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고대 그리스-21세기

(1870-1900) 베르디와 셰익스피어: 오텔로와 활슈타프

정준극 2008. 3. 5. 09:23

(1870-1900) 베르디와 셰익스피어: 오텔로와 활슈타프


[역사의 팁: 그때 그 당시]

1871: 카이로 오페라하우스에서 아이다가 초연되었다. 수에즈 운하는 1969년에 완공되었다.

1872: 이탈리아의 여배우 엘레아노라 두세(Eleanora Duse)가 줄리엣으로 베로나에서 데뷔하였다. 엘레아노라는 겨우 14세였다. 선풍적인 인기를 차지한 그는 이어 유럽과 미국의 무대에 등장하여 관객들로부터 놀라운 찬사를 받았다. 엘레아노라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여배우였다.

1874: 무소르그스키가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를 작곡했다.

1875: Carmen(카르멘)이 처음 공연되었다. 몇달후 비제가 세상을 떠났다.

1877: 에디슨이 축음기와 마이크를 발명했다. 파리에서 생-생의 Samson et Dalila(삼손과 델릴라)가 초연되었다. 차이코브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처음 공연되었다.

1901: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가 밀라노에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에 태어난 리하르트 바그너(1813)는 베르디보다 18년전에 베니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텔로'. 요나스 카우프만과 마리아 아그레스타. 메트로폴리탄


                      

60세에 유명한 진혼곡(Requiem)을 완성한 베르디는 정말로 은퇴하고 싶었다. 이제는 명성도 얻었고 재산도 넉넉하여 더 이상 오페라를 작곡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오페라 제작자 겸 출판업자의 생각은 달랐다. 실제로 베르디의 작품은 발표될 때마다 감격과 갈채의 연속이었다. 출판업자는 만일 베르디선생이 또 다른 작품을 내놓는다면 큰돈을 벌수 있다고 생각했다. 출판업자는 베르디가 계속 작곡할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진혼곡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작곡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국가적, 유럽적, 세계적 손실이라는 생각도 조금 했다. 출판업자 편에는 아주 유능한 대본가가 있었다. 아리고 보이토(Arrigo Boito)였다. 출판업자가 베르디에게 내민 대본은 셰익스피어의 Othello(오텔로)였다. 베르디는 보이토의 재능을 대단히 칭찬했다. 그러나 보이토의 대본으로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보이토와 함께 SImon Beccanegra(시몬 보카네그라)의 수정작업 정도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베르디는 결국 출판업자의 끈질긴 유혹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보이토의 대본도 구미가 당겼지만 출판업자 뒤에서 부인 주세피나가 간청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하여 나온 것이 Otello(오텔로)와 Falstaff(활슈타프)였다. 베르디의 마지막 생애를 찬란하게 장식한 최대의 걸작들이다.

                        

'활슈타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