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시니와 이사벨과 올림프
이사벨 콜브란(Isabel Colbran: Isabella Colbrandt: 1785-1845)은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태어난 미모의 소프라노로서 1808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이탈리아 오페라계에 혜성과 같이 데뷔하여 인기를 독차지 하였으며 특히 1811년부터는 나폴리의 산 카를로의 프리마 돈나로서 활약하여 오페라의 본고장이나 다름없는 나폴리의 오페라 무대를 압도한 인물이다. 로시니 연구가인 프란시스 토이(Francis Toye)에 의하면 이사벨라 콜브란(프랑스에서는 이사벨르)은 특히 비극적인 내용의 오페라에서 여주인공으로 잘 어울렸다고 하며 성량이 놀랍도록 풍부하고 음역의 폭이 넓어 여러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했다고 한다. 또한 연기에 있어서도 뛰어난 재능이 있어서 미모와 미성과 함께 무대를 압도하였다고 한다. 로시니(1792-1868)는 이사벨보다 4년후인 1815년에 나폴리 산 카를로극장의 지배인인 도메니코 바르바이아(Domenico Barbaia: 1778-1841)에게 스카웃되어 이 극장의 전속 작곡가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사벨 콜브란은 로시니보다 7살 연상이다.
이사벨라 콜브란
로시니의 대표작인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로시니가 24세 때에 작곡한 것으로 1816년 로마에서 초연되었으나 로시니 반대파의 악질적이고도 고의적인 방해로 제1회 공연에서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그러나 2회 공연부터는 반대파의 행동이 없어서 갈채를 받아 오늘날 세계 제일의 오페라로서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로시니 반대파들고 일단 ‘세빌리라의 이발사’를 잠시 듣고 나서 너무나 좋아서 반대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로시니는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계기로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정상급 작곡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에 로시니가 이사벨 콜브란을 만난 것이다. 당시 콜브란의 인기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다. 나폴리에서는 정치가들까지도 콜브란을 두고 두 패로 나뉘어 정쟁을 벌일 정도였으나 그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당시 콜브란은 산 카를로극장의 지배인인 바르바이아의 애인이었다. 오페라극장 지배인과 프리마 돈나 사이에 그렇고 그런 관계가 거의 일반화되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나폴리 사람들이라면 거의 모두 극장지배인과 콜브란의 관계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로시니가 산 카를로극장의 전속 작곡가가 되어 콜브란을 주역으로 하는 오페라들을 작곡하게 되었고 두 사람은 서로 만나는 빈도가 많아짐에 따라 친분이 애정으로 변하게 되었다. 오페라극장에서 극장지배인과 프리마 돈나, 그리고 전속작곡가 사이에 3각 관계가 있게 된다면 작곡가의 패배가 당연한 것이 관례였다. 어떤 작곡가는 결투에서 큰 상처를 입기도 하고 직장을 쫓겨난 일도 있다. 로시니도 그만한 각오는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이사벨 콜브란을 뜨겁게 사모하였다. 로시니가 콜브란을 위해 특별히 작곡한 오페라는 '엘리사베타: 영국 여왕 '(Elisabetta, regina d'Inghilterra) 등이다.
다행하게도 극장지배인 바르바이아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었다. 그는 로시니와 콜브란의 사이를 이해하고 흔쾌히 두 사람의 결합을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두 사람을 보살펴 주었다. 로시니와 콜브란은 한동안 동거하다가 1822년 3월, 볼로냐 교외의 작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겸하여 비엔나로 여행을 떠났다. 당시에 바르바이아는 비엔나의 캐른트너토르(Kärntnertor)극장의 지배인이었다. 로시니 부부의 비엔나 방문은 바르바이아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바르바이아가 로시니를 비엔나로 초청한 것은 로시니의 오페라를 비엔나 사람들에게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바르바이아는 극장운영에 있어서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는 로시니의 오페라가 성공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베버도 초청하여 두 사람의 작품을 동시에 공연토록했다. 당시 베버는 ‘마탄의 사수’로서 비엔나 사회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었지만 로시니는 생소한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로시니와 베버의 대결아닌 대결이 이루어졌다.
플로렌스의 산타 크로체 성당에 있는 로시니의 묘
베버의 신작 ‘오이리안테’(Euryanthe)는 특별한 환영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로시니의 신작인 ‘젤미라’를 비롯하여 ‘세빌리아의 이발사’ ‘도둑까지’는 모두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당시 비엔나 음악계는 베토벤이라는 거성이 우뚝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로시니의 인기가 너무 높아서 베토벤이 빛을 보지 못할 정도였다. 로시니가 베토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베토벤은 로시니에게 ‘제발 우리를 위하여 (세빌리아의 이발사와 같은) 재미난 오페라를 많이 써주시오’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로시니는 아내가 된 이사벨을 위해 여러 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러다가 ‘세미라미데’를 끝으로 이사벨을 위한 작품을 더 이상 작곡하지 않았다. 이사벨의 성악적 콘디션이 점차 쇠퇴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두 사람 사이에는 차음 불화가 쌓이게 되었다. 원래 이사벨은 프리마 돈나로서 화려한 생활을 해왔기에 고집이 셀뿐만 아니라 낭비벽이 심했다. 따지고 보면 이사벨은 위대한 작곡가의 좋은 반려자가 될 타입의 여자가 아니었다. 그러던중 소프라노로서 이사벨의 목소리가 상실되어가자 로시니보다 7세 연상이던 이사벨은 한창 나이의 로시니에게 부담이 되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 점점 싸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마침내 로시니는 40세가 되던 1832년 이사벨과 별거하고 얼마 후에는 파리에서 7세 연하의 올림프 펠리시에(Olympe Pelissier: - 1878)라는 여인과 친숙하게 되었다. 로시니는 프랑스 정부의 초청으로 1842년부터 파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로시니는 파리에 있으면서 프랑스 청중을 위한 ‘귀욤 텔’(윌리엄 텔)을 작곡하였다. 로시니는 이사벨과 별거한지 4년후에 합의 이혼했다. 이때 이사벨은 51세였다. 이사벨이 아내의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지 못한 것은 도박에까지 손을 뻗치는 등 낭비벽이 심한데다가 제멋대로의 성격으로 로시니의 부모와도 사이가 나빴기 때문이었다. 로시니는 이혼할 때에 자기의 집을 주고 이사벨이 여생을 편안하게 지낼수 있을 만큼 충분한 생활비를 주었다. 로시니는 자기의 아내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비정한 사나이가 아니었다.
이사벨을 대신하여 로시니의 마음을 사로잡은 올림프 펠리시에는 사실상 귀족들을 상대로 하는 고급 창녀였다. 올림프는 화가들의 모델 역할을 주로 하였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유명한 작품은 호레이스 베르네(Horace Vernet)가 올림프를 모델로 하여 그린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이다. 올림프는 마치 나중에 베르디가 작곡한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와 같은 파리의 밤의 꽃이었다. 이런 부류의 여자들을 드미몽드(Demimonde)라고 불렀다. 밤의 여자 중에서도 톱 클라스에 속하는 창녀로서 대개는 귀족이나 부호의 후원을 받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여자들을 드미몽드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밤의 여자라고 하면 행실이 좋지 않은 여자를 상상하기 쉽지만 드미몽드라는 부류의 여자들은 문학, 미술, 음악등 예술에 조예가 깊으며 멋진 취미와 두드러진 지성을 가진 여자들이어서 누구나 가까이하고 싶어하는 대상이었다. 올림프도 그러한 여성중의 한사람으로서 역시 ‘라 트라비아타’의 주인공인 비올레타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모든 희생을 감수하는 착한 마음씨를 가진 헌신적인 여인이었다.
로시니는 이사벨과 정식으로 이혼한후 올림프와 동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사벨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올림프와 정식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 이사벨에 대한 일종의 배려였다. 로시니가 올림프와 정식으로 결혼한 것은 이사벨이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846년의 일이었다. 이때 로시니는 54세, 올림프는 47세였다. 헌신적인 올림프의 진가가 발휘된 것은 만성 요도염으로 고통을 받던 로시니가 파리의 저명한 외과의사인 시비아르의 집도로 수술을 받고 난 후부터였다. 당시 두 사람은 아직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지만 올림프는 로시니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오로지 간호에만 전념하였다. 로시니가 올림프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가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올림프가 로시니를 그처럼 정성스럽게 돌본 것은 로시니의 재능을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악사상 올림프처럼 남편을 존경하고 그 재능을 흠모하여 최후까지 헌신적인 노력을 바친 아내는 흔치 않을 것이다. 아마 바흐의 부인 안나 막달레나 정도아 오랑프에 필적하는 현모양처일 것이다. 반면, 자기 남편의 가치를 조금도 알지 못하고 남편을 괴롭히기만 했던 하이든의 아내나 모차르트의 아내와는 정말 비교되는 일이다. 이런 좋은 아내를 둔 로시니는 건강상태를 제외하고는 매우 행복했다고 할수 있다.
호레이스 베르네가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라는 타이틀의 작품에서 유디트를 그리고 위해 모델로 삼은 올림프 펠리시에리의 모습(습작: 왼쪽)과 실제 작품(오른쪽)
로시니는 헌신적인 올림프의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1852년, 60세가 되는 해부터 건강이 다시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2년후부터는 아예 그토록 좋아하는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몇 달 씩이나 밤에 거의 한잠도 자지 못했다. 어쩐 영문인지 극도의 노이로제에 시달렸던것 같다. 로시니는 의사들의 권유에 따라 이탈리아로 돌아가 각지에서 요양을 했지만 증세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그런 로시니의 생명을 연장케 해준 것은 순전이 아내 올림프의 결단 때문이었다. 올림프는 요양도 좋지만 파리로 돌아가서 좋은 의사로부터 치료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파리로 돌아온 올림프는 잠시도 남편 로시니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성으로 간호하였다. 사람들은 그런 올림프를 보고 ‘순애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올림프는 사람들의 방문을 억제하는 등 로시니에게 자극을 줄만한 일은 일체 금지하였다. 그런 보살핌이 효과가 있어서 한때는 의사마저 포기했던 로시니의 생명이 완전히 위험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건강을 되찾은 로시니는 ‘위로의 음악’이라는 타이틀의 가곡집을 작곡하여 올림프에게 헌정하였다. 작곡가의 아내로서 남편으로부터 진정한 감사의 뜻으로 작품을 헌정 받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닐수 없다. 올림프도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로시니는 그 후에도 자주 병치레를 하였지만 그때마다 올림프의 한결 같은 보살핌으로 실로 다른 작곡가들과는 달리 76세의 장수를 누릴수 있었다. 로시니는 1868년 11월 13일 금요일 밤 11시에 패혈증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올림프는 로시니의 시신을 끌어안고 흐느끼면서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당신의 아내로서 훌륭하게 살아가겠어요’라고 다짐하였다. 로시니의 만년을 따듯하게 감싸준 올림프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지 10년후에 사람들의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났다. 로시니는 세상을 떠난 후 파리의 페레 라셰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후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유해를 플로렌스의 산타 크로체 성당으로 옮겼다. 그러나 파리의 묘소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파리의 페레 라셰스 공동묘지에 있는 로시니의 가묘
[이사벨 콜브란 더 알기]
스페인 출신의 콜로라투라 드라마틱 소프라노인 이사벨라 콜브란(Isabella Colbran)은 1785년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1845년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향년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스페인에서는 이사벨 콜브란트(Isabel Colbrandt)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사벨은 원래 훌륭한 메조였으나 고음에서의 뛰어난 음역으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서 활약했다. 이사벨의 고음은 하이C를 넘어 E까지 이를수가 있었다. 이사벨은 작곡도 했다. 이사벨은 4편의 가곡집을 작곡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사벨이 작곡한 네편의 가곡집은 각각 러시아의 황비, 자기의 음악 선생인 크레센티(Crescenti), 스페인의 여왕, 보아르네(Beauharnais)의 유제니(Eugenie)공자에게 헌정한 것이다.
19세기 초반에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훌륭한 오페라극장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래서 산 카를로 극장은 세계적 성악가들뿐만 아니라 당대의 저명한 작곡가들과 계약을 맺고 있었다. 당시 이사벨 콜브란은 산 카를로의 프리마 돈나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사벨은 나폴리 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나폴리 왕은 이사벨을 대단히 총애하였다. 이사벨은 산 카를로의 극장장 겸 지배인인 도메니코 바르바이아(Domenico Barbaia)의 든든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사벨이 바르바이아와 내연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극장장인 바르바이아는 콜브란의 재능을 더 한층 빛나도록 하기 위해 당시 가장 유능하다는 작곡가인 로시니를 산 카를로의 전속 작곡가로 고용하여 이사벨을 주인공으로 삼은 오페라들을 작곡토록 했다. 로시니는 한창 인기절정의 이사벨을 위해 당장 ‘엘리사베트: 영국여왕’(Elisabetta, regina d'Inghilterra)를 작곡하였다.
로시니의 다음 작품은 ‘오텔로’(Otello 또는 Il Moro di Venezia: 베니스의 무어인)이었다. 이사벨이 ‘오텔로’에서 데스데모나를 맡았음은 물론이다. ‘오텔로’는 나폴리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만큼 이사벨의 인기도 하늘 높이 올랐다. 그러나 얼마후부터 이사벨의 음성은 무리를 보여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벨은 로시니가 나폴리를 위해 작곡한 ‘아르미다’에서 아르미다(Armida), ‘이집트의 모세’에서 엘치아(Elcia), ‘리키아르도와 조라이데’(Ricciardo e Zoraide)에서 조라이데, ‘에르미오네’(Ermione)에서 타이틀 롤, ‘호수의 여인’(La donna del lago)에서 엘레나(Elena), ‘마호메토2세’에서 안나(Anna), ‘젤미라’(Zelmira)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 이들의 이미지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창조하였다.
이처럼 로시니와 이사벨의 관계가 밀접해지자 이사벨은 결국 바르바이아를 떠나 1822년 로시니와 결혼하였다. 결혼후 두 사람은 비엔나를 방문하였고 이사벨은 로시니가 작곡한 ‘세미라미데’(Semiramide)의 세계 초연에서 타이틀 롤의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로시니는 ‘세미라미데’를 작곡할 때에 점점 쇠퇴해가는 이사벨의 음성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세미라미데’의 비엔나 초연은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이사벨은 그다지 훌륭하지 못하여 관중들을 실망시켰다. 다음번 공연은 런던이었다. 이사벨의 음성은 이제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사벨은 드디어 무대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로시니는 작곡으로부터 은퇴하기 전에 몇 편의 오페라를 더 완성했다. ‘렝스로의 여행’, ‘오리 백작’, ‘윌리엄 텔’등이다. 그러나 이사벨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사벨과 로시니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마침내 1837년 헤어졌다. 비록 이혼했다고 해도 로시니는 이사벨이 184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편안히 지낼수 있도록 각별한 배려를 해 주었다. 로시니는 이사벨 콜브란이야말로 자기의 오페라를 가장 정확하게 해석하는 성악가라고 간주하였다.
[올림프 펠리씨에 더 알기]
이사벨 콜브란과 결별한 로시니는 화가들의 모델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올림프 펠리씨에(Olympe Pélissier: - 1878)와 재혼하였다. 예를 들어 올림프는 호레이스 베르네(Horace Vernet)의 걸작인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에서 유디트의 모델이었다. 로시니와 올림프는 1846년 8월 16일 결혼식을 올렸다. 올림프는 화가들의 모델이었지만 부르봉 왕조의 부활과 함께 파리 사교계의 꽃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올림프는 당대에 행세깨나 하는 지라르댕(Girardin)백작의 정부로서 파리의 사교계를 주름잡았다. 올림프는 1830년에 유명한 작가인 발작(Balzac)과도 로맨스가 있었다. 파리에 간 로시니는 1840년 올림프를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곧 마음이 통하여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올림프는 로시니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 주었고 로시니의 비즈니스를 챙겨주었다. 두 사람은 신뢰로서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이사벨 콜브란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있다가 이사벨이 1845년 세상을 떠나자 다음해에 결혼식을 올렸다. 올림프는 파리 교외의 빠씨(Passy)에서 로시니와 함께 생활하다가 1878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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