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고대 그리스-21세기

(1830-1870) 이탈리아의 국민적 영웅: 비바 베르디!

정준극 2008. 3. 5. 09:20

(1830-1870) 이탈리아의 국민적 영웅: 비바 베르디!


[역사의 팁: 그때 그 당시]

1834: 오스트리아의 발레리나 홰니 엘쓸러(Fanny Elssler)가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데뷔하였다. 홰니의 공연은 파리의 제일가는 화제였다. 이어 홰니는 미국으로 떠났다.

1842: 나부코의 대성공은 베르디를 슬픔과 좌절에서 구원해 주었다. 그 즈음 베르디는 첫 부인과 두 아이들을 2년 사이에 모두 잃어서 비탄에 빠져 있었다.

1865: 링컨대통령이 13일의 금요일에 워싱턴의 극장에서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라는 사람에게 저격당하여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베르디의 가면무도회는 스웨덴의 오페라극장에서 피살된 구스타프3세를 주인공으로 한 것이다. 구스타프왕의 살인범은 체포되지 않았다. 바그너도 13과 대단히 인연이 많았다.


오페라의 황제 주세페 베르디

       

베르디는 1839년에 첫 오페라 Oberto(오베르토)를 발표했고 1893년에 28편의 오페라 중 마지막 작품인 Falstaff(활슈타프)를 완성함으로서 오페라 황제로서의 대단원을 장식했다. 베르디는 거의 반세기에 걸친 그의 작곡 이력을 통해 포스트-로시니적인 형식과는 다른 새로운 형식을 부단히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한 변화는 초기의 대규모 애국적 작품인 Nabucco(나부코: 1842), I Lombardo(롬바르도: 1843), Atilla(아틸라: 1846), 그리고 La battaglia di Legnano(레냐노 전투: 1849) 등에서 발견할수 있다. 이와 함께  Ernani(에르나니: 1844), I due Foscari(포스카리의 두 사람: 1844), Giovanna d'Arco(죠반나 다르코: 1945), 그리고 위대한 초기 작품인 Macbeth(맥베스: 1847)에서처럼 주인공의 성격 표현에도 많은 비중을 두었다. 베르디에게 있어서 오페라 성악가는 무대에서 진정으로 연기를 할수 있어야 했다. 만일 연기력이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감동을 줄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이런 주인공을 ‘살아있는 주인공’이라고 불렀다. 그러한 전형은 Rigoletto(리골레토: 1851)이었다. 리골레토가 표현력이 부족하다면 그건 죽은 리골레토라는 것이 베르디의 생각이었다. 베르디는 계속하여 주인공에 대한 표현력이 더 집중으로 표현되는 Il Trovatore(일 트로바토레: 1853)를 내놓았다. 인간의 미묘한 내면세계를 표현한 La Traviata(라 트라비아타: 1853)의 등장은 베르디의 새로운 진면목을 보여주는 프리미엄 크레디트 카드였다.


 

비바 베르디라고 쓴 전단지를 붙이는 시민들


부인을 사별한  베르디는 첫부인과 사별한 후 오랜 세월동안 홀로 지내다가 말년에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Giuseppina Strepponi)와 결혼하여 파리에 살았다. 주세피나는  베르디의 첫 오페라인 Oberto(오베르토)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던 인연이 있다. 이후 베르디의 창작활동은 순항을 거듭한다. 파리에서 완성한 작품은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 스타일의 Les Vepres Siciliennes(시실리의 만종: 시실리의 저녁기도)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 나온 Simon Boccanegra(시몬 보카네그라: 1857), Un ballo in maschera(가면무도회: 1859), 운명의 힘(La forza del destino: 1862), 그리고 최대작인 아이다(Aida: 1871)는 그랜드 오페라로의 새로운 방향 전환을 의미하는 작품들이었다. 특히 아이다에는 통일의 위업을 이룬 이탈리아에 대한 기쁨이 담겨있는 그랜드 중의 그랜드 오페라였다. 베르디의 애국적인 조국애는 거룩할 정도였다. 국민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베르디의 이름을 따서 Viva Verdi!라는 애국적 표어를 소리 높이 외치기 시작했다. Viva Verdi!라는 표어는 베르디를 찬양하는 의미도 들어 있지만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이었던 비토리오 엠마누엘왕을 기리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Vitorio Emanuele, Re D'Italia의 첫 글자를 따오면 VERDI가 되기 때문이다. 베르디가 아직도 파리에 있을 때인 1867년에 Don Carlo(돈 카를로)가 완성되었다. 이 작품이야말로 프랑스적인 그랜드 스타일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바그너의 영향이 내포되어 있다는 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베르디를 대표하는 두 작품이 더 남아 있다.


 밀라노에서의 베르디 장례식. 어느 국왕의 장례식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애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