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메조소프라노

세기적 정상 Irene Minghini-Cattaneo (이렌느 밍기니-카타네오)

정준극 2008. 2. 28. 11:46
 

▒ 세기적 정상 Irene Minghini-Cattaneo (이렌느 밍기니-카타네오)


이탈리아 라벤나 지방의 루고 디 로마냐(Ludo Di Romagna)에서 태어난 이렌느 밍기니-카타네오는 20세기 초반, 세계 오페라 무대를 주름잡았던 당당한 메조였다. 그는 메조이면서도 고음처리에 뛰어났으며 저음에서는 콘트랄토에 버금하는 중후한 소리를 내어 사람들을 매료했다. 유럽의 오페라극장들은 그의 출연 자체만으로도 성공을 걷울 정도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는 14살때부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한 예외적인 경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처음에 지휘자 치코냐니(Cigognani)로부터 레슨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에토레 카타네오(Ettore Cattaneo)에게 레슨을 받았다. 이렌트 밍기니는 1920년 에토레 카타네오와 결혼하였다. 그는 이렌느의 성악 선생 겸 코치이기도 했지만 밀라노의 유명한 악보 출판사인 겸 음악기획사인 라코르디의 감독이었다. 이렌느의 실력을 알고 있는 동료 성악가 로리-볼피(Lauri Volpi)는 이렌느가 충분히 국제적으로 성공할수 있다고 생각하여 성악가의 길을 적극 권유하였다. 이렌느는 남편의 사회적 지위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어서 고민하다가 결국 가정을 소홀히 하면서까지 독립된 성악가 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한편 이렌느는 성격이 상당히 유별나다고 알려져있다. 지휘자나 연출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공연을 취소할 정도였다. 그의 첫 오페라 데뷔는 1918년 (결혼하기 2년전) 밀라노의 카르카노극장에서 죠르다노의 안드레아 슈니에중 마델론(Madelon)을 맡은 것이었다. 곧 이어 그는 암네리스(아이다)를 맡아 갈채를 받았다. 암네리스는 이렌느가 가장 좋아하는 역할이었다.


이후 불과 몇 년이라는 기간 동안 그는 암네리스뿐만 아니라 아주체나(일 트로바토레), 아달지사(노르마), 에볼리(돈 카를로), 달릴라(삼손과 달릴라), 로라, 엘레나, 랭노생트(아를르의 여인), 프레지오실라, 지글리에타(마스카니의 이사보), 마닷레나, 울리히(가면무도회), 미세스 퀴클리(활슈타프)로서 이탈리아 전국의 오페라 무대를 수놓았다. 이탈리아 이외의 첫 오페라 데뷔는 1928년 영국의 코벤트 가든으로서 암네리스였다. 이때 아이다는 두솔리나 쟈니니(Dusolina Giannini)였다. 얼마후 그는 보리스 고두노프의 마리나를 그의 레퍼토리에 추가함으로서 러시아 오페라에도 도전하여 호평을 받았다. 보리스 고두노프에 출연하였을 때 상대역은 유명한 베이스 훼오도르 샬리아핀(Feodor Chaliapin)과 소프라노 마르게리타 카로시오(Margherita Carosio)였다. 나중에 이렌느는 소프라노 카로시오에 대하여 ‘어떻게 저런 사람이 오페라 무대에 설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별로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이렌느는 카로시오가 러시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이탈리아 스타일로 접근하였다고 평가했다. 어찌 보면 정확한 지적인지도 모른다.


얼마후 그는 다시 코벤트 가든에서 로사 폰셀레(Rosa Ponselle)와 함께 라 조콘다와 노르마를 공연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불만이 많아 무대 뒤에서 상당히 불편한 상태로 지냈다. 그러나 신문은 ‘마담 카타네오(이렌느)는 그의 풍성한 음색으로 마담 폰셀레와 최고의 조화를 이루었다’였다. 이렌느는 간혹 메조로서 바그너의 브라게네(트리스탄과 이졸데)와 오르트루트(로엔그린)을 부르기도 했다. 그는 1941년 라 시에카(La Cieca)에서 고별 연주를 했다. 그는 불행하게도 2차 대전의 막바지인 1944년, 리미니(Rimini)에 있는 별장에 있던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