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외서의 세계/구약시대의 경외서

유디트 더 알기

정준극 2008. 9. 2. 04:01

유디트 더 알기


오래전에 비엔나의 벨베데레(Belvedere)궁전에 있는 오스트리아 갤러리(Österreichische Galerie)에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유디트’를 처음 보고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가 그림의 유디트가 어떤 남자의 머리를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하, 이 유디트가 바로 그 유디트로구나!’라며 자못 잠시 감회에 빠졌던 일이 있었다. 그림의 여인은 분명히 현대적 모습이었다. 머리 스타일도 그렇고 입고 있는 옷의 디자인도 그러했다. 하지만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쥐고 있는 유디트의 모습에서는 시대를 초월한 의연함이 보였다. 클림트는 유태계였다. 그런 그가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애국자 유디트를 작품의 주제로 삼은 것은 도무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클림트의 유디트                                    크리스토파노 알로리의 유디트

 

이스라엘의 애국여인인 유디트를 주제로 한 예술 작품은 생각 외로 많이 있다. 아름다운 유디트가 흉폭한 적장 홀로페르네스(Holofernes)의 머리를 들고 있는 장면은 수많은 화가들과 조각가들이 주제로 삼을만한 것이 아닐수 없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는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 크리스토파노 알로리(Christofano Allori)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쥐고 있는 유디트’도 유명하다. 이밖에 카라바지오(Caravaggio), 보티첼리(Botticelli),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조르지오네(Giorgione), 루카스 크라나하(Lucas Cranach), 티티안(Titian), 호레이스 베르네(Horace Vernet), 아르테미시아 겐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얀 샌더스 반 헤메쎈(Jan Sanders van Hemessen), 헤르만-파울(Hermann-Paul)등의 유디트를 주제로 하여 작품들을 남겼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틴 성당의 천정에 유디트를 주제로 한 여러 프레스코를 남겨 놓았다.


초서(Geoffrey Chaucer)는 유명한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에 나오는 ‘수도승의 이야기’(The Monk's Tale) 편에 머리가 잘린 홀로페르네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문학에서는 유디트에 대한 이야기가 독재에 항거하는 백성들의 용기를 표현한 주제였다. 지금은 크로아티아공화국의 지방인 달마티아(Dalmatia)의 저명한 작가인 마르코 마룰리치(Marko Marulic: 1450-1524)는 유디트에 대한 스토리를 ‘유디타’(Judita)라는 타이틀로 재편성하여 소설로 펴냈다. 그후 이 소설은 오토만제국에 항거하는 크로아티아 백성들에게 애국적인 용기를 불어 넣어 준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아브라함 골드파덴(Abraham Goldfaden)과 영국의 프리드리히 헤벨(Friedrich Hebbel)은 유디트를 주제로 한 연극을 썼다. 이탈리아의 파올로 자코메티(Paolo Giacometti)는 ‘쥬디타’(Giuditta)라는 타이틀의 희곡을 썼다. 야콥 팔보비치 아들러(Jacob Palvovitch Adler)는 ‘유디트’라는 오페레타를 작곡했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세로프(Aleksandre Serov), 프랑스의 아르투르 오네거(Arthur Honegger), 역시 프랑스의 필립 훼느롱(Philippe Fenelon: 1952-)은 각각 ‘유디트’라는 제목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알레싼드로 스칼라티(Alessandro Scarlatti)는 1693년에 오라토리오 La Giuditta를 작곡했고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는 1716년에 오라토리오 Juditha triumphans를 작곡했으며 모차르트는 15세이던 1771년, 유명한 메타스타시오(Metastasio)의 대본으로 La Betulia Liberata(베툴리아 해방)라는 오라토리오(당시에는 Azione Sacra라고 부름)를 작곡했다.  모두들 유디트를 주제로한 내용이다. 이러한 유디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가?


유디트는 예루살렘 인근의 베툴리아(Bethulia)성에 살았던 여인이다. 베툴리아성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만일 페툴리아성이 적군에게 함락된다면 그것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 땅이 함락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유디트는 이스라엘 군대의 용맹스런 전사(戰士)인 남편이 전사하자 재혼의 유혹을 물리치며 하녀와 함께 살고 있었다. 유디트는 아름답고 정숙하며 경건한 여인이었다. 그 때에 앗수르(아시리아)의 느브갓네살(Nebuchadnezzar: 이탈리아어로는 나부코) 왕이 홀로페르네스(Holofernes) 장군에게 명하여 페툴리아성을 함락토록 하였다. 페툴리아는 지극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예루살렘과 온 이스라엘 땅이 적군의 발에  짓밟히게 될 운명이었다. 베툴리아의 백성들은 강대하고 횡폭한 홀로페르네스 장군에게 대항할수 없으므로 성문을 열고 항복하자고 주장했다. 다만, 제사장만이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려 보자고 주장할 뿐이었다. 이러한 때에 유디트가 자원하여 적진에 들어가 홀로페르네스 장군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여 그가 술에 취하여 잠든 틈에 그의 목을 잘라 베툴리아 성으로 돌아왔다. 혼란에 빠진 앗수르 군대는 퇴각하였고 이스라엘은 유디트의 헌신적인 행동으로 자유를 얻게 되었다. 유디트는 평생을 미망인으로서 살았다. (유디트의 활동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본 블로그의 ‘오페라 추가 100선’을 참고하시기 바람)


유디트에 대한 이야기는 ‘유디트서’(The Book of Judith)에 담겨 있다. ‘유디트서’는 유태교가 제2의 정전(正典: Deuterocanon)중 하나로 삼고 있는 것이다. ‘유디트서’는 주전 270년경 완성된 최초의 그리스어 성서에 포함되어 있다. 최초의 그리스어 성서는 70인 유태교 대표자들이 모여 그때까지 정리되어 있지 않던 히브리어 성서들을 처음으로 정리하여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를 셉튜어진트(Septuagint)라고 부른다. 이렇게 그리스어로 번역된 히브리어 성서들중 다시 일부를 정리하여 정전으로 삼았으며 나머지는 경외서, 또는 제2의 정전으로 삼았다. 나중에 기독교는 유태교의 정전들을 다시 정리하여 구약성서로서 채택하였다. 그러므로 ‘유디트서’는 오늘날 유태교와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구약성서에는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유디트서’의 중요성에 비추어 로마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구약성서에는 포함되어 있다. ‘유디트서’가 유태교와 기독교의 구약성서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유디트서’의 스토리가 시대적으로 여러 차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당수 학자들은 ‘유디트서’의 내용을 ‘신뢰하지 못할 역사’로 보고 있으며 다만 비유적인 내용으로 간주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유디트서’를 성서라기보다는 최초의 역사소설이라고 보고 있다. 


유디트(Judith)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예후디트(Yehudit)라고 부르며 아랍어로는 야후디트(Yahudit)라고 부른다. 나중에 라틴어에서는 유디트를 쥬디타(Giuditta)라고 불렀다. 유디트라는 이름은 ‘찬양하는 자’(Praised) 또는 단순히 유태여인(Jewess)라는 뜻이다. 유디트라는 이름은 유태인들 사이에서 미리암이나 라헬, 사라, 레아 등과 함께 가장 흔한 이름이다. 유디트의 남성형은 유다(Judah)이다.


‘유디트서’는 유태 애국주의를 고취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리 어렵고 긴급하더라도 모세의 율법을 고수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담고 있다. 즉, 환난 중에 여호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면 응답해 주신다는 것이다. 메시지는 그렇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한편의 드라마틱한 소설이다. 읽어내려 갈수록 스토리가 긴박하게 전개되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유디트서’는 역사 이야기이므로 시기와 장소가 분명하게 나와 있다. 앗수르(Assyria)의 느브갓네살(Nebechadnezzar) 왕이 니네베(Nineveh)에 도읍을 정하고 제국을 통치하던 12년째 라고 되어 있다. 느브갓네살 왕에 대한 이야기는 구약성서 ‘에스더’와 ‘다니엘’에도 등장한다. 그러므로 유디트가 활동했던 시절이 느브갓네살 왕의 시대였다는 것은 시대적으로 착오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디트서’의 첫머리에 나와 있던 ‘니네베에서 앗수르를 다스리던 느브갓네살 통치 12년에’라는 말은 나중에 유태 역사학자들이 ‘유디트서’의 첫머리를 ‘옛날 옛적에’(Once upon a time)라고 바꾸었다. 유디트의 이야기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어느 시기에 있었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기 때문이었다.


‘유디트서’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베툴리아(Bethulia)라고 되어 있다. 베툴리아는 유대 땅으로 통하는 전략적인 길목으로 좁은 협곡을 지나야 들어갈수 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베툴리아가 픽션(소설적인) 장소라고 믿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베툴리아가 아니라 메셀리에(Meselieh)라는 도읍이 정황상 맞는 곳이라고 주장했다. 유태백과사전의 편집자들은 유디트가 목을 벤 적장 홀로페르네스가 진을 치고 있던 곳이 베툴리아가 아니라 시킴(Shechem)이라고 밝혀냈다. 앗수르 군대는 유대 땅으로 통하는 협곡을 점령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시킴을 포위하고 물의 공급을 끊었다고 한다. ‘유디트서’에는 홀로페르네스가 죽자 느브갓네살의 앗수르 군대가 혼란에 빠져 모두 퇴각했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느브갓네살 왕이 유대 땅을 정복하였다. 그러므로 느브갓네살 왕은 ‘유디트서’에서 장식으로 등장한다고 볼수 있다.   


‘유디트서’는 공식적인 유태교 경전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정통유태주의자들은 ‘유디트서’(우리나라에서는 유딧서)를 유태가 그리스의 셀루시드(Seleucid)왕조와 전쟁을 벌이던 시기를 대변하는 귀중한 자료로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와 함께 유태인 최고의 명절인 하누카(Hanukkah)도 실은 유디트의 활동에 배경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누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세로부터 해방되어 여호와 하나님께 새로운 성전을 봉헌한 기념일이다. 유디트는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위대한 역할을 했던 세명의 애국여인중 한 사람이다. 그들은 바락장군과 함께 적군을 물리친 여선지자 데보라, 삼촌 모르드개와 함께 이스리엘 민족을 죽음에서 구해낸 왕비 에스터, 그리고 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적장의 목을 베어 적군을 물리친 유디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