), 세빌리아의 이발사(로지나), 이탈리아의 터키인(휘오릴라), 라 베스탈레(지울라), 아이다(아이다), 가면무도회(아멜리아), 운명의 힘(레오노라), 막베스(레이디 막베스), 나부코(아비가일), 리골레토(질다), 일 트로바토레(레오노라), 시실리의 만종(엘레나), 파르지팔(쿤드리) 등등이다. 칼라스는 로시니, 도니제티, 벨리니 등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을 연주하여 이들 작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고 몽세라 카바예, 조안 서더랜드와 같은 후진들이 그 작품을 다시 소화할수 있도록 길을 터 놓아 주었다. 한편, 칼라스는 카르멘을 취입했지만 무대 공연은 하지 않았다. 당시로서 카르멘의 역을 맡아 무대에서 유혹적인 춤을 추어야 하며 다른 여공들과 처절한 싸움을 해야 하는 등의 연기는 곤란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칼라스는 무대를 은퇴한후 이렇게 말했다.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다' (To sing is an expression of your being).

 

 

 노르마                                                                        리자베트(돈 카를로)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함께                                      수잔나(피가로의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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