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설적인 오텔로 Icilio Calleja (이칠리오 칼레쟈)
1913년은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 탄생 1백주년을 기념하는 해였다. 1913년은 바그너 탄생 1백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라 스칼라는 오텔로를 공연키로 결정했다. 오텔로는 프란체스코 타마뇨(Francesco Tamano)가 26년전인 1887년 오텔로를 라 스칼라에서 초연한 이래 기이하게도 라 스칼라에서 다시 공연된 일이 없었다. 라 스칼라는 26년만의 오텔로 공연이며 베르디 탄생 1백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공연의 타이틀 롤을 오디션을 통해 선정키로 했다. 심사위원은 오텔로의 대본을 쓴 천재 대본가 보이토(Arrigo Boito)와 거장 지휘자인 툴리오 세라핀(Tullio Serafin)이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말타 혈통의 테너 이칠리오 칼레쟈(1882-1941)가 최종 선정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밀라노의 신문사들에는 ‘베르디 선생의 탄생 1백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인데 이탈리아인이 아닌 외국인이 주역을 맡을수 있느냐?’는 항의 서한이 빗발쳤다. 툴리오 세라핀은 ‘이탈리아 사람이 아닌 것이 무어가 어떻다는 말인가? 칼레쟈만큼 오텔로를 훌륭하게 표현할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시오! 심사위원회의 결정은 최종이므로 절대로 번복할수 없소’라고 말했다. 칼레쟈의 오텔로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이후 칼레쟈는 오텔로만으로 라 스칼라에 연속 13회 출연하였다. 출연진은 데스데모나에 린다 카네티(Linda Cannetti), 이아고에 마리오 삼마르코(Mario Sammarco) 등이었다. 이들은 13회의 연속 공연에 변함없이 출연했다. 다만 데스데모나만이 중간에 린다 카네티에서 클라우디아 무치오(Claudia Muzio)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칼레쟈는 오텔로의 역할을 최대로 표현하기 위해 간질 발작의 결과로 나타나는 안면 경련과 충혈, 근육 변화 등에 대하여 병원을 찾아다니고 책을 보며 집중적인 연구를 했다. 그는 이런 연구의 결과를 제3막에서 오텔로가 간질 발작을 일으켜 혼절하는 장면에 정말 실감 있게 활용했다. 심지어 칼레쟈의 얼굴 근육이 씰룩거려질 정도였다. 아리고 보이토가 제3막이 끝난후 분장실로 칼레쟈를 찾아가 그토록 완벽하게 오텔로를 표현한데 대하여 치하했다. 이후 칼레쟈는 바르셀로나, 로마, 베니스, 나폴리 등 여러 곳에서 베르디의 무어(Moor)인 역할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칼레쟈는 말타를 두 번 방문했다. 첫 번 방문은 1919년이었다. 라 스칼라에서 오텔로로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계속하여 유럽의 여러 무대에서 오텔로로서 최고의 인기를 차지하고 있던 당시였다. 그는 실상 오페라 공연보다는 자기의 몸속에 말타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말타를 찾아갔던 것이다. 말타에서의 환영은 그야말로 뜨거운 것이었다. 말타인들은 말타의 아들이 돌아왔다고 하며 열광적인 환영을 하였다. 칼레쟈는 ‘삼손과 델릴라’(Sansone e Dalila)에서 삼손을 맡아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원래는 단 1회의 공연만 하고 이탈리아로 돌아갈 계획이었으나 말타 국민들의 간절한 소청으로 앙코르로서 마티네(낮 공연)를 공연하고 돌아갔다. 두 번째 방문은 오텔로를 공연하기 위해서였다. 1923년 3월 발레타(Valletta) 왕립오페라하우스에서 무려 4회의 공연을 가져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발레타 왕립오페라하우스는 칼레쟈에게 ‘위대한 오텔로, 이칠리오 칼레쟈, 말타를 빛낸 인물’이라고 적힌 금메달을 기증하였다.
1913년 라 스칼라에서의 오텔로 공연이후 칼레쟈는 여러 역할을 맡으며 라 스칼라의 무대를 압도하였다. 라 스칼라에서의 마지막 공연은 1916-17년 시즌에서 스폰티니(Spontini)의 훼르난도 코르테즈(Fernando Cortez)에 출연한 것이었다. 이때쯤하여 그의 음성은 바리톤 색깔을 가지기 시작했다. 사실 칼레쟈는 18세 때에 팔리아치에서 토니오를 맡은 일이 있다. 그러므로 바리톤 역할은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튼 경력의 말기에 그는 테너 테씨투라(tessitura)로서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칼레쟈는 바리톤 역할과 바그너와 같은 힘차고 어두운 테너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칼레쟈는 1925년경부터 오페라 출연을 자제하여 왔으며 마지막 출연은 1929년 파르마에서 바그너의 파르지팔을 맡은 것이었다. 더 이상 오페라에 출연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인정한 그는 가족과 함께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서 정착했다. 이칠리오 칼레쟈는 1941년 11월, 잠자는 듯 숨을 거두었다. 이집트의 주요 신문들은 그의 생애를 큰 기사로서 다루었다. 라 스칼라는 그를 기념하여 라 스칼라 박물관에 그의 대형 초상화를 전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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