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비엔나 신년음악회

클레멘스 크라우쓰는 누구인가?

정준극 2008. 6. 27. 21:37

클레멘스 크라우쓰는 누구인가?


클레멘스 하인리히 크라우쓰(Clemens Heinrich Krauss: 1893-1954)는 오스트리아가 낳은 지휘자이며 오페라 감독이다. 그는 특히 요한 슈트라우스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크라우쓰는 비엔나가 자랑하는 신년음악회의 창시자였다. 크라우쓰는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 클레멘틴 크라우쓰(Clementine Krauss)가 혼외로 자기를 낳았기 때문에 어머니의 이름인 크라우쓰를 이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어머니 클레멘틴 크라우쓰는 비엔나의 인기 배우 겸 가수로서 19세기에 이름을 떨쳤던 소프라노 가브리엘레 크라우쓰(Gabrielle Krauss: 1842-1904)의 소생이라고 한다. 크라우쓰의 아버지는 당시 오스트리아제국 궁정의 주요 인물이었다고만 알려졌다.

 

클레멘스 크라우스



소년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이 많았던 크라우쓰는 호프카펠레(제국 합창단: 비엔나소년합창단의 전신)의 단원으로 들어가 활약하며 음악의 길로 들어섰다. 1912년 비엔나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작곡가가 되기 위해 리하르트 호이버거(Richard Heuberger)에게서 이론을 배웠으나 졸업후 브르노(Brno) 극장의 합창지휘자가 되어 지휘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크라우쓰가 정식 지휘자로 데뷔한 것은 1913년 브르노극장에서였다. 얼마후 프랑크푸르트에서 지휘자 생활을 할 때에 그는 루마니아 출신의 위대한 소프라노 비오리카 우르술레아츠(Viorica Ursuleac)를 만났고 두 사람은 프랑크푸르트에서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함께 연주회를 가졌다.  


 

1939년 바이로이트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다나에의 사랑'을 준비하면서. 칼 오르프, 루돌프 하르트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요제프 쿠글러, 클레멘스 크라우스

 

지휘자로서 차분한 경력을 쌓아가던 크라우쓰는 베를린을 방문하였다가 베를린 필을 지휘하는 아르투르 니키슈(Arthur Nikisch)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아르투르 니키슈는 크라우쓰가 지휘자로서 인생을 살도록 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리가(Riga), 뉘른베르크, 체친등에서 지휘자로 활동하던 크라우쓰는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그라츠(Graz)의 오페라 감독 및 심포니 지휘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1922년부터는 비엔나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의 부지휘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크라우쓰는 1929년 미국을 방문하여 필라델피아와 뉴욕 필을 지휘하여 갈채를 받았으며 그해에 비엔나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이 되었고 1930년에는 비엔나 필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1930년에 알반 베르크의 보체크(Wozzek)의 초연을 지휘한 것은 음악사에 남을 일이었다. 한편, 크라우쓰는 1926년부터 1934년까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상임지휘자로 활동하였다. 잘츠부르크에 머물고 있던 크라우쓰는 1929년 8월 11일 요한 슈트라우스의 작품만을 가지고 연주회를 열었다. 크라우쓰의 잘츠부르크 오케스트라는 마치 비엔나 필의 전통을 이어 받은 듯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완벽하게 연주하여 대환영을 받았다. 크라우스는 1933년까지 잘츠부르크에서 슈트라우스 연주회를 개최하였다. 크라우쓰의 잘츠부르크 연주회는 1939년부터 시작된 비엔나 필의 신년음악회의 기반을 마련해 준 것이었다.


비엔나신년음악회에서 '박쥐' 서곡을 지휘하는 클레멘스 크라우스 



크라우쓰는 1933년 비엔나의 직분들을 사임하고 베를린에 머물면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아라벨라(Arabella) 초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중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인 에리히 클라이버(Erich Kleiber)가 나치에 항의하여 음악감독직을 사임하자 1935년 클라이버의 후임으로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하였다. 당시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는 프리츠 부슈(Fritz Busch)였다. 그 역시 유태인은 아니었지만 나치의 반유태인 정책에 항의하여 지휘자를 사임하였다. 크라우쓰는 오랜 꿈이었던 베를린 필의 지휘자가 되었다. 크라우쓰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특히 1937년 뮌헨 국립극장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한 이후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더욱 가깝게 지내며 음악활동을 했다. 크라우쓰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위해 오페라 카프리치오(Capriccio)의 대본을 썼으며 1942년 뮌헨에서의 초연도 지휘하였다. 크라우쓰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평화의 날’(Friedenstag)과 ‘다나에의 사랑’(Die Liebe der Danae)의 초연도 지휘하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함께


크라우쓰는 2차 대전중 뮌헨 국립극장이 폭격으로 파손되자 비엔나로 돌아와 전쟁이 끝나기 직전까지 비엔나 필을 지휘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연합국측은 크라우쓰가 친나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947년까지 공개적인 연주회의 지휘를 하지 못하도록 제재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알려진 사실에 따르면 크라우쓰는 남모르게 유태인들의 베를린 탈출을 도왔다고 한다. 크라우쓰에 대한 연주 제재가 걷히자 그는 비엔나 신년음악회를 자주 지휘하며 요한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널리 소개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비엔나 사람들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클레멘스 크라우쓰는 1954년 멕시코시티를 방문중 세상을 떠났다. 그는 스위스의 에르발트(Ehrwald)에 안장되었다. 1985년에 세상을 떠난 부인 비오리카 우르술레아츠도 그의 곁에 함께 묻혀있다. 우르술레아츠는 남편 크라우쓰가 세상을 떠난해부터 30여년을 티롤지방의 에르발트에서 거주했다.    

 


클레멘스 크라우쓰와 부인 비오리카가 안장되어 있는 스위스의 에르발트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