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수도원/비엔나의 교회들

9구 슈봐르츠슈파니어키르헤(Schwarzspanierkirche)

정준극 2008. 5. 30. 05:46
 

9구 슈봐르츠슈파니어키르헤(Schwarzspanierkirche)

한때 개신교 학생 기숙사, 현재는 사무실

 

현재는 전시회장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쟁 중에는 군수품 창고로도 사용되었다.

 

보티프키르헤(Votivkirche) 뒤편 슈봐르츠슈파니어슈트라쎄(Schwarzspanierstrasse)에 몽세라의 베네딕트(Benedicktiner von Montserrat)의 수도원 교회가 있었다. 몽세라라는 말은 검은 슈파니어(스페인사람)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수도원교회만큼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교회도 없을 것이다. 우선 1683년 터키의 제2차 비엔나 공성 때에 유감스럽게도 파괴되었다. 1690년경에는 그 자리에 새로운 수도원교회를 짓기로 하여 건축에 착수하였다. 웅장한 정면(Hauptfassade)의 새로운 교회는 착공으로부터 거의 50년이 지난 1739년에 봉헌되었다. 남독 슈봐벤(Schwaben) 출신의 요한 밥티스트 슈트라우브(Johann Baptist Straub)가 강론대, 회중석, 오르간 설치장소 등 교회 내부의 주요 시설과 각양의 성자상(聖者像) 제작을 책임 맡았다. 교회는 1739년 봉헌되었지만 종탑은 1749년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종탑은 몇 년후 강한 벼락을 맞아 파손되는 운명을 겪었다.

 

1780년경 슈봐르츠슈파니어 수도원은 1구로 옮기게 되었고 원래 건물은 제국군대의 소유가 되었다. 교회에 있던 내부 장식들은 대부분 철거되어 다른 교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거장 안토니오 벨루치(Antonio Belucci)가 그린 찬란한 성화는 린츠의 예수회교회로 가게 되었다. 1787년 요셉2세 황제는 이 교회 건물을 군대 병영으로 사용토록 지시하였다. 원래의 베네딕트수도원과 교회는 역사 속에 완전히 사라질 운명이었다. 그러다가 1861년 예전의 슈봐르츠슈파니어키르헤는 개신교 교회로 다시 오픈되었다. 비엔나 수비대의 개신교 장졸들은 새로 오픈한 개신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래서 ‘수비대교회’라는 별명을 들었다. 1차대전이 끝난 1918년, 이 개신교교회는 문을 닿게 되었고 수비대교회의 역할은 마리아 힐르프에 있는 슈티프트키르헤(Stiftkirche)가 떠맡게 되었다. 실상 슈티프트키르헤는 1799년부터 군대를 위한 교회로서 역할을 맡아 왔었다.


1930년 예전의 슈봐르츠슈파니어키르헤는 다시 한번 문을 열게 되었다. 이번에는 정교회 예배를 드리는 장소였다. 그러기를 오스트리아가 나치와 통합하던 1938년까지 계속하였다. 나치와의 합병이후 슈봐르츠슈파니어키르헤는 개신교 병사들을 위한 교회로서 사용되었다. 이와 함께 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시작되었다. 귀중한 예술 작품들이 새롭게 발굴되어 빛을 보기도 했다. 보수공사는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5월 마무리되어 새롭게 봉헌되었다. 그러나 얼마후 전쟁의 와중에서 심하게 폭격을 받아 그로부터 더 이상 교회로서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다. 1963년 파괴된 잔해를 철거하였지만 웅장한 정면만을 그대로 남겨 두었다. 1966년 이후 교회건물은 한때 개신교 학생 기숙사로 이용되고 있다.  현재는 전시회등 여러 문화행사를 하는 장소로도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