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서울

만리동 고개

정준극 2008. 7. 3. 07:14

만리동 세시기

 

집이 어디냐는 질문에 ‘만리동이지요’라고 대답하면 열이면 대여섯은 ‘만리동? 만리동이 어디지?'라며 모른채 하면서도 '아하, 만리나 되는 경장히 먼데 사는 모양이네!’라고 농담조로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만리포 해수욕장은 알겠는데 만리동은 또 어디지?’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울 살면서도 말죽거리와 같은 변두리 신개발 지역에만 살았던지 만리동이 어딘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아, 그 뭐야, 만리재에 살고 있다는 말이지?’라고 말하는 분은 서울에 오래 살았던 분일 것이다. 만리동은 서울역 뒤편에서 공덕동, 마포로 넘어가는 곳에 있다. 고개 길이기 때문에 만리현(萬里峴)이라고 했으며 우리말로 만리재라고 불렀다. 만리동에는 아직도 만리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집들이 있다. 만리현교회가 대표적이다. 나는 만리현교회 바로 옆집에 살았었다. 나는 관상대 뒤편 홍파동에서 살다가 1963년부터 1969년까지 6년동안 서울역 뒤편에 있는 만리동으로 이사 와서 살았다. 만리동에서 지내는 동안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국민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대 복무도 완수하였다. 나는 만리동에서 6년여를 살았지만 2008년 현재까지 만리현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므로 나와 만리동은 올해로서 45년의 인연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서부역 쪽에서 바라본 만리동 고개길

 

만리동이라는 명칭은 만리현(만리재)이라는 고개에서 유래했다는 주장과 옛날에 최만리라는 유학자가 이곳에 살았기 때문에 만리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만리재라는 이름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고개를 넘어 가는 길이 만리처럼 길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조선시대에는 만리재 고개를 사이에 두고 양편 주민들이 심심풀이 편싸움을 벌여 구경꺼리 였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공덕동 너머에 마포형무소가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라고 하는 마포아파트 자리가 바로 마포형무소 자리였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수많은 독립인사들이 고초를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마포형무소에도 일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많이 붙잡혀 들어가 있었다. 멀리 시골에 살고 있는 젊은 아낙네가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남편을 만나보기 위해서는 서울역에서 내린후 만리재를 넘어 가는 길이 지름길이었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시골 살림에 그나마 찹쌀 됫박을 변통해서 인절미를 만들어 머리에 이고 갓난장이는 등에 업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남편을 면회하러 가는 아낙네의 발길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뿐만 아니라 멀기도 먼 길이었을 것이다. 마치 만리길을 걷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만리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명이다.

 

양정입구의 육교 . 2017년 9월에 철거되었다.


최만리(崔萬理)가 이곳에 살았었기 때문에 그를 생각하여 만리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최만리의 이름은 한문으로 萬理라고 쓰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하다. 최만리는 조선 세종조의 대학자로서 집현전 부제학이었다. 최만리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코자 하자 이를 한사코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려 결국 파직당하고 귀향하게 된 인물이다. 최만리는 공연히 한글창제를 반대한 인물이었지만 당대의 대유학자이며 청백리였기 때문에 그나마 존경을 받았다. 지금 만리동에는 최만리가 살았었다는 어떠한 자취도 남아 있지 않다. 최만리 선생의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지곡리에 있으므로 관심있는 분들은 한번 가 보시도록!


서부역 쪽에 있는 고가차도. 만리동 초입이다. (후기: 남대문시장 쪽에서 만리동, 공덕동으로 넘어가는 고가차도는 2016년에 남대문 시장 상인들과 일대 주민들의 심각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주장으로 철거하여 시민들의 피와 땅인 숱한 세금을 들여 무슨 공원으로 만들었다.) 

 

종전후 서울에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지역이 많았다. 만리동도 그 중의 하나였다. 비가 오는 날에는 염천교 다리를 지나서 서울역 뒤편에서부터 만리동 고개까지 올라가는 길이 온통 진흙탕이었다. 그래서 만일 구두나 운동화를 신고 나갔었다고 하면 흙탕길에 빠지는 바람에 신발 속의 양말까지 온전치 못했다. 어떤 사람은 신발이 진흙에 떡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바람에 발만 빠져 나와서 낭패를 본 경우도 있다고 했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만리동 길은 좁은 골목길이었다. 요즘의 카니발보다 작은 승합차들이 서로 겨우 통과할 정도의 좁은 길이었다. 좁은 길인데다가 진흙탕 길이었으니 당시 만리동에 살았던 사람들의 출퇴근 고통은 보통이 아니었다.

 

만리동 고개길. 지금은 몇배나 넓어졌지만 1960년대에는 자동차 두대가 겨우 비집고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이었다.

 

1960년 초반에 서울역 쪽에서 만리동 고개로 올라가자면 양정입구 못미쳐에 공장처럼 생긴 커다란 벽돌건물이 있었다. 지금은 현대식 고층 빌라가 들어 서있는 자리이다. 광명인쇄소라고 기억된다. 일설에 의하면 5.16군사혁명 때에 이 인쇄소에서 ‘우리는 반공을 국시로 삼고...’로 시작하는 혁명공약을 비밀리에 미리 찍어 놓았다고 한다. 만일 군사혁명의 기운이 사전에 발각되고 혁명공약을 인쇄해 놓았다는 것이 알려지면 큰일이므로 광명인쇄소에서는 소수의 몇사람만이 밤샘 작업으로 혁명공약을 인쇄했으며 날이 밝자 순식간에 배포하여 혁명의 당위성을 알렸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혁명이후 광명인쇄소는 혁명정부의 보살핌으로 꾸준히 성장하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광명인쇄소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아파트(The Ville)


광명인쇄소 자리를 조금 지나 오른편 골목길로 접어들면 봉래초등학교 옆에 양정학교가 있었다. 양정학교는 진작 목동으로 이전하였고 지금은 손기정공원과 손기정체육관, 그리고 손기정공원 주차장이 자리 잡고 있다. 손기정공원은 양정출신으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으로 금메달을 받은 손기정 선수를 기리기 위한 공원으로 손기정월계관수라는 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서울시지정 유형문화재이다. 손기정공원에는 손기정 선생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하필이면 양정을 봉래동 골목길에 세웠을까? 비오는 날의 진흙길을 수많은 양정학생들이 통학했을 것을 생각하면 ‘힘들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양정입구에서 한참 올라가 만리동 고개에서 효창공원으로 빠지는 길로 들어서면 배문학교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지만군이 배문중학교에 배정받아서 입학하자 청와대로부터 배문학교까지의 통학을 원만히 하기 위해 만리동 고개로부터 배문학교 입구까지가 당장 아스팔트 포장이 되었다고 하며 이에 따라 만리동 길도 어느 정도 정비되었다고 한다. 그후 계속 도시계획 사업이 추진되어 지금은 왕복 6차선의 대로가 되었으니 상전벽해이다.

 

 손기정공원의 손기정 기념상 

손기정 기념상 하단의 부조. 베를린 올림픽에서의 영광의 순간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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