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콘트랄토

놀라운 음역 Kathleen Ferrier (캐틀린 훼리어)

정준극 2008. 2. 28. 13:30
 

▒ 놀라운 음역 Kathleen Ferrier (캐틀린 훼리어)

 

 오르페오 역의 캐틀린 훼리어


캐틀린 훼리어를 어느 영역에 포함시키느냐는 것은 힘든 일이다. 메조일수도 있고 콘트랄토일수도 있으며 어느때는 소프라노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폭넓은 음역을 가지고 있다. 그는 1912년 영국 북부 랜카셔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아무리 돈이 없어 가난하더라도 자식만큼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린 훼리어는 피아노에 관심이 많았다. 어머니는 딸 페리어의 피아노 재능을 살리기 위해 대학까지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훼리어는 14세 때에 학교를 중퇴해야 했다. 그리고 전화교환수로 취직하여 돈을 벌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피아노는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지방 피아노 대회에 나가서 여러 상을 받을 정도로 피아노에 뛰어났다. 피아니스트로서 훼리어는 독창자의 반주를 맡는 일이 많았다. 1935년 훼리어는 회사에서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과 결혼했고 칼리슬(Carlisle)로 이사 가서 신혼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1937년 그는 남편의 권유로 칼리슬 음악경연대회에 나가 피아노와 성악부분에서 각각 우승을 차지했다. 피아노와 성악의 갈림길에서 훼리어는 이윽고 성악의 길을 택하였고 그 결정은 참으로 탁월한 것이었다.


훼리어는 좋은 선생을 만났다. J. E. 허친슨(Hutchinson)은 훼리어에게 적합한 레퍼토리를 정해주며 올바른 발성과 작품해석을 가르쳤다. 허친슨은 페리어가 바흐의 미사곡에 최적임을 발견하고 그 방향으로 집중 교육했다. 그때 쯤하여 훼리어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불행한 것이 되어 결국 헤어졌다. 그후 훼리어는 독일 가곡에 대하여 집중적인 공부를 했다. 이윽고 훼리어는 세계적 콘서트 아티스트로 성장했다. 훼리어는 말러의 오케스트라 노래들, 브람스, 슈베르트, 슈만, 그리고 거의 모든 오라토리오에서 놀랄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카라얀, 발터, 몽토, 클라이버등 당대의 유명한 지휘자들과 함께 수많은 연주회를 가졌다. 그는 특히 아버지와 같은 친구 브루노 발터의 지도를 받으며 오래도록 함께 음악을 만들며 지냈다.


훼리어는 잊혀져있던 영국의 노래들을 발굴하여 알리는 일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퍼셀의 노래는 페리어 때문에 새롭게 빛을 보게 된다. 훼리어는 단 두편의 오페라에 주역으로 출연했을 뿐이다. 브리튼의 루크레티아(루크레티아의 능욕), 글룩의 유리디체(오르페오와 유리디체)였다. 비록 한정된 오페라 출연이었지만 그의 재능을 마음껏 표현한 공연이었다. 훼리어는 1951년 39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방암 때문이었다. 너무나 짧은 경력이었다. 만일 더 살았더라면 더 많은 오페라에 출연하여 그의 능력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브루노 발터는 훼리어에 대하여 ‘그는 기쁨에 넘쳐 살았던 여인이었다. 유머 감각이 뛰어 났으며 누구에게도 마음 편한 존재였다. 그는 장조(長調)와 같았다’고 말했다. 훼리어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기쁨으로 노래를 불렀다. 아마도 그의 신앙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훼리어는 당대의 뛰어난 오라토리오 아티스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