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서울

배재학당(培材學堂)

정준극 2008. 6. 29. 17:00

배재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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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남아 있는 옛 배재학당 건물 (동관) 2008년 6월말 현재.  2009년 초, 이 건물은 배재학당박물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정말 뜻깊은 일이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의 배재학당 동관의 모습 

 

1954년 배재중학교에 입학해서 교가를 배울때 '참 별난 교가도 다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줄 알았더니 다른 아이들도 '어, 무슨 교가가 이래!'라면서 이상하게 생각했다. 다른 학교들의 전형적인 교가는 예를 들어 인왕산 기슭, 남산 줄거리, 푸르른 한강물이 어떠니로 시작하여 나라와 세계를 위한 건아가 되자는 등 자못 웅대한 사상을 심어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배재학당과 남매학교인 이화학당의 교가만해도 '한줄기 새빛이 동방에 비치니 무궁화 동산에 첫봄이 왔도다...'로 시작한다. 정말 의미심장한 가사이다. 그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런데 배재학당의 교가는 무슨 노래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노래하고 노래하고 다시 하자는 것이 내용이다. 게다가 가사에는 이상한 표현의 영어도 섞여 있다. 시스뿜바라는 단어이다. 모두들 그 단어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불러댔다. 배재교가는 1절밖에 없다. 그러나 '다 함께 교가 제창!'이라는 구호가 떨어지면 거의 의무적으로 반복해서 부른다. 아마 너무 짧기 때문에 반복이라도해서 시간을 벌자는 이유때문인것 같다. 배재교가의 가사는 배재학당을 설립하신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 박사가 지으셨다고 한다. 곡은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의 응원가 멜로디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배재학당도 교가를 응원가로 함께 쓰고 있다. 교가도 '우리 배재학당 배자학당 노래합시다...'이고 응원가도 '우리 배재학당 배재학당 노래합시다...'이다. 한번만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하고 노래하고 다시하자는 것이다. 이제 그 교가 겸 응원가를 소개해 보면,

 

"우리 배재학당 배재학당 노래합시다

 노래하고 노래하고 다시 합시다

 우리 배재학당 배재학당 노래합시다

 영원무궁하도록

 라라라라 시스뿜바 배재학당 시스뿜바

 라라라라 시스뿜바 배재학당 시스뿜바" 이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배재교가는 '노래하고 노래하고 다시합시다'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노래를 부르자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그저 아무 노래나  부르라는 뜻으로 해석할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설마 배재학당이 기독교학교이므로 찬송가만 계속 부르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배재학당이 노래만을 가르치는 음악전문학교가 아닌바에야 계속 노래만 하자고 강조하는 교가가 참으로 특이하지 않을수 없다. 그리고 그 시스뿜바라는 단어는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혹자는 호랑이가 포효하는 소리라고 설명해주었다. 하기야 배재학당을 상징하는 동물은 호랑이이다. 배재의 자랑인 럭비부나 축구부 선수들의 유니폼이 호랑이 가죽 처럼 줄무늬로 되어 있는 것도 배재를 상징하는 동물이 호랑이인데서 비롯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기로 호랑이는 '어흥-'하고 소리를 질렀으면 질렀지 시스뿜바(또는 시스푸마)라는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여 소리를 지르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혹시 미국 호랑이는 시스뿜바라고 소리지르는 것이나 아닐까? 그건 아닐 것이다. 시스뿜바라는 단어도 이상하지만 그 앞에 라라라라는 또 무엇인지 모르겠다. 라라라라는 노래가락을 즐겁게 흥얼거리는 표현이다. 그럼 호랑이가 즐겁게 노래가락을 흥얼거리며 시스뿜바라고 소리 지른다는 말인가? 교가의 내용도 별나고 가사중에 호랑이가 즐겁게 소리지른다는 내용의 시스뿜바라는 단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교가는 모든 배재인의 마음속에 영원히 각인되어 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영어로는 아펜젤러-노블 메모이얼 뮤지엄이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내부의 아펠젤러 목사님 모습과 교훈 '욕위대자 당위인역'의 표지판

외부의 안내판


한편, 교가와 관련한 에피소드를 굳이 소개한다면 어떤 점잖치 못한 학생들은 배재학당의 위대한 교가를 "우리 배재학당 이화학당 연애합시다.  연애하고 연애하고 다시합니다. 우리 배재학당 이화학당 연애합시다. 영원무궁하도록..."이라고 불러 공연히 듣는 사람들을 민망하게 만들기도 했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미국 북감리교 선교회가 함께 세운 학교이며 서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하고 있는 남매학교이다. 서울에는 감리교 학교로서 배화(培花)와 광성(光星)도 있지만 배화는 사직동에 있고 광성은 서강에 있을뿐만 아니라 배재나 이화만큼 연륜과 연혁이 두드러지지 못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배화는 미국 남감리교단이 1898년 설립했고 광성은 원래 평양에서 1894년 설립되었다가 사변후 서울로 옮겨진 학교이다. 장로교 학교로는 정신(貞信)과 경신(儆新)이 있다. 하지만 배재와 이화처럼 바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조 황실에 의해 세워진 학교로는 양정, 휘문, 진명, 숙명이 있다. 하지만 같은 가문이지만 역시 서로 떨어져 있어서 내왕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배재와 이화는 달랐다. 운동장에서 노래부르는 소리까지 잘 들릴 정도로 옆집에 위치하고 있었다. 정동교회에서 배재-이화 연합예배를 드리는 경우고 많았고 두 학교가 협동하여 행사를 진행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 더구나 배재학당을 설립하신 아펜젤러 목사님의 따님이 이화학당 교장 선생님을 맡아 한 일도 있고 이화학당 역사상 유일한 남성 교장 선생님인 신봉조 선생님은 배재 출신이었다.  

 

옛 배재학당 자리에 있는 '배움의 전당' 조형물. 7개의 십자가를 표현한 것은 하나님이 7일간 천지창조를 하신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튼튼한 반석 위에 우뚝 솟은 십자가형의 기둥은 빛나는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21세기를 향해 날아오르는 배재의 힘찬 날개짓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천지를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 째는 안식하시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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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는대로 배재학당이라는 말은 배양영재(培養英材)라는 말을 줄인 것이다. 영재를 배양한다는 뜻이다. 1886년 6월 8일 고종황제께서 배양영재라는 교명을 하사하시고 배양영재라고 쓴 친필 현판을 아펠젤러 목사님에게 내리셨다. 고종황제의 친필 현판은 내가 학교 다닐 때 강당에 걸려 있었다. 돌이켜보아 아펠젤러 목사님은 1885년 6월 8일에 정동의 어떤 기와집을 구입하여 그곳에 학교를 설치하였으나 특별한 학교이름은 없었다. 그러다가 그해 8월 3일 고종황제께서 친히 배양영재라는 교육이념의 말씀을 하사하시자 그 4자성어를 배재라고 줄여서 그대로 교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1886년 6월 8일이 배재학당의 개교기념일이지만 8월 3일을 개교기념일로 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배재학당의 교훈도 별나다. 다른 학교들 같으면 예를 들어 '정직하자, 참되거라, 진리를 추구하자...'등등의 거룩한 단어가 들어가는 것이 통상이다. 배재학당의 경우는 한문지식이 있어야 읽을수 있는 한자성어로 되어 있다. 욕위대자 당위인역(慾爲大者 當爲人役)이다. 마치 서당에서 가르치는 천자문의 귀절 같지만 실은 신약성경 마태복음 20장 26-28절의 말씀으로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라'(Whoever would be great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는 구절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배재학당에 입학한 어린 학생들은 일단 이 한문귀절부터 열심히 암기해야 했다. 욕위대자는 당위인역이라! 이것이 배재교육의 목적이며 이상이다. 사족이지만, 한 집안인 이화학당의 교훈은 '자유 사랑 평화'의 세 글자이다. 그래서 이화 교복의 하얀 칼라에 선이 세개 들어가 있었다.  

 

배재공원에 있는 배재 상징 문장. 방페에는 배재의 ㅂ과 ㅈ의 글자가 들어 있으며 태극 모양의 원에는 Paichail의 P와 C가 들어 있다. 또한 방패 속의 세개의 공간은 삼위일체를 의미한다. 방패는 악의 세력과 싸우는 십자가 군병들을 상징한다.

               

기왕에 얘기가 나온 김에 이화학당에 대하여 조금 더 부연하자면, 이화학당의 교명은 1887년 명성황후께서 친히 내리신 것이다. 그로부터 이화학당이라는 공식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원래 이화학당은 1886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튼(Mary Scranton) 부인이 지금의 정동인 황화방(皇華坊)의 어느 집에 방을 마련하여 여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 그러다가 왕비(명성황후)로부터 친히 교명을 하사받자 이화학당이라는 명칭을 정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화학당의 설립년도는 배재학당보다 한해 늦은 1887년이다. 황화방 자리에는 배나무가 많아서 봄이면 배꽃이 만발했다고 한다. 왕비(명성황후)께서는 조선의 여성들이 신교육을 받아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에서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내리셨다고 한다. 일설에는 경복궁에 있는 이화당(梨花堂)의 이름을 따서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하셨다고도 한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개교 기념일에 대하여는 배재학당이 1885년 8월 3일, 이화학당이 1886년 5월 31일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배재학당은 고종황제께서 교명을 내리신 1886년 6월 8일을, 이화학당은 명성황후께서 교명을 내리신 1887년 5월 30일을 개교기념일로 삼고 있다. 어쨋든 이화학당은 배재학당보다 한해 늦게 문을 열었다.  

 

배재공원에 있는 조형물


정동이라는 명칭은 정릉(貞陵)이 있던 곳이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정릉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묘소였다. 태조는 고려시대의 풍습에 따라 향리(鄕里)와 개경(開京)에 향처와 경처를  각각 두었는데 강씨는 경처였다. 강씨는 조선 개국과 함께 1392년에 현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다가 1396년(태조5년)에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자 시호를 신덕왕후라고 하고 능호를 정릉이라 하였다. 신덕왕후 강씨는 태조가 극히 총애하던 왕비였다. 태조는 강비 소생의 아들로 대를 잇고자 했으나 이방원에 의해 좌절되었다. 신덕왕후의 시신은 세상 떠난 이듬해인 1397년 당시 한성부 서부의 황화방(현재의 중구 정동)에 예장하였다. 능호는 이미 정해 놓은 대로 정릉이라고 했다. 그래서 정동이라는 이름이 생겨났으며 미국에서 조선에 파견한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트 부인이 그 황화방에 집을 구하여 이화학당을 시작한 것이다.    

 

옛 배재학당 운동장에 조성된 배재공원 입구.

 

배재공원은 정동교회와 옛 배재학당 사이에 조성된 공원으로 우리나라 신교육의 발상지이며 신문화의 요람지인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배재학당을 미국 식민교육의 발상지라고 비하하여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참으로 몰지각한 언급이 아닐수 없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일제 식민 시대에 항거하는 대한독립운동의 요람이었으며 애국지사들을 배양한 교육기관이다. 1895년에는 독립협회가 이곳에서 태동하였고 독립신문도 발간되었다. 배재공원은 작은 공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신문화, 신교육의 발상지 답게 몇개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배재학당 터가 동시에 남궁억 선생의 집터였다는 기념비이다. 남궁억 선생은 찬송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의 가사를 만드신 독립운동가이시다. 남궁억 선생은 일제시대에 무궁화 보급운동을 벌여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무궁화를 우리나라 국화처럼 존중하는 것은 남궁억 선생의 공로이다. 배재학당은 1897년에 맨손체조를 비롯해서 각종 구기운동을 처음 시작한 곳이다. 말하자면 우리나라 근대 체육의 산실이었다. 배재중-고등학교는 1984년에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동에는 더 이상 배재의 교육이 실시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누가 무어라해도 배재학당 자리는 우리나라 근대 역사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역사현장이 아닐수 없다. 이 역사 현장을 길이 보존하고자 코오롱걸설 주식회사와 체이스맨하탄 은행이 배재공원을 조성하여 1984년 2월 28일에 서울시에 기증하였다.

 

 배재학당터, 남궁억 집터 기념비. 그런데 2018년 5월에 찾아가보니 기념비가 없다. 어디다 두었을까?

 

배재대학은 대전에 있다. 배재대학이 세워지게 된 것은 1956년 이승만 대통령께서 배재학당 개교기념식에 참석하시어 '배재대학을 세우라'라고 말씀하신데 따른 것이다. 처음에는 수유리 방면에 배재대학을 세우려 했으나 4.19와 5.16등의 변화 때문에 지지부진하였으며 결국 대전으로 터전을 확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옛 배재학당이 있던 자리 옆의 부지를 배재재단이 매입하여 이곳에 배재대학교가 사용하는 큰 빌딩을 건축하였으니 배재빌딩이다.

 

배재 75회 동창생들과 함께. 왼쪽부터 김주환 전 배재교목, 황방남 배재 재단이사장 겸 배광교회 담임목사, 필자 정준극, 배용재 전 수원삼일학교 교장. 2015년.


측면에서 본 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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