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러시아

차이코프스키, 피터 일리이치

정준극 2008. 3. 18. 09:59

유럽의 고전음악과 러시아 전통음악의 융합 

피터 일리이치 차이코브스키


피터 일리이치 차이코브스키

 

러시아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를 한줌의 ‘5인조 국민음악파’ 중에서 선발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또 다른 위대한 작곡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일에 지나치게 도취되어 생의 모든 열정을 자학적이라고 할 만큼 작곡활동에 쏟아 부은 사람이다. 그는 지나치게 예민하고 소심하여 다른 사람과의 접촉조차 꺼렸다. 그는 심히 고독한 사람이었다. 그는 측은하게 여겨질 정도로 의외로 연약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격정적인 정신세계의 소유자였다. 그의 음악은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듯 격정의 용광로이다. 그렇지만 한 마디로 그의 전 생애는 극심한 번뇌의 연속이었다. 피터 일리이치 차이코브스키(Peter Ilyich Tchaikovsky: 1840-1893)가 바로 그 사람이다. 차이코브스키를 한마디로 누구인가? 러시아의 가장 유명한 작곡가이다. 그의 음악적 특성은 무엇인가? 차이코브스키는 글링카와 마찬가지로 하모니를 비롯한 형식적인 테크닉은 서유럽에서 도입하였지만 관현악에는 슬라브적인 웅대함이 넘쳐있다. 그리고 우울하면서도  연민의 정을 자아내게 하는 멜로디는 진실로 러시아적이다. 차이코브스키는 러시아가 낳은 또 하나의 위대한 국민주의자였다.

 

'스페이드의 여왕'


[차이코프스키와 폰 메크 부인과의 인연]

 

나데츠다 폰 메크 부인

 

차이코브스키는 어릴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지만 장성하여서는 음악과는 거리가 먼 법학을 공부해야만 했다. 아들을 법률가로 만들려는 부모의 강요 때문이었다. 하지만 법과대학생활은 비참했다.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앉은 공부였기에 좌절감만 안겨주었다. 차이코브스키의 다음 정착지는 생페테르부르그 음악원이었다. 음악원을 졸업한 차이코브스키는 다행히 모스크바의 신설 음악원의 교수직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 동안 없는 살림에 대학을 마치느라고 있는 돈 마저 다 써버려서 거의 무일푼 상태였다. 천만 다행인지 아닌지, 어찌되었든 운명의 여신이 일생에 단 한번 그에게 미소를 보낸 일이 있다. 나데츠다 폰 메크(Nadezhda von Meck)라는 부유한 여인이 차이코브스키를 숭배하여 후원한 것이다. 대규모 철도사업을 하던 사람의 미망인이었다. 나데츠다부인이 차이코브스키의 음악에 매료했는지 또는 차이코브스키라는 개인에게 매료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아마 음악쪽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할 것이다. 왜냐하면 19세기 당시의 사회 통념으로 보아 사회적으로 잘 알려진 사업가의 미망인으로서 젊은 음악가와 연애 한다는 것은 안나 카레리나의 경우처럼 사회의 지탄을 받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부인은 대리인을 통하여 차이코브스키에게 아주 별난 제안을 했다. 만일 두 사람이 연모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단 한번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그 날로부터 재정지원은 중단된다는 제안이었다. 두 말하면 잔소리겠지만 이들은 평생 단 한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생활고에 시달려야했던 차이코브스키는 이 미지의 부인에 대하여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교향곡 제4번을 감사의 뜻으로 이 부인에게 헌정하였다. 겉표지에는 ‘나의 가장 절친한 벗에게’(To my best friend)라고 적혀있다. 

   

'이올란타' 의 한 장면

 

[그 누가 나의 고통을 알것인가?]

 

그에게는 남에게 말할수 없는 놀랍고도 괴로운 사정이 있었다. 후문에 의하면 차이코브스키는 동성연애자(게이)였다. 실로 차이코브스키는 그 사정 때문에 항상 무거운 마음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말을 하면 ‘아니, 그럴 수가? 실망이요 실망!’이라고 소리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실은 차이코브스키는 동성연애자, 즉 게이(Gay)였다. 러시아에서 동성연애는 중범이었고 발견되면 시베리아 행이었다. 철저한 기독교(러시아 정교회) 배경의 러시아로서 성서에 위배되는 동성애는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비난을 받아 마땅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차이코브스키는 미안하지만 전 생애를 통하여 남이 알면 안되는 비밀 속에서 움츠리며 살아야 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자기의 비참하고 절망적이며 고통 받는 성격을 감추도록 강요당했다고 볼수 있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마지막으로 택할 길은 자살뿐이었다. 그렇다고 차이코브스키가 자살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콜레라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물론 나중에 어떤 역사학자들은 차이코브스키가 자살한 것이 틀림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유진 오네긴'(그레민 공작과 타티아나)


차이코브스키는 자기를 연모하고 있는 폰 메크 부인으로부터 여성으로서의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냉담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지속되었다. 그러던중 1876년 마침내 폰 메크는 차이코브스키에게 생각지도 않게 열정적으로 사랑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받은 차이코브스키는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감정을 솔직히 적어서 답장을 보냈다. 아무런 연애 감정도 없으니 그리 아시라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폰 메크는 차이코브스키에게 생활비를 정기적으로 보냈다. 그렇게 하기를 거의 20년이나 했다. 편지 사건이후 차이코브스키와 폰 메크는 단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1890년 두 사람의 관계는 갑자기 중단되었다. 아마 폰 메크가 세상을 떠났던지 또는 다른 나라로 떠나버렸는지 모른다. 아무튼 이 일로 인하여 차이코브스키는 죽는 날까지 번민과 회한과 낙심 속에 살았다. 자살을 했던 병마와 싸우다가 져서 세상을 하직했던 아무튼 그는 남이 알면 안 되는 불안한 생활을 하기위해 엄청난 번뇌를 감수하며 살았을 것이다. 허공을 맴도는 듯한, 말할 수 없이 그리워하는 듯한, 그리고 우울하고 쓸쓸함이 응축되어 배어있는 그의 멜로디를 들으면 그런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때, 그는 자기의 병이 고쳐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모스크바음악원 시절부터 자기를 열렬하게 연모했던 여학생 제자(타티아나: 유진 오네긴의 여주인공의 이름도 타티아나이다)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은 실패였다. 오히려 더 재난을 불러일으켰을 뿐이었다. 결국 이혼하였고 차이코브스키의 심정은 오히려 전보다 더 비참해졌다. 

 

[차이코브스키의 음악: 평화, 박애, 자유]

 

비록 개인 생활이 무슨 최루탄 멜로드라마와 같았지만 그건 개인 생활일 뿐이다. 그의 교향곡, 발레음악, 오페라는 대단한 인기를 얻어 차이코브스키라는 이름을 세계에 떨치게 만든 것이었다. 예를 들어 1891년에는 미국에 초청되어 뉴욕 카네기홀에서 갈라 콘서트를 직접 지휘했다. 차이코브스키의 인기가 하늘 높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차이코브스키의 위대한 재능인 멜로디 때문이었다. 글링카가 시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차이코브스키도 그의 전체 음악을 멜로디처럼 작곡했다. 무슨 멜로디를 말하는 것인가? 절망을 벗어버리고 이상을 향하여 높이 치솟아 오르는 듯한, 폭발할 것만 같은 열정이 응축된 듯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화와 박애와 자유를 추구하는 영광스러운 멜로디였다. 


차이코브스키를 완벽한 드라마틱 오페라 작곡가로 만든 요소는 무엇인가? 첫째는 그의 대단히 드라마틱한 교향곡이나 발레음악이 기반이 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그의 음악이 얼마나 드라마틱하고 열정에 넘쳐 있는 것인지 예를 들어 보면,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연인들이 열정적으로 키스하는 장면이 나오면 거의 대부분 차이코브스키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사랑의 테마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온다.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아무튼 드라마틱하고 열정적인 멜로디로는 차이코브스키를 따를 사람이 없다. 둘째로, 그의 인생 자체가 드라마틱했기 때문에 그 영향이 오페라에도 번진 것이다. 거의 미친듯 열성적으로 자기를 흠모하며 따라 다녔던 여학생과의 공연한 결혼, 그리고 차마 남에게 말할 수 없었던 비밀스런 동성애생활, 자기를 후원한 미지의 부인에 대한 연모 등 그 자체가 드라마틱한 것이었다. 셋째로 광활한 러시아적 정서가 넘쳐흐른다는 것이다. 1812년의 나폴레옹과 러시아의 전쟁을 그린 1812년 서곡의 장대함을 들어 보라! 연주회장 밖에서 울려퍼지는 대포소리는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허공에서 전율케한다.

 

 차이코브스키와 부인 안토니나 밀리우코바(Antonina Miliukova)


그가 10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고 하면 ‘아니, 그렇게 많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Eugene onegin(유진 오네긴) 정도만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문호 푸슈킨의 소설을 오페라로 만든 유진 오네긴은 슬픈 사랑의 이야기와 절망, 죽음, 남모르게 삭여야 했던 열정, 자유와 억압에 대한 얘기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 테마는 누구에게나 공감을 주는 현실생활의 단면이었다. 그보다도 유진 오네긴이 성공한 이유는 오페라의 전편에 흐르는 감미롭고도 암울한 멜로디 때문이었다. 이런 멜로디에 매료당하지 않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차이코브스키의 오페라 수첩

● Der Opritschinik(근위병: 1874 생페테르부르그) ● Wojewoda (보이보데: 1869 모스크바 Bolshoi Theater) ● Wakula der Schmied(대장장이 바쿨라: 1874 생페테르부르그) ● Yevgeni onegin(유진 오네긴: Eugene onegin: 1879 모스크바) ● Die Jungfrau von Orleans(오를레앙의 처녀. 1881 생페테르부르그) ● Tscherewitschki(대장장이 바쿨라의 수정본: 황비의 슬리퍼: 1887. 모스크바 Bolshoi Theater) ● Mazeppa(마제파: 1884 모스크바) ● Die Zauberin(마법녀: 1887 모스크바) ● Pique Dame(스페이드의 여왕: The Queen of Spade: 1890 생페테르부르그) ● Iolanthe(이올란테: 1892 생페테르부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