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비엔나 신년음악회

요한 슈트라우스에 대한 전통

정준극 2008. 6. 26. 21:37

요한 슈트라우스에 대한 전통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메인 레퍼토리로 삼고 있는 비엔나 신년음악회의 전통은 실은 ‘왈츠의 황제’ 요한 슈트라우스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수 있다. 그 얘기를 하기 전에 우선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요한 슈트라우스의 이상한 관계를 살펴보자. 예전부터 비엔나 필의 단원이 되려는 사람들은 우선 요한 슈트라우스 악단에 들어가 경력을 쌓는 것이 관례였다. 당시 요한 슈트라우스 악단은 유럽 전역은 물론, 멀리 신대륙인 미국까지도 잘 알려진 것이었다. 말하자면 국가대표급 단원들이었다. 그러므로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비엔나 필(당시는 필하모닉 콘서트협회라고 불렀음)에는 요한 슈트라우스 악단 출신의 단원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엔나 필은 진실로 비엔나적인 아름다운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연주하지 않았다. 전통을 먹고 사는 비엔나 필 멤버들은 자기들이 춤곡이나 행진곡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 했던것 같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요한 슈트라우스는 당시 바그너와 브람스와 같은 위대한 작곡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그런 요한 슈트라우스를 비엔나 필은 무시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비엔나 필 사람들은 요한 슈트라우스와 여러번 함께 연주회를 가질 기회가 있었다. 개중에는 요한 슈트라우스 음악의 중요성과 특성을 깊이 인식하고 비엔나 필의 레퍼토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비엔나 필은 ‘사람들을 즐겁게만 해주는 가벼운 음악을 전통의 비엔나 필의 레퍼토리로 삼는 것은 자존심 문제’라고 설명했다. 그건 그렇고, 요한 슈트라우스와 비엔나 필은 여러번에 걸친 만남이 있었다.

                            

비엔나 슈타트파르크의 요한 슈트라우스 기념상

                                 

(요한 슈트라우스와 비엔나 필의 첫 번째 만남: 1873년)

요한 슈트라우스2세와 비엔나 필(당시에는 궁정오페라오케스트라라고 불렀음)과의 첫 인연은 1873년이었다. 슈트라우스가 비엔나 오페라 무도회를 위해 작곡한 왈츠 ‘비엔나 기질’(Wiener Blut)의 초연이 1873년 4월 22일 무직페어라인(Musikverein: 악우회) 연주회장에서 비엔나 필의 연주로 있었다. 요한 슈트라우스2세가 직접 지휘하였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통상대로 바이올린을 손에 잡고 연주하면서 지휘했다. 이 스타일을 포아가이거(Vorgeiger)라고 부른다. 비엔나 필의 단원들은 대단히 진지하고 열성으로 연주하여 이날의 연주회를 대성공으로 이끌었다. 고전적인 비엔나 필과 왈츠의 황제 요한 슈트라우스와의 합작연주회는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다음번 인연은 같은해 11월 4일, 비엔나 엑스포 개막식 때였다. 역시 요한 슈트라우스가 비엔나 필을 지휘하여 대단한 갈채를 받았다. 엑스포 개막식에서는 요한 슈트라우스 자신의 왈츠는 물론 요셉 란너의 왈츠가 연주되었으며 그중에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는 그야말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후 이른바 수아리(Soiree)라는 연주회를 궁정오페라하우스(현 슈타츠오퍼)에서 정기적으로 개최하여 비엔나 시민들을 열광시켰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연주회는 ‘과거와 현재의 비엔나의 회상’이라는 타이틀로서 슈트라우스 가문의 작품만을 프로그램에 올린 것이었다. 수아리 연주회는 대성공이어서 1878년 제3회 연주회까지 개최할 정도였다. 물론 모두 요한 슈트라우스2세가 지휘하였다.


(왈츠의 황제와의 작별: 1899년)

1878년 제3회 수아리 연주회 이후 요한 슈트라우스와 비엔나 필과의 합동 연주회는 없었다. 그러다가 1894년 비엔나 필은 요한 슈트라우스의 음악계 데뷔 50주년을 기념하는 연주회를 주선하였다. 당시 요한 슈트라우스는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비엔나 필에 전보를 보내어 깊은 감사의 뜻을 표명했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비엔나 필이 자기의 지휘자 생활 50주년을 기념하여 연주회를 개최한데 대하여 ‘위대한 예술가들의 위대한 연주’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 다음번 요한 슈트라우스와 비엔나 필의 만남은 오랜 인연의 마지막이었다. 1899년 5월 22일 요한 슈트라우스는 비엔나궁정오페라하우스에서 ‘박쥐’의 서곡을 처음으로 지휘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오케스트라의 연습과정에서 감기에 걸렸고 이것이 폐렴으로 발전하여 결국 열흘 후인 그해 6월 3일 세상을 떠났다.


(요한 슈트라우스를 추모하며: 1921년)

비엔나 필은 비록 요한 슈트라우스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렇다고 요한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선뜻 프로그램에 넣지 않았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왈츠나 폴카일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비엔나 필이 요한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처음으로 본격 연주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지 3년 후인 1902년이었다. 비엔나 필은 정규 연주회의 프로그램으로 ‘봄의 소리’(Fruehlingsstimmen) 왈츠, ‘와인, 여인 그리고 노래’(Wein, Weib und Gesang), 오페레타 ‘기사 파즈만’(Ritter Pazman)에서 발레곡을 올렸다. 하지만 그후에 비엔나 필은 언제 그랬었느냐는 듯 요한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연주하지 않고 잠잠하였다. 그러다가 1921년 사정이 달라졌다. 그해에 슈타트파르크(Stadtpark)에 건립된 요한 슈트라우스의 기념상을 축하하여 비엔나 필의 연주회가 있었다. 아르투르 니키슈(Arthur Nikisch)가 지휘하는 비엔나 필은 ‘예술가의 생애’(Kuenstlerleben),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와인, 여인 그리고 노래’를 연주하였다. 지휘자 니키슈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작품들을 너무도 완벽하게 해석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이후, 비엔나 필이 아니면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완벽하게 연주할수 있는 오케스트라는 세상에 없다는 찬사를 듣게 되었다.

 

지휘자 겸 작곡가인 아르투르 니키슈

 

그같은 찬사에 힘입은 비엔나 필은 1925년 10월 25일 요한 슈트라우스 탄생 1백주년 기념 연주회를 개최하였다. 펠릭스 폰 봐인가르트너(Felix von Weingartner)가 지휘한 이 연주회에서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본 프로그램의 레퍼토리로 장식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쩐 일인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는 앙코르 곡으로 연주되는 경우가 많았었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작품으로만 구성된 비엔나 필의 요한 슈트라우스 탄생 1백주년 기념 연주회는 대성공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반드시 앙코르 곡으로만 등장한다.

 

펠릭스 폰 봐인가르트너가 지휘하는 1926년의 비엔나 신년음악회. 에칭. 페르디난트 슈무처 제작.

  

[요한 슈트라우스 전통의 시작: 1929년]

잘츠부르크에 머물고 있던 지휘자 클레멘스 크라우쓰(Clemens Krauss)는 1929년 8월 11일 요한 슈트라우스의 작품만을 가지고 연주회를 열었다. 크라우쓰는 슈트라우스 음악을 가장 명쾌하고 정확하게 해석한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크라우쓰의 잘츠부르크 오케스트라는 마치 비엔나 필의 전통을 이어 받은 듯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완벽하게 연주하여 대환영을 받았다. 크라우스는 1933년까지 잘츠부르크에서 슈트라우스 연주회를 개최하였다. 크라우쓰는 요한 슈트라우스2세의 작품뿐만 아니라 슈트라우스 가족 모두의 작품을 균형 있게 안배하여 프로그램을 편성하였다. 크라우쓰의 잘츠부르크 연주회는 1939년부터 시작된 비엔나 필의 신년음악회의 기반을 마련해 준 것이었다.


비엔나신년음악회에서의 클레멘스 크라우스


(제1차 신년음악회: 1939년)

1930년대 중반 이후의 비엔나는 암울한 시기였다.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급기야 1938년 히틀러는 ‘이제 오스트리아는 모국의 품에 돌아 왔다’면서 오스트리아를 독일의 제3제국에 합병하였다. 아울러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애국심과 조국애를 고취하는 어떠한 행동도 용인되지 않았다. 그 때에 잘츠부르크에 있던 클레멘스 크라우쓰는 비엔나에 올라와 비엔나 필과 함께 요한 슈트라우스 음악회를 준비하였다. 나라가 없어진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크라우쓰의 요한 슈트라우스 연주회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크라우쓰의 비엔나 필은 오스트리아의 독일 합병 이후 처음 맞는 신년을 축하하는 신년음악회를 개최하겠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나치는 ‘요한 슈트라우스 연주회’라는 타이틀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고 대신 ‘특별 연주회’라고 부르도록 했다. 크라우스가 계획했던 신년음악회는 1월 1일이 아닌 12월 31일에 열렸다.

 

 비엔나 신년음악회의 원천지인 잘츠부르크. 잘츠부르크 강이 흐르는 구시가지


진정한 의미에서 비엔나 신년음악회가 처음 열린 것은 1941년이었다(어! 필자가 태어난 해!). 그러나 그 때에도 음악회의 타이틀은 신년음악회가 아닌 ‘요한 슈트라우쓰 콘서트’였다. ‘요한 슈트라우스 콘서트’는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2, 1943, 1944년에도 쉬지 않고 열려 비엔나 시민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1월 1일에도 크라우쓰의 ‘요한 슈트라우쓰 콘서트’는 개최되었다. 다만, 2차대전이 끝난 1945년에는 열화와 같은 시민들의 요구에 의해 1월 2일에도 앙코르 연주회를 가졌다.


‘비엔나 신년음악회’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전쟁이 끝난 다음해인 1946년부터였다. 비엔나를 점령한 연합군은 클레멘스 크라우쓰가 나치에 협조했다는 명목으로 신년음악회의 지휘를 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요셉 크립스(Joseph Krips)가 1946-47년에 크라우쓰를 대신하여 신년음악회를 지휘했다. 연합군이 크라우쓰에 대하여 내린 2년 동안의 지휘 금지 기간이 끝나자 크라우쓰는 다시 신년음악회의 바톤을 잡았다. 그후 크라우쓰는 7년동안 신년음악회를 지휘했으며 1952년부터 새로 추가된 12월 31일의 송년음악회도 두 번이나 지휘했다. 크라우쓰는 1954년 세상을 떠났다. 크라우쓰는 토탈 13회에 걸친 신년음악회를 주관하면서 이 행사를 진실로 비엔나적인 것으로 승화시켰다. 그가 이룩한 슈트라우스 왕조 사람들의 작품에 대한 해석규범은 오늘날 까지도 후배 지휘자들에 의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비엔나신년음악회에서 요한 슈트라우스처럼 포아가이거로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지휘하는 빌리 보스코브스키 

                                   


(빌리 보스코브스키와의 25년: 1955년부터)

1954년 클레멘스 크라우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비엔나 필은 후임자 문제로 난항을 겪지 않을수 없었다. 비엔나 필의 멤버들은 오랜 진통 끝에 비엔나 필의 악장인 빌리 보스코브스키를 신년음악회 예술감독으로 선출했다. 빌리 보스코브스키는 1955년부터 1979년까지 무려 25년간 신년음악회를 이끌었다. 빌리 보스코브스키의 슈트라우스 해석은 비엔나의 정취를 흠뻑 담은 것이었다. 그가 만들어내는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영광스러웠던 오스트리아제국(k.u.k)시대에 대한 한없는 향수를 불러 일으켜주는 것이었다. 특히 빌리 보스코브스키는 마치 요한 슈트라우스와 마찬가지로 한손에 바이올린을 들고 연주를 하며 지휘했다. 포아가이거 지휘였다. 역사상 빌리 보스코브스키만큼 매력적인 슈트라우스 지휘자는 다시는 찾아 볼수 없을 것이다. 그가 마침내 건강이 악화되어 지휘봉을 들수 없게 되자 비엔나 필은 ‘이제 신년음악회는 빌리 보스코브스키와 함께 사라질 운명’이라고 하며 망연자실했었다. 그러다가 비오스트리아의 지휘자에게도 지휘를 맡기기로 방향을 바꾸어 로린 마젤을 초빙하였던 것이다. 로린 마젤은 1980년부터 1986년까지 신년음악회를 지휘하여 타고난 재능을 한껏 선보였다. 비엔나 신년음악회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연주회는 1987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한 것이다. 카라얀은 신년음악회의 포맷을 새롭게 바꾸도록 한 시초였다. 예를 들면 연주회 중간에 성악 솔리스트를 초청한 것이다. 카라얀 이후 매년 다른 지휘자가 신년음악회를 이끌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 카를로스 클라이버, 주빈 메타, 리카르도 무티, 오자와 세이지, 니콜라우스 하르논쿠르트, 마리쓰 얀슨스, 조르즈 프레트르가 비엔나 악우회의 무대에서 신년음악회를 빛냈다. 이들은 모두 비엔나 필의 객원지휘자로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오스트리아 린츠 출신의 프란츠 벨저 뫼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