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이탈리아

달라피콜라, 루이지

정준극 2008. 3. 11. 16:18
이탈리아 현대음악의 중심역

루이지 달라피콜라(Luigi Dallapiccola)

 

 

크로아티아 출신이지만 이탈리아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음악가로 인정받고 있는 루이지 달라피콜라(Luigi Dallapiccola: 1904-1975)는 이탈리아 현대음악의 발전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 한 인물이다. 그의 서정적인 12음 기법에 의한 작품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음악적 주장은 음악에 파치슴, 즉 국수주의가 지배하여서는 안되며 도덕적으로도 하자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개념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경험한 정치적 사태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루이지 달라피콜라는 다른 작곡가들이 대체로 음악적인 분위기에서 태어나고 자란데 비하여 그렇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크로아티아의 이스트리아의 유일한 이탈리아어 학교의 교장이었다. 당시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한 지역이어서 정치적 분쟁이 끊이지 않던 곳이었다. 이스트리아의 이탈리아어 학교는 1차 대전에 문을 닫았으며 루이지의 아버지는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간주되어 그라츠의 수용소와 같은 곳에 억류되어 생활을 해야 했다. 아버지와 함께 그라츠로 온 루이지는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으나 피아노 한대도 없는 환경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라츠의 오페라극장에서 일할수 있었다. 루이지는 이때에 작곡가가 되려는 결심을 했다. 전쟁이 끝나자 루이지의 가족은 이스트리아로 돌아왔다. 이스트리아의  풀 네임은 피시노 이스트리아(Pisino d'Istria)였으며 현재는 크로아티아의 파친(Pazin)이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루이지는 1920년대에 플로렌스음악원에서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했으며 이와 함께 여러 나라를 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루이지는 1931년부터 플로렌스음악원의 교수로서 재직했다. 루이지는 1967년 은퇴할 때까지 플로렌스음악원에서 지내며 그의 피아노 교수인 에르네스토 콘솔라가 신병으로 더 이상 피아노 레슨을 하지 못하게 되자 대신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루이지는 또한 루이지 케루비니음악원에서 비토 프라찌(Vito Frazzi)에게서 작곡을 공부했다. 미국의 버크셔음악센터를 방문한 것도 이 시기였다. 그의 제자로는 루이지 베리오, 베르나르드 란드스, 도날드 마르티노, 할림 엘 다브, 에르네스토 루빈 드 체르빈, 알렌느 찰만, 롤란드 트로간, 노엘 다 코스타, 레이몬드 와일딩 화이트 등이 있다. 달라피콜라가 진지하게 작곡을 하게 된 데에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영향이 컸다. 오스트리아에 추방되어 지낼 때에 '방랑하는 화란인'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1921년 클로드 드빗시를 듣고부터는 작곡을 그만두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3년동안 작곡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페루치오 부소니의 신고전주의 작품에 매료되었으나 실은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제2비엔나 학파였다. 1930년대의 일이었다. 특히 알반 베르크와 안톤 베베른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 세계에 진정으로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아놀드 쇤베르크였다. 1924년 플로렌스에서 공연된 쇤베르크의 송 사이클인 Pierro lunaire를 본 루이지는 쇤베르크의 음악표현이 자기의 평소 아이디어와 같은 것을 알고 현대음악으로 정진해야겠다는 다짐을 확고히 하였다. 음악은 자기만족을 거절해야 하고 음악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개념이었다.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을 직접 경험한 루이지는 파치슴에 대하여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같은 가부감은 그의 작품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의 대표적인 무대작품은 Volo di Notte(야간비행: 1940. 플로렌스), Il prigioniero(죄수. 1950. 플로렌스), Job(1950. 로마), Ulisse(율리시즈. 1968. 배를린)등이다. 이밖에 그는 발레음악, 영화음악, 관현악곡, 성악곡 등을 남겼다.

 

 

'죄수'의 한 장면. 스칼라 극장 공연.


루이지의 전생에를 통해서 그의 작품에 특성을 불어 넣어 준 것은 무솔리니의 파치스트 체제하에서의 경험이었다. 그는 한때 무솔리니를 지지했었다. 그의 선전을 믿어서였다. 그는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무솔리니의 정치적 견해에 대하여 열정적이기까지 했다. 특히 무솔리니가 아비시나안 전투, 그리고 이탈리아의 스페인 내전에 관여하는 것을 반대하자 무솔리니를 훌륭한 지도자로 보았다. 그러다가 무솔리니가 히틀러의 인종차별 견해에 대하여 동정적이자 실망하였다. 루이지의 부인은 유태인인 라우라 루짜토(Laura Luzzatto)였다. Canti di prigionia와 Il prigioniero는 루이지의 실망과 좌절을 반영하는 작품이었다. 특히 Canti di prigionia는 그의 진정한 의미에서 그의 저항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는 2차 대전중에 나치에 반대했기 때문에 위험한 지경에 처하였다. 심지어는 몇달 동안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지내기도 했다. 그는 연주여행을 다녔지만 나치가 점령하지 않은 지역에 한하였다. 루이지의 작품이 일반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전쟁이 끝나고부터였다. 그의 Il prigioniero는 그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알리게 된 작품이었다. 루이지는 여행을 자주하였다. 특히 미국에 자주 갔었다. 1951년과 1952년에는 탱들우드에 모습을 보였다. 1956년부터는 뉴욕의 퀸스 칼리지에서 작곡 과정을 지도했다. 그의 강의는 유명했기 때문에 미국와 유럽에서 자주 초청을 받았다. 루이지의 1968년도 오페라인 울리세(Ulisse)는 아마도 그의 경력의 피크를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그는 말년에 작곡보다는 주로 수상록을 집필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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