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고대 그리스-21세기

(1850-1870) 오페라 통일운동 리소르지멘토

정준극 2008. 3. 5. 09:20

(1850-1870) 오페라 통일운동 리소르지멘토


[역사의 팁: 그때 그 당시]

1853: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가 베니스의 라 페니체극장에서 초연되었다.

1858: 푸치니가 이탈리아의 루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케루비니와 카탈라니도 루카 출신이다.

1859: 아델리나 패티가 리틀 플로린다(Little Florinda)라는 예명으로 뉴욕에 데뷔하였다. 그 때 패티는 16세였다.

1861: 이탈리아는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한 비엔나 협상으로 조각 나 있었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조국의 통일을 위해 이른바 Risorgimento 운동을 전개했다. 1820년과 1831년 국수주의자들이 오스트리아의 압정을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그후 주세페 마찌니(Giuseppe Mazzini)가 로마 공화국을 설립하였으나 이 또한 1848년에 붕괴되었다. 통일을 갈망하는 이탈리아인들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오스트리아를 물리치는데 성공했다(도니제티의 오페라 ‘연대의 딸’ 참고 요망). 카밀로 디 카부르(Camillo Di Cavour)가 잠정적으로 통일된 이탈리아를 이끌었으나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1861년 빅토르 엠마누엘2세가 이탈리아 왕으로 선포되었다. 베르디의 기여도 대단히 컸다. 현대 이탈리아 건국의 영웅인 가리발리(Garibali)장군은 빅토르 엠마누엘의 오른팔이었다. 가리발리는 붉은 셔츠로 유명했다.

1862: 빅토르 위고가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 ‘아! 무정’ 또는 ‘장 발장’)을 썼다.

1864: 마이에르베르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에 25편의 오페라를 남겼지만 마지막 작품인 ‘아프리카 여인’은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프리카 여인’은 마이에르베르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초연되었다. 비록 완성하지 못했지만 더 이상 완성할 부분이 없었다.

1865: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해방이 이루어졌다. 재즈가 붐을 타기 시작했고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초연되었다.

1868: 보이토의 메피스토펠레스가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공연되자 난리가 났다. 전통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이 대거 충돌한 것이다. 결국 경찰이 개입하여 겨우 소동을 진압했고 오페라는 공연이 취소되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가 막을 올렸다.

1870: 바티칸 공회는 교황의 무오류(Infallibility)를 공표했다. 교황은 인간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베르디의 첫 성공작인 '나부코'. 라 스칼라


로시니 이후 19세기 초반의 이탈리아 오페라는 지나치게 주인공 중심이었다. 주인공 소프라노 한명만 있어도 오페라가 공연될 정도였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나 독일에서는 순수한 음악적 전개 방법을 도입하여 보다 풍부한 하모니, 보다 효과적인 악기의 활용, 보다 진보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와 독일 사람들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아직도 소프라노에 매달리고 있나? 아이고, 나가 죽어라!’라고 직접 얘기는 안했겠지만 아무튼 은근히 경멸하였다. 그러한 때에 베르디의 등장은 이탈리아 오페라가 세계 오페라를 제패토록 해준 위대한 계기였다. 베르디는 오페라에 이탈리아 통일운동(Risorgimento)이라는 정신을 심기도 했다. 나부코, 아틸라, 조반나 다르코, ‘시실리의 만종’ 등...베르디의 오페라에는 조국을 사랑하는 심정이 배어 있다. 베르디에게 있어서는 주인공이 문제가 아니라 철학과 사상이 중요했다. 인간을 향한, 조국을 향한, 그리고 절대자인 신을 향한 메시지가 담겨있지 않은 오페라는 죽은 작품이라는 생각이었다. ☻ Risorgimento(리소르지멘토): 19세기 이탈리아의 국가 통일운동.

 

세계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고 있는 오페라 중의 하나인 '라 트라비아타'. 시애틀 오페라


1860년대에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그 이전까지는 작곡자가 지휘를 겸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한 때에 작곡자의 의도를 최대로 해석하며 오케스트라의 특성을 최대로 살려 연주하는 전문 지휘자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제로부터 지휘자의 역할은 주인공 소프라노, 또는 테너에 버금하는 중요한 위치가 되었다. 오페라 무대의 새로운 스타였다. 지휘자의 중요성이 강조된 데에는 마이에르베르와 구노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자기들의 작품이 이탈리아에서 공연될 때에 음악해석과 표현의 전권을 지휘자에게 위임했다. 이때로부터 오페라의 성격과 표현은 지휘자에 따라 새로운 경지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그린 '리소르지멘토'의 한 장면. 베르디의 음악이 자주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