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와 마르게리타와 페피나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는 두 번 결혼하였다. 일찍 세상을 떠난 첫 번째 부인은 소년 베르디를 음악가가 되도록 후원해준 안토니오 바레치(Antonio Barecci)의 딸이었다. 바레치는 베르디의 아버지의 친구였다. 바레치의 딸인 마르게리타 바레치(Margueritta Barecci)는 베르디와 동갑으로 베르디는 한때 마르게리타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준 일이 있다. 두 사람은 결혼하여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러나 두 자녀는 모두 어릴 때 세상을 떠났고. 이어 마르게리타도 세상을 떠났다. 일설에 따르면 밀라노에서의 어려운 생활 때문에 영양실조와 추위를 견디지 못해 폐렴이 생겨 가족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비탄에 젖어 있는 베르디에게 설상가상으로 그가 작곡한 희가극 ‘하루만의 임금님’도 실패로 끝났다. 그러한 때에 베르디를 격려해 주고 용기를 불어 넣어 준 여인이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페피나)였다. 실의에서 벗어난 베르디는 이후 대작곡가로서 연이은 성공을 거두었다. 페피나는 베르디보다 두 살 아래였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동거한 때로부터 12년후에 결혼식을 올렸다. 베르디는 오페라 ‘활슈타프’를 끝으로 더 이상 작곡을 하지 않고 아내인 페피나와 함께 여생을 보냈다. 베르디는 1901년 1월 27일 뇌일혈로 숨을 거두었으며 페피나는 베르디보다 3년 일찍 세상을 떠났다. 베르디는 그가 생전에 세운 산타 아가타의 ‘음악가의 집’ 한 구석에 사랑하는 아내 주세피나(페피나)와 함께 안장되었다. 베르디의 두 부인은 모두 베르디에게 헌신적이었으며 베르디가 역사에 남을 위대한 작곡가로 발전할수 있도록 크게 헌신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질투의 화신인 푸치니의 부인이나 남편을 제대로 보필하지 않은 모차르트의 부인과는 사뭇 다르다.
베르디(연필 스케치)
베르디가 북부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인 론꼴레에서 태어난 1813년은 중부 유럽의 정치적 상황이 한치 앞을 내다볼수 없는 혼미한 상태에 있는 때였다. 론콜레는 밀라노에서 동남쪽으로 약 100km 떨어져 있는 파르마(Parma)시에서 가까운 농촌 마을이다. 베르디가 태어난 이듬해에 유명한 라데츠키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론꼴레까지 진격하여 마을을 유린했다. 라데츠키 장군은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작곡한 ‘라데츠키 행진곡’의 주인공인 바로 그 사람이다. 오스트리아군이 론꼴레 마을을 점령하고 무고한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을 때 하마터면 베르디의 어머니도 오스트리아군에게 화를 당할뻔 했다. 베르디의 어머니는 한 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베르디를 안고 마을 교회의 종탑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천우신조로 화를 면할수 있었다. 베르디의 아버지는 론꼴레 마을에서 작은 주점 겸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여관에는 떠돌이 예술가들이 자주 들렸다. 베르디는 이런 떠돌이 예술가들의 수준 낮은 음악을 듣는 것 이외에 별다른 음악적 자극도 받지 못한채 넉넉지 못한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디는 일찍부터 하늘로부터 받은 음악적 재능을 보여주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어린 베르디의 재능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 베르디의 아버지의 친구인 안토니오 바레치였다. 바레치는 론꼴레에서 가까운 부세토(Busetto)에서 잡화상을 경영하는 비교적 부유한 사람이었다. 바레치는 음악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부세토에서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간간히 연주회를 가졌으며 부세토악우회라는 단체도 만들어 음악의 진흥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바레치는 친구의 아들인 주세페 베르디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 베르디를 자기 집에 데려다가 함께 살며 중학교에 다니도록 했고 부세토성당의 오르가니스트 겸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프로베지에게 정식으로 음악을 배우게 했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베르디는 일취월장하여 16세 때에는 이미 스승을 대신하여 성당의 오르간을 연주하거나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정도가 되었다. 바레치는 베르디가 18세 되던 해에 그를 밀라노로 보내어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도록 할 생각이었다.
바레치에 대한 이야기를 약간 장황하게 덧붙이는 것은 이미 설명한 대로 바레치의 딸이 나중에 베르디의 첫 번째 부인이 된 마르게리타(Margerita)였기 때문이다. 마르게리타는 베르디와 나이는 같지만 7개월 아래였다. 당시 베르디는 마르게리타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는데 그럴 쯤해서 두 사람은 어느덧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바레치는 베르디와 딸 마르게리타의 관계를 오히려 환영하는 눈치였으나 마르게리타의 어머니는 베르디가 가난한 집 출신이라고 하여 결사까지는 아니었지만 하여튼 반대를 했다. 사태가 이상하게 진전되자 바레치는 베르디를 밀라노로 보내어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일설에 따르면 바레치가 베르디를 밀라노음악원에 보내고자 한 것도 미세스 바레치의 코치에 의해 마르게리타와 베르디의 사이를 떼어 놓기 위한 의도에서였다고 한다. 베르디는 마르게리타와의 이별을 무척 섭섭하게 여기면서도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할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으로 밀라노로 힘차게 떠났다. 그러나 베르디는 밀라노음악원의 시험에 불합격하였다. 피아노 연주 솜씨가 미숙하고 작곡에 대한 재능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위대한 음악가의 시작은 이처럼 난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베르디의 첫 부인인 마르게리타
베르디는 기왕 고향을 떠나 밀라노까지 왔는데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도와 주점 겸 여관에서 일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비록 밀라노음악원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이를 오히려 기회로 삼고 유명한 작곡가의 문하에 들어가 도제가 되어 공부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베르디는 라 스칼라의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라비냐(Lavigna)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훗날 베르디가 대성한 것은 이때의 공부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라비냐의 문하에서 공부한지 1년후, 부세토의 스승인 프로베지가 세상을 떠났다. 프로베지는 부세토 성당의 오르가니스트 겸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다. 그가 세상을 떠남으로서 그 자리는 공석이 되었다. 부세토의 사람들은 베르디에게 그 자리를 맡으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정작 부세토에 돌아와 보니 그 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있어서 베르디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대신, 베르디는 부세토악우회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당당한 직업을 가진 베르디는 사랑하는 마르게리타와도 결혼할수 있었다. 이번에는 마르게리타의 어머니도 반대하지 않았다. 마침내 베르디는 부세토 성당에서 마르게리타와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 모두 22세 때였다.
부세토의 빌라 베르디 앞에 있는 베르디 기념상
부세토에서 마르게리타와의 신혼생활을 행복한 것이었다. 결혼한 이듬해에 장녀 비르지니아(Virginia)가 탄생했고 1년후에는 장남 이칠리오(Ichilio)가 태어났다. 마르게리타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베르디를 보살펴주고 자녀들을 돌보았다. 베르디의 가정은 행복했다. 그러나 베르디는 부세토의 안일한 생활로 만족할수 없었다. 마침 부세토악우회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의 계약이 끝나자 베르디는 가족을 이끌고 밀라노로 떠났다. 베르디는 오페라 작곡가로서 이름을 떨치고 싶었다. 베르디의 첫 오페라인 ‘산보니파치오 백작 오베르토’는 그가 밀라노에 온 해인 1839년 라 스칼라에서 공연되었다. 신인의 데뷔작품으로서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산보니파치오 백작 오베르토’의 여주인공은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였다. 페피나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는 나중에 베르디의 두 번째 부인이 된 사람이었다. 운명의 힘은 참으로 신비스럽다고 하지 않을수 없다. 아무튼 ‘산보니파치오 백작 오베르토’의 성공으로 베르디는 라 스칼라로부터 세편의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바야흐로 베르디는 오페라 작곡가로서 대성할 절호의 찬스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뜻하지 아니한 불행이 베르디의 가정을 엄습하였다. 딸 비르지니아가 갑자기 시름시름 앓더니 세상을 떠났고 얼마 후에는 아들 이칠리오도 숨을 거둔 것이다. 일순간에 사랑하는 두 자녀를 잃은 베르디와 마르게리타는 망연자실하여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밀라노에 온 이후 넉넉하지 못한 생활 때문에 추운 방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지냈던 것이 원인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불행은 여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딸과 아들을 저 세상으로 보낸 이듬해에는 사랑하는 아내 마르게리타가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추운 날씨 때문에 폐렴에 걸렸다는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계속적인 불행에 충격을 받은 베르디는 아예 음악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 그 무렵에 대하여 베르디는 이렇게 회술했다. ‘불과 2년 사이에 나는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런 비참한 상황에서 내가 맡은 일은 코미디 오페라를 작곡하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웃지 못할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프리마 돈나 페피나의 활동시대의 모습
비탄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그가 내놓은 ‘하루만의 임금님’은 예상했던 대로 실패로 막을 내렸다. 베르디는 오페라 작곡에서도 자신을 잃었다. 이처럼 낙담과 실의의 밑바닥을 헤매고 있을때 그를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준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라 스칼라의 지배인인 도메니코 모렐리(Domenico Morelli)와 라 스칼라의 프리마 돈나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였다. 라 스칼라의 지배인 모렐리는 베르디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베르디가 그대로 주저앉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베르디에게 새로운 대본을 주어 오페라를 작곡토록 적극 권유하였다. 고국을 떠나 실의와 낙담에 빠져 살고 있던 히브리 백성들의 얘기를 다룬 ‘나부코’였다. 베르디는 ‘나부코’의 내용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베르디는 ‘나부코’를 작곡하는 동안에 완전히 자신감을 찾게 되었다. 드디어 ‘나부코’는 1842년 3월에 라 스칼라에서 초연되었다. 대성공이었다. '나부코'에 나오는 '히브리 포로들의 합창'은 초연 다음날부터 밀라노의 사람들이 흥얼거리는 멜로디가 되었다. 더구나 이 합창곡은 당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는 이탈리아의 정치상황과 엇물려서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많은 공감을 준 것이었다. ‘나부코’의 성공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라 스칼라의 지배인 모렐리였지만 여주인공인 아비가일을 맡은 주세피나 스트레포니(페피나)의 기여도 대단히 컸다.
파리에서의 페피나
당시 페피나는 라 스칼라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용모도 단정했지만 음성에 있어서도 청아하고 드라마틱하였다. 페피나는 무대를 압도하는 연기력도 가지고 있었다. 사실 페피나는 불행을 겪은 젊은 베르디가 ‘나부코’를 작곡하기 시작하자 아비가일을 맡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고 한다. 베르디도 그러한 페피나를 염두에 두고 아비가일의 스코어를 완성했다고 한다. 아비가일의 노래는 기술적으로 어려운 점이 많은 것이지만 페피나는 타고난 재능으로 이를 훌륭하게 소화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베르디와 페피나 사이는 단순하게 작곡가와 프리마 돈나라는 관계가 아닌 사랑의 차원으로 진전되었다. 페피나는 오페라 출연을 통하여 베르디의 창작활동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얼마후 30세의 한창 활동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하였다. 그 이유중의 하나는 무대를 둘러싼 추악한 투쟁과 성악가들 간의 반목이나 음모에 환멸을 느껴서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한때 좋아지냈던 사람과 헤어지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을 힘들게 양육하고 있었던 것도 페피나에게 큰 부담이었다. 페피나는 밀라노를 떠나 파리로 가서 조용하게 성악 레슨을 하며 지냈다. 그러던중 파리를 방문한 베르디와 2년만에 재회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의 애정은 더욱 깊어져 그들은 파리에서 결혼식만 올리지 않았을 뿐 사실상의 부부로서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이때 베르디는34세, 페피나는 32세였다.
페피나는 여러모로 보아서 베르디의 이상적인 반려자라고 해도 좋은 훌륭한 여인이었다. 일반적으로 당시 오페라의 프리마 돈나라고 하면 고집이 세고 사치하며 낭비가 많은 타입이었다. 하지만 페피나는 달랐다. 그런 결점을 조금도 찾아볼수 없었다. 오히려 자기를 희생하며 사랑하는 남자를 섬기는 온화하고 건실한 타입의 여성이었다. 게다가 그는 매우 지성적이었다. 두 사람이 정작 결혼식을 올린 것은 파리에서 동거생활을 시작한 때로부터 12년후였다. 베르디로서는 어려운 시절에 일찍 세상을 떠난 첫 번째 아내인 마르게리타와 두 자녀에 대한 연민의 정을 쉽사리 떨쳐버릴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런 베르디의 심정을 헤아린 페피나 역시 순종하듯 기다렸다고 한다. 한편, 페피나에게도 전에 동거했던 남자와의 사이에 두 사생아를 둔 어두운 과거가 있기에 존경하는 베르디에게 선뜻 결혼을 강요하지 못했었다는 후문도 있다. 이제 여기에서 페피나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도록 하자.
노년의 페피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Giuseppina Strepponi: 애칭 Peppina)는 베르디보다 2년 후인 1815년 9월 8일 북부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인 로디(Lodi)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페라 작곡가였다. 어릴 때부터 노래에 소질이 있던 페피나는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배우고 20세때에는 베니스에서 오페라의 주역을 맡아 주위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끌었다. 처음 데뷔한 역할은 로시니의 ‘샤르반의 마틸데’(Matilde di Sharban)에서 타이틀 롤이었다. 베니스의 ‘일 곤돌리에레’(Il Gondoliere)지는 ‘찬란하고 델리케이트하며 깊은 감명을 주는 음성, 그리고 확신에 넘친 드라마틱한 연기와 우아한 용모의 새로운 프리마 돈나가 탄생하였다’라고 썼다. 그후 페피나는 여러 오페라에 주역으로 출연하여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페피나는 특히 도니제티의 ‘람메무어의 루치아’, 메르카단테의 ‘일 지우라멘토’(Il Giuramento), 그리고 벨리니의 여러 오페라에서 벨칸토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도니제티가 페피나의 음성과 연기에 감동하여 1846년에 페피나를 위하여 ‘아델리아’(Adelia)라는 오페라를 작곡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보다도 페피나는 베르디의 오페라에 주역으로 출연하여 음악사에 길이 남은 이력을 남겼다. 페피나는 나부코(1842) 이외에도 에르나니(Ernani: 1844 베니스)와 ‘롬바르디의 첫 십자군’(I Lombardi alla Prima Crociata: 1843 밀라노) 세계초연에서도 주역을 맡았다.
부세토에서 말년을 보낼 때의 페피나
다시 부연하지만, 페피나가 부세토라는 시골마을에서 올라온 무명의 작곡가 베르디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베르디의 처녀작 ‘산보니파치오의 백작 오베르토’(Obertoconte di San Bonifacio)에서 주역을 맡은 때부터였다. 그후 1842년에는 ‘나부코’의 초연에서 아비가일(Abigaille)을 맡아 이 오페라가 대성공을 거두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페피나는 ‘나부코’의 초연 때부터 음성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뜻하지 아니하게 돌아가시자 남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어떤 연주든지 가리지 않고 출연하여 무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페피나의 목소리는 휴식이 필요했다. 더구나 페피나는 나폴레오네 마리니(Napoleone Marini)라는 한량과 동거생활을 하여 두 아들까지 두었으나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사생아인 두 아들만 키우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처럼 목소리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던 페피나는 대극장에서 주역으로 출연해 달라는 섭외가 있었지만 이를 감당하기 어려워 포기하고 시골 오페라 극장을 다니며 주역이 아닌 조역으로 출연하는 일을 감수하였다. 그리하여 1846년 모데나에서 ‘나부코’의 아비가일을 맡은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오페라 무대에 서지 않을 결심을 했다. 그래서 파리로 가서 성악 레슨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847년 베르디를 다시 만나 ‘롬바르디’(I Lombardi)의 무대에 서게 되어 재기를 생각했으나 생각만큼 만만치는 못했다.
영화 '베르디'의 한 장면
파리에서 만난 베르디와 페피나는 서로 사모하는 마음과 존경하는 마음이 융화되어 서로를 인생의 반려자로 굳게 믿게 되었다. 이로부터 페피나는 공식적으로 베르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게 되었다. 당시 베르디는 계속적인 성공으로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다. 세계의 걸작인 ‘라 트라비아타’를 완성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당시 알렉산더 뒤마 휘스의 ‘동백꽃 여인’은 연극으로서 인기를 끌고 있었다. 페피나는 베르디에게 ‘동백꽃 여인’을 오페라로 만들 것을 적극 권유하였다. 어두운 과거를 지니고 있으며 존경하고 사랑하는 베르디와는 아직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페피나로서는 ‘동백꽃 여인’의 주인공인 마르그리트 고티에의 슬프고도 안타까운 스토리가 남의 얘기로만 여겨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베르디 부부가 사랑했던 개 룰루와 룰루의 묘비 (Alla Memoria d'un Vero Amico: 진정한 친구를 추모하여'라고 적혀 있다.)
두 사람은 복잡한 파리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부세토로 돌아왔다. 그런 페피나에 대하여 마을사람들은 ‘불쌍한 마르가레타를 잊지 못하여 홀아비로 지내고 있는 베르디를 유혹하여 동거하고 있다’면서 노골적으로 비난을 퍼부었지만 이에 대하여 베르디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다만, 마르가레타의 아버지이며 자기를 후원해준 바레치에게만은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였을 뿐이다. 베르디와 페피나는 1859년 8월 29일 프랑스 사보이의 콜로뉴-수-살레브(Collogne-sour-Salève)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종을 울리는 소년과 마차꾼이 증인으로 참석했을 뿐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거의 50년이라는 기간을 함께 살았다. 주로 산타 아가타(St Agata)에서 지냈으며 겨울에는 제노아에 있는 사울리 팔라비치노(Saluli Pallavicino)저택에서 지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반세기에 걸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일관된 것이었다. 베르디 부부에게는 룰루(Lulu)라는 애완용 스파니엘 개가 있었다. 자녀가 없었던 두 사람은 룰루를 친자식처럼 데리고 살았다. 룰루가 죽자 슬픔에 빠진 베르디 부부는 산타 아가타의 공동묘지에 룰루를 위한 훌륭한 묘지를 만들어 주었다. 묘비에는 ‘진정한 친구를 추도하며’라고 적혀있다. 아마 베르디만큼 동물을 애호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베르디와 페피나의 행복하고도 오랜 생활은 1897년 11월 14일 페피나가 산타 아가타에서 세상을 떠남으로서 막을 내렸다. 그후 베르디는 휠로메나(Filomena)에서 홀로 살았다. 다만, 베르디의 먼 친척으로서 베르디가 1867년에 후견인을 맡은 마리아라는 여자를 딸처럼 데리고 함께 지냈다. 마리아라는 이름도 베르디가 다시 지어준 것이었다.
투스카나 지방에서 베르디와 페피나
다시 한번 요약하면 베르디의 두 번째 부인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페피나)는 베르디의 오페라 ‘산보니파치오의 백작 오베르토’ ‘나부코’ ‘에르나니’ '롬바르디의 첫 십자군' 등의 세계초연에서 여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소프라노였으며 베르디가 '라 트라비아타' ‘운명의 힘’ ‘오텔로’ ‘활슈타프’를 완성토록 권유한 공로자로서 오페라의 역사에서 기억되는 인물이다.
1901년 밀라노에서 세상을 떠난 베르디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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