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천교 고금(古今)
지금은 회현동쪽에서 만리동을 거쳐 공덕동으로 가려면 서울역 위에 걸쳐 있는 고가도로를 이용해도 되지만 예전에는 남대문이나 서울역 쪽에서 만리동이나 공덕동 방향으로 가려면 염천교를 지나야 했다. 염천교는 남대문이나 순화동 방향에서 중림동 약현 쪽으로 건너가는 다리이다. 염천교라고 해서 혹시 냇갈이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수 있지만 다리 아래에는 냇물이 아니라 기차 선로들만 널려있다. 1960년대 초반만해도 석탄기차였기 때문에 기차들이 염천교 아래를 통과할 때에는 화통에서 연기가 펑펑 쏟아져 나왔다. 그러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기겁을 하고 잠시 얼굴을 숙이고 숨을 멈추어야 했다. 염천교는 한문으로 원래 鹽川橋라고 하는데 쓰기는 塩川橋라고 쓴다. 염천이란 말을 글자그대로 해석하면 소금내이다. 어떤 연유로 이곳을 염천이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설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서울에는 현재의 을지로 5가 방산시장 부근에 염천교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나라의 화약을 만드는 관청인 염초청(焰硝廳)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인근에 있는 다리에 염천교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는 것이다. 염초청이 있었기 때문에 주변 지역에 간혹 화약으로 인한 연기가 자욱했을 것이다. 그 염천교가 철거되자 남대문에서 중림동 약현으로 가는 새로 만든 다리에서도 기차 연기가 많이 나기 때문에 염초청 인근의 연기를 상기하여서 염천교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또 하나의 주장에 따르면 지금의 서대문 넘어 무악재 방향에 실제로 염천교(鹽川橋)가 있었는데 일찍이 철거되었는바 남대문이나 순화동 방향에서 중림동 약현, 그리고 만리재 방향으로 건너가는 구름다리를 세울 때 무악재 근처에 있다가 없어진 다리 이름을 빌려와 염천교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옛 염천교는 인왕산 무악재 부근에서 시작되어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던 무악천 위에 놓였던 다리라고 한다.
염천교 표지
1960년대 초반, 염천교 한쪽에는 구두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지금도 염천교 구두거리는 간판을 내걸고 있으며 특히 기성화가 판을 치는 마당에 수제화로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농담이지만 이런 얘기가 있었다. 서울시내의 음식점이나 예배당에서 잃어버린 구두는 염천교에 오면 찾을수 있다는 얘기였다. 당시에는 구두도 큰 재산이라고 생각했던지 벗어놓은 구두를 누가 작심하고 집어가기 때문에 잃어버리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나중에 염천교 구두거리에 가서 자세히 살펴보면 잃어버린 자기 구두를 찾을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만큼 염천교 구두거리는 신사화, 숙녀화, 군화 등등 별별 구두가 모여 있는 구두 전시장이었다. 옛날에는 ‘구두 고치셔~’라고 소리치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조그만 나무 가방에 구두 고치는 도구를 넣고 다니며 구두창도 갈아주고 떨어진 곳도 꿰매어 주며 구두징도 박아주던 사람들이었다. 구두 창에 징을 박는 것은 구두를 오래도록 신기 위해서였지만 어떤 사람들은 징을 박은 구두를 신고 다닐 때 철컥철컥 하는 징소리를 자랑하느라고 일부러 징을 박고 다니기도 했다. 요즘에는 징커녕 징의 사둔의 팔촌도 구경하기 힘들다.
염천교에는 구둣가게들이 많았기 때문에 구두 고치러 다니는 사람들도 이곳에 많이 몰려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마 부품을 구입하기 위해서인듯 싶다. 미안한 말이지만 구두 고치러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형무소에서 직업훈련을 받고 나와 생계의 수단으로 구두를 고치러 다니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런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잘곳이 없어서 염천교 다리 밑에서 기거하는 경우도 있었다. 염천교 다리 밑에는 종이 줍는 사람들도 기거하였다. 큰 광주리를 짊어지고 집게를 들고 다니며 종이라고 보이는 것은 모두 집어서 나중에 정리하여 파지로 팔던 사람들이었다. 구두고치는 사람들은 '구두 고치셔~'라고 소리치며 다녔지만 종이 줍는 사람들은 아무 말도 없이 풀풀 돌아 다니기만 했다.
아직도 수제화 구두로 이름나 있는 염천교 구둣방 거리
말 안 듣는 아이들에게 어머니가 말해주는 단골 메뉴가 있다. ‘야, 이놈아, 넌 염천교 다리 밑에서 주워 왔어! 그러니까 말 안 들으면 염천교 다리 밑에 다시 데려다 줄테야!’라는 말이었다. 그러면 아무리 말 안 듣던 아이들도 단숨에 조용하였다고 한다. 말 않듣는 아이들에게는 염천교 다리가 염라대왕과 같았을 것이다. 휴전 후부터 1960년대에 초반에 걸쳐 염천교 다리 밑에는 무작정 가출소년들이 많이 기거하였다. 서울역이 옆에 있었던 것도 좋은 이유였을 것이다. 혹가다가 자식이 없는 사람들은 그중에서 아무나 데려다가 기르는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염천교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얘기가 생긴 것같다. 1970년에 분신자살한 노동운동가 전태일도 한때 식구들과 함께 염천교 다리 밑에서 잠을 자고 만리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동냥으로 연명했었다고 한다. 염천교가 거지 소굴의 대명사처럼 된 것은 TV 드라마 ‘왕초’에서 거지왕 김춘삼이 염천교 다리 밑에서 잠시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거지왕 김춘삼이 실제로 지냈던 곳은 청계천 5가 지금의 방산시장 근처에 있었던 염천교였다고 한다.
1960년대 초반, 염천교 일대로부터 서울역까지의 걸거리에는 소규모 노점상들이 많았다. 야산에서 뜯어서 삶아 말린 취나물이나 고사리나물을 파는 할머니, 김밥이나 떡을 파는 아주머니, 빗이나 옷핀이나 바늘을 파는 아저씨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런 중에도 염천교 쪽에는 이른바 토속약재를 파는 할아버지들이 간혹 있어서 일종의 몬도가네식 구경꺼리가 되었다. 말린 지네를 산적처럼 대꼬치에 매어 팔았고 페니실링병에는 말린 지네를 가루로 만들어 넣어 팔았다. 가장 이상하고 꺼림직 했던 것은 병에 담은 살아 있는 도룡룡 알이었다. 마치 작은 단추들을 길게 매단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유리병 안에서 흐느적거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메슥해 진다. 그런 도룡룡 알을 먹으면 속병에 좋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불개미를 사발에 수북이 쌓아놓고 파는 사람도 있었고 개구리 말린것, 장수풍뎅이 죽은 것, 누에고치 말린 것 등등 별별 것이 다 있었다. 아마 번데기도 염천교 일대가 원조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본다. 아무튼 이상하다 못해 괴이하기까지 한 그런 토속약재들을 사가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과연 그런 동물 및 곤충들을 복용하고 어떤 효험을 보았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보다도 더 궁금했던 것은 도대체 그 많은 지네와 도룡룡 알을 어디서 구해 왔을까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지네에 물리면 약도 없다는데! 그러면 지금은? 염천교 확장공사가 있었다. 그리고 서울역의 손님들을 기다리는 택시들이 염천교까지 길다랗게 늘어서 있다.
서울역에서 염천교로 가는 길. 지금은 깨끗이 단장되어 있으나 예전에는 별의 별 토속약재들을 많이 팔았던 곳이다.
(2008년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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