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서울

정동교회

정준극 2008. 6. 29. 17:01

정동교회/이화학당/덕수궁 돌담길

  

 

정동교회 옛건물

 

정동감리교회(정동제일감리교회)와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뗄래야 뗄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배재학당, 정동교회, 이화학당은 모두 중구 정동(貞洞)에 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정동교회가 정동 31번지, 이화학당이 정동 32번지, 미국인 선교사 사택이 정동 33번지, 그리고 배재학당이 정동 34번지였다. 선교사 사택은 정동교회의 뒷편,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의 사이에 두채가 있었다. 배재학당은 고덕동으로 이사갔지만 정동교회와 이화학당은 옛 자리에 그대로 있다. 배재학당 자리에는 배재빌딩과 배재대학교 빌딩이 들어서 있으며 옛 배재학당 건물중에서 동관(東館)만이 서울시 사적지로 지정되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배재학당에는 1900년대 초반에 건설된 서양식 벽돌건물인 동관, 서관, 그리고 강당이 있었다. 그중 서관은 고덕동 배재고등학교로 옮겨졌으며 강당은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배재빌딩이 들어섰다. 그리고 동관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남아 있으며 현재 배재학당기념관이다. 정동교회는 1897년에 준공한 옛 건물이 역시 서울시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정동교회는 옛 교회 건물 옆에 새로운 예배당을 지어 봉헌하였다. 이화학당은 옛 정문만이 보존되어 있으며 학교 구내에는 옛 교사건물을 복원하여 놓았다. 모두가 귀중하고 아름다운 문화유산이다. 오늘날 배재학당과 정동교회 사이에는 배재공원이 조성되어 우리나라 신문화와 신교육의 발상지가 이곳이었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나는 배재학당 졸업생인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신교육의 발상지 기념비(아래의 그림은 배재학당 뱃지)

 

나는 1954년에 배재중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60년에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인 배재학당은 2008년으로 123회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배재학당은 수많은 애국지사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하였다. 나는 특히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신 이승만 박사께서 나의 선배이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동교회 장로이셨다. 나는 배재중학교 1, 2학년때에 간혹 정동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본 일이 있다. 그때에 이승만 대통령께서는 영부인이신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회중석 맨 앞에 앉으시어 예배를 보셨다. 나의 선배이신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정동교회에서 예배를 보았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감격적인 일이다. 사변후의 어려운 처지여서 교회들도 겨울에 난방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이승만 대통령 내외분께서 참석하시는 정동교회는 예배시간에 난방이 잘 되어 훈훈하였다. 주일이면 아침부터 미군부대에서 난방을 담당하는 차량들이 와서 교회 안에 훈훈한 바람을 불어 넣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겨울에 그렇게 따듯하게 예배를 볼수 있는 것이 너무 좋아서 나는 비록 어린 학생이었지만 기회만 있으면 정동교회에 가서 주일 예배를 보았다. 예배가 끝나면 이승만 대통령 내외분께서는 천천히 떠나시며 주변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시거나 약간의 담화를 나누셨지만 나는 어린 학생이었기 때문에 한번도 가까이 접근하여 얼굴을 뵌적이 없다. 하지만 먼발치에서 존경의 박수는 보냈다.   

 

정동교회 초대 목사님이시며 배재학당 창설자이신 아펠젤러 목사님(1858. 2. 8-1902. 6.11) 흉상. 아펜젤러 목사님은 1902년 6월 2일 목포 앞 바다에서 배를 타고 가시는중 그 배가 다른 배와 충돌하여 침몰하게 될 때에 어떤 조선인 소녀를 구하시고 자신은 목숨을 잃으셨다. 세상에 그렇게 거룩한 사랑이 또 어디 있겠는가? 아펜셀라 목사님은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잠들어 계시다.

  

정동교회와 배재학당은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게어하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목사님이 처음으로 설립하셨다. 이화학당은 아펜젤러 목사님과 마찬가지로 미국 북감리교 선교부에서 파견한 메리 스크랜튼 여사가 조선 여인 1명을 가지고 시작한 학교였다. 그 1명의 여인은 어떤 고관의 여식으로 영어를 배워 명성황후의 통역관이 되려고 스크랜튼 여사의 학생이 되었으나 3개월쯤 지내다가 그만 두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여인이야말로 이화학당 최초의 학생이었다. 아펜젤러 목사님은 한국에 발을 디디자 마자 선교의 중요성을 생각하시어 1885년 7월 정동에 마련한 자택의 방하나를 정리하여 벧엘 예배당이라고 이름 붙이고 교인들을 초청하여 예배를 보았다. 그해 10월 11일, 아펜젤러 목사님은 벧엘 예배당에서 한국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에게 세례를 베풀어 주셨다. 정동교회는 이 뜻깊은 날을 교회창립일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배재학당은 1885년 10월에 문을 열었지만 이듬해인 1886년 6월 8일 고종황제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아 정식 학교로서 인정을 받았다. 그러므로 매년 6월 8일은 배재학당 창립일로 기념하고 있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에는 이승만 대통령께서 창립기념행사에 친히 참석하시어 배재학당의 명예를 크게 높이어 주셨다. 그러면 우리는 넓은 운동장에 질서정연하게 줄을 맞추어서 대기하고 있다고 이승만 대통령 내외분께서 스탠드에 나타나시면 박수를 쳤다.

  

 정동길에 있는 이화학당 옛 정문

 

나는 중학교 다닐 때에 집이 장충단 고개 넘어 약수동에 있었다. 그러므로 정동에 있는 학교에 다니려면 약수동에서 장충단 고개를 넘어 을지로 6가까지 걸어나와서 전차를 집어타고 남대문에서 내려 순화동을 거쳐 학교에 가거나 또는 약수동 삼거리에서 버스를 타고 시청 앞까지 와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법원 앞을 거쳐 학교로 갔었다. 약수동에서 을지로 6가까지는 상당한 거리였기 때문에 아침에는 주로 콩나물 버스를 이용했고 방과후 집에 올 때에는 주로 전차를 이용하여 을지로 6가까지 와서 약수동까지 걸어갔다. 버스를 타고 시청앞에서 내려 학교를 갈 때에는 당연히 덕수궁 돌담길을 거쳐 갔다. 가을에는 덕수궁 안에 있는 은행나무의 노란 잎이 풀풀 떨어져 한결 운치가 있는 길이었다. 일부러라도 걷고 싶은 덕수궁 돌담길을 나는 몇년씩이나 발이 아프게 걸어다녔다. 운치고 뭐고를 생각하는 것은 사치였다. 주머니에 버스비가 없을 때에는 학교에서부터 약수동 집까지 걸어 다닌 날도 많았다. 을지로 입구 반도호텔 앞을 거쳐 을지로 4가 국도극장을 지나 을지로 5가 메디칼 센터 앞까지 오면 실은 아직도 멀었지만 그래도 집에 다 온것 같았다.  


 덕수궁 돌담길

정동교회 앞 삼거리의 분수. 언제 세웠는지 모르지만 서구적인 인물들의 분수이다.

장독대. 조부모, 부부, 아이들의 3대가 함께 사는 가정을 장독대의 장독들로 표현하였다. 이환권 작품. 작가는 친구의 가정을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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