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란드의 신사 Jan Kiepura (얀 키에푸라)
폴란드의 신사 얀 키에푸라(1902-1966)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전공하겠다는 결심으로 혼자만의 힘으로 공부에 전념하여 마침내 바르샤바음악원을 졸업한 인간승리의 케이스이다. 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처음에 바르샤바오페라단의 합창단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합창단원으로만 있으면 어떠한 발전도 없다고 생각한 그는 다시 집중적으로 성악과 무대연기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여 개인 레슨을 받은후 1925년, 23세때에 렘베르크(Lemberg)에서 오페라에 처음 데뷔하였다. 그의 뛰어난 성악적 재능과 무대 맨너는 폴란드 음악계의 주목을 받은 것이었으며 차츰 명성이 높아지자 유럽 각지로부터 초청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라 스칼라, 파리 등 유럽의 극장에서 주역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미국과 남미 순회공연도 가졌다.
테너 키에푸라는 이름난 영화배우였다. 그의 첫 영화 출연은 1926년 폴란드에서 제작된 무성영화였다. 몇년후 토키영화가 나오자 그는 영화에서 직접 노래를 부를수 있어서 많은 인기를 차지했다. 물론 그는 이미 당시에 국제적으로 알려진 테너였기 때문에 그가 출연한 영화는 더욱 인기를 끌었다. 1930년대에는 독일에서 몇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그 중의 하나는 ‘나의 마음은 그대에게 날아가고’(Mein Herz ruft nach Dir)였다. 그는 이 영화에 함께 출연했던 여배우 마르타 에게르트(Martha Eggerth)와 결혼하였다. 두 부부는 몇편의 다른 영화에도 출연하여 팬들을 즐겁게 해주었으며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환상적인 커플로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2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 키에푸라는 파리에 있었다. 프랑스가 나치에게 합병당하자 키에푸라 부부는 가까스로 뉴욕행 여객선을 탈수 있었다. 미국에서 키에푸라는 오페라 활동을 계속하며 많은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전쟁중이었기에 조국 폴란드를 잊을수 없었다. 그는 폴란드 난민 돕기 운동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키에푸라는 1942년까지 메트로에서 공연하고 무대에서 은퇴하였다. 키에푸라 부부는 오페라보다는 연극 ‘유쾌한 미망인’ ‘폴로네이스’ 등의 브로드웨이 공연에 주역으로 출연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전쟁이 끝나자 두사람은 파리로 돌아갔다. 키에푸라는 파리에서 마지막 영화에 출연한후 미국 시민권을 받아 미국에 영주하였다. 그는 1966년 뉴욕에서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음반 중에서 토스카의 Recondita armonia는 그의 아름답고 세련된 음성을 들을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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