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영국

베네딕트, 줄리우스

정준극 2008. 3. 18. 09:18
 

영국 뮤지컬의 대부

줄리우스 베네딕트

 


줄리우스 베네딕트(Julius Benedict: 1804-1885)라는 이름은 오늘날에도 영국 국민들에게 마치 가족과 같은 친밀감을 주는 것이 되어 있다. 베네딕트는 영국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곡가이다. 베네딕트는 독일출신이다.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다. 베네딕트는 멘델스존이나 마이에르베르처럼 유태인 은행가 가정에서 태어났다. 확실치는 않지만 베네딕트와 하이네는 사촌간이었다고 한다. 베네딕트는 베버에게서 음악을 배웠다. 베네딕트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으로 나중에 베버자서전을 썼다. 그는 여러 음악가들과 친분이 많았다. 비교적 유복한 집안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초대하여 만나서 토론을 벌이기를 좋아했다. 로시니, 마이에르베르, 베르디, 멘델스존, 벨리니, 도니제티 등은 특별한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베네딕트는 아마 생전의 베토벤을 마지막으로 만나 얘기를 나눈 음악가일 것이다. 베토벤은 베네딕트를 ‘재미있는 친구 녀석’(saucy little fellow)이라고 불렀다 이 말에는 건방지다는 의미도 포함되어있다. 베네딕트는 자기 스승 베버와 베토벤의 해묵은 감정을 화해시키려고 베토벤을 찾아 갔었다고 한다. 1823년의 일이었으니 베네딕트가 겨우 19살이었고 악성 베토벤은 53세 때의 일이었다. 그 이후 어느 때에 베토벤, 베버, 그리고 젊은 베네딕트가 비엔나 교외의 휴양지 바덴에서 함께 만나 역사적인 유쾌한 시간을 보낸 일이 있다. 어느 다 쓰러져 가는 집의 지하실에서였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베네딕트가 훔멜과 함께 바이마르에서 공부할 때 바이마르 대공의 저택에서 괴테를 만난 일이 있다. 그날 저녁 대공 저택에서의 이벤트는 베버의 ‘마탄의 사수’ 초연을 준비하는 리허설이었다. 이 리허설에 대공과 괴테가 참석했다. 베네딕트는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리허설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말로만 듣던 위대한 괴테를 만나게 되어 당황한 김에 약간의 실수를 저질렀다. 하지만 괴테로부터 따듯한 박수를 받았다. 베버 자신도 처음부터 끝까지 오페라의 역할 하나를 맡아 노래했다. 베버의 목소리는 형편없었지만 진지함과 열정으로 뭉친 자세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베네딕트는 작곡과 함께 바이올린 수업에 열중하여 비엔나, 나폴리, 파리를 전전하며 바이올린 교습을 받다가 끝내는 런던에 정착했다. 그가 겨우 31세 때였다. 베네딕트는 8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50년을 영국에서 보냈다. 그래서 그가 독일 출신이라는 사실은 거의 알지 못하며 모두들 영국 작곡가로 알고 있다. 그는 라이시엄(Lyceum)에서 지휘자로 활동했다. 그는 이곳에서 유명한 작곡가 발프(Balfe)의 The Bohemian Girl(집시 소녀)와 Maritana(마리타나)를 직접 지휘하여 초연했다. 베네딕트가 ‘집시 소녀’를 직접 지휘했다는 얘기를 들은 빅토리아 여왕은 그를 런던으로 초청하여 여왕폐하극장에서 공연을 지휘토록 했던 일이 있다. 1850년, 그는 ‘스웨덴의 나이팅게일’인 제니 린드(Jenny Lind)와 함께 미국 순회공연을 떠났다. 연속 122회 공연이라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베네딕트는 바이올린만 잘 연주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피아노를 더 잘 연주했다. ‘베네딕트 피아노 공개연주회’는 그가 영국에서 살았던 50년 동안 한해도 빠짐없이 런던음악제의 빅 이벤트로 개최된 것이었다. 이 연주회 날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런던뿐 아니라 전 영국 의 음악팬들이었다. 베네딕트가 영국음악의 발전을 위해 기여한 공적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1871년 경(Sir)이라는 작위를 수여받았으며 이밖에도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훈장을 받았다. 그는 거의 말년에 제자 Miss Forty와 결혼하였다. 어떤 익살꾼은 이 결혼에 대하여 ‘피아노와 포르테(Forte)의 결합’이라고 말하여 사람들을 웃겼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대부는 당시 황태자였던 에드워드7세였다.


베네딕트의 첫 영국 스타일의 오페라(뮤지컬)는 The Gypsy's Warning(집시의 경고)이었다. 그가 33세 때였다. 이 오페라에 나오는 Rage, thou angry storm은 지금도 전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흘러간 노래이다. 상당한 성공에 고무된 베네딕트는 영국인을 위한 오페라의 작곡에 전념키로 작정했다.  베네딕트가 내놓는 오페라들은 나오자마자 전영국의 인구에 회자될 만큼 화제였다. 특히 The Lily of Kilarney(킬라니의 백합)은 대히트였다. 아마 ‘킬라니의 백합’ 만큼 롱런을 기록한 작품은 없을 것이다. 1862년 코벤트 가든에서 초연되었을 때 사람들은 집에 돌아 갈줄을 몰랐다. 향수를 자아내는 아일랜드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멜로디, 세련된 하모니, 악기를 효과적인 활용한 오케스트라 음악이 전편을 누볐기 때문이었다. 이 오페라는 대체적으로 베버의 영향을 받았지만 애조를 띤 우울한 색조는 당연히 베네딕트 자신의 것이다. 이 오페라는 부치컬트(Boucicault)의 희곡 Colleen Bawn(아름다운 소녀)을 원작으로 하는 것이다. ‘킬라니의 백합’은 노래가사와 음악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킬라니의 백합’은 영국에서의 성공에 이어 독일의 여러 극장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베네딕트의 오페라 수첩

● Giancinta ed Ernest(1827 나폴리) ● I portughesi in Goa(고아의 포르투갈인: 나폴리) ● Un anno e un giorno(1년 그리고 하루: 오페레타: 1836 나폴리) ● The Gypsy's Warning(집시의 경고: 1838 런던) ● The Bride of Venice(베니스 신부: 1844 런던) ● The Crusaders(십자군: 1846 런던) ● The Lily of Killarney(킬라니의 백합: 로맨틱 오페라: 1862 런던 Covent Garden) ● The Bride of Song(노래 신부: 오페레타: 1864 런던)

 

킬라니


'세계의 오페라 작곡가 > 영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레이스, 윌리엄  (0) 2008.03.18
발프, 마이클 윌리엄  (0) 2008.03.18
아놀드, 사무엘  (0) 2008.03.18
보이스, 윌리엄(William Boyce)  (0) 2008.03.18
토마스 아느  (0) 2008.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