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영국

월레이스, 윌리엄

정준극 2008. 3. 18. 09:20
 

영국 오페라의 위상 제고

윌리엄 월레이스

 


윌리엄 빈센트 월레이스(William Vincent Wallace: 1812-1865)는 마이클 발프(Michael Balfe)와 마찬가지로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발프와 함께 영국음악의 위상을 높인 위대한 작곡가였다. 어떤 경우, 작품의 영향력과 완성도에 있어서는 발프를 능가했다는 평을 들었다. 월레이스는 아일랜드의 워터포드(Waterford)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연대의 군악대장이었다. 새로운 생활을 찾아 호주로 갔던 월레이스는 그곳에서도 마땅한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미국행을 결심했다. 미국에 온 월레이스는 1850년, 38세 때에 뉴욕에서 헬렌 슈퇴펠(Helen Stoepel)이라는 피아니스트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결혼함으로서 미국시민이 되었다. 그렇지만 영국의 작곡가로, 정확하게는 아일랜드의 작곡가로 분류되고 있다. 그는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말년에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는 부인과 두 아이들에게 궁핍한 생활만을 남겨준채 1865년 12월 12일, 53세로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월레이스는 아버지가 연대의 군악대장이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여러 가지 악기를 배우는 등 음악적인 생활을 하였다. 그는 특히 비이올린과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다. 아버지의 개인지도를 받은 그는 20대가 되기 전부터 작곡을 하기 시작하였다. 주로 아일랜드 민요를 바탕으로 한 밴드음악이나 관현악곡이었다. 음악가로서 장래를 열어 가기로 결심한 청년 월레이스는 더블린으로 갔다. 이곳에서 그는 인기 있는 피아니스트 겸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활동하였다.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은 그는 18세 때에 더블린의 덜스(Thurles)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으며 이와 함께 우어술라인(Ursuline)수녀원 여학교에서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는 이곳에서 이사벨라 켈리(Isabella Kelly)라고 하는 여학생과 사랑에 빠졌다. 이사벨라의 아버지는 두 사람의 결혼을 조건부로 승낙하였다. 월레이스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하며 이름에 빈센트(Vincent)를 넣는 다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이름에 빈센트가 들어가게 되었다.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이름에 빈센트를 넣어야 결혼을 허락하겠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루어라인'


당시 대부분 아일랜드의 젊은이가 그랬던 것처럼 활동적이고 모험심이 있었던 월레이스는 1835년, 23의 청년으로 부인 이사벨라와 어린 아이를 데리고 호주로 새로운 생활을 찾아 떠났다. 생각건대 당시에는 호주에 가면 돈을 호주머니에 흠뻑 넣을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월레이스의 여동생인 소프라노 엘리자베스, 남동생인 플루트 주자 웰링턴도 함께 갔다. 이들은 합심하여 시드니에서 가족음악회를 열어 음악생활을 시작했다. 얼마후 월레이스는 호주 최초의 음악학교를 설립하여 신천지에서의 빛나는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경제사정은 낳아지지 않았다. 월레이스는 영국이나 독일에서 피아노를 수입하여 판매했으며 간혹 피아노연주회도 열어 생활비로 충당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인 이사벨라와 이혼하게 되었다. 가족들도 뿔뿔이 헤어졌다. 혼자 몸이 된 월레이스는 방랑벽 때문인지 뉴질랜드로 가서 이번에는 고래잡이배를 타고 남태평양에 오래동안 나가 있었다. 이 기간중에 그는 인도의 여러 곳을 방문하였으며 남미의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등의 큰 도시를 방문하여 피아노 연주회를 가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마치 스트라빈스키의 ‘레이크의 인생역정’의 주인공 톰 레이크웰(Tom Rakewell)과 같은 월레이스의 모험담과 생활은 꾸며낸 얘기라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1841년 그는 멕시코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단의 공연을 지휘했으며 이어 이 오페라단을 이끌고 미국 여러 곳을 다니며 공연했고 뉴욕에서는 뉴욕필협회의 창단에 적극 가담했다고 한다.


1845년, 런던으로 돌아온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자주 연주회를 가졌다. 그러면서 몇년전부터 작곡해 왔던 오페라를 완성했다. Maritana(마리타나)였다. 그해 12월말 마리타나는 드러리 레인(Drury Lane)에서 공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어서 런던의 코벤트 가든, 비엔나, 호주에서도 공연되었다. 여동생인 소프라노 엘리자베스는 1848년 코벤트 가든에서의 마리타나 초연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다. 그후 거의 20년 동안 월레이스의 오페라 작곡은 피치를 가하게 되었다. Matilda of Hungary(헝가리의 마틸다: 1847), Lurline(루어라인: 1860), 호박색 마녀(The Amber Witch: 1861), Love's Triumph(사랑의 승리), The Desert Flower(사막의 꽃: 1863) 등은 대표작이다. 숱한 고생을 겼었던 월레이스였지만 그의 음악세계는 지성적이면서도 성숙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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