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간 푸치니 - 성안토니우스의 보호를 받다.
뉴욕은 위대한 작곡가 푸치니를 마치 신처럼 환영하였다. 푸치니는 미국적인 오페라를 작곡하겠다고 약속하였다.
1906년 12월의 어느 날, 날씨는 추웠지만 토레 델 라고(Torre del Lago)는 뜨거운 흥분으로 추위를 몰랐다. 전체 인구라고 해야 어린이들까지 합쳐서 120명인 마을 사람들은 미국으로 떠나는 위대한 작곡가 푸치니를 환송하기 위해 모두 기차역으로 나왔다. 푸치니의 이웃에 산다는 어떤 사람은 지리적인 상식이 거의 없었던지 푸치니에게 아르헨티나에 있는 삼촌에게 전해 달라면서 소시지를 가져왔다. 어떤 이웃은 한 아름의 꽃다발을 푸치니에게 안겨 주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날을 위해 썼다는 자작시를 소리 높여 읊으며 푸치니의 장도를 축하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저마나 한마디씩 연설을 하고 싶어 했지만 시장과 성당 신부와 경찰서장, 그리고 몇몇 유지들만이 겨우 연설의 기회를 가졌다. 그런 모든 연설이 끝나고 일부 마을 사람들이 상당한 양의 눈물을 쏟아내는 중에 기차는 드디어 기적소리와 함께 서서히 출발하였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가 브로드웨이에 있을 당시의 건물
메트로폴리탄의 총지배인은 푸치니의 오페라 두편의 미국 초연에 즈음하여 푸치니를 초청하였다. ‘마농 레스코’와 ‘나비부인’이었다. 이 두 오페라의 역사적인 미국 공연은 1907년 1월 18-19일에 예정되어 있었다. 메트로폴리탄은 1907년 초반 시즌부터 위대한 테너 엔리코 카루소, 그리고 활달하며 위트에 넘친 소프라노 제랄딘 화라(Geraldine Farrar), 여기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불리는 소프라노 리나 카발리에리(Lina Cavalieri)와 계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출연키로 되오 있는 푸치니의 오페라는 진작부터 뉴욕의 관심꺼리였다. 메트로가 푸치니와 맺은 계약은 ‘마농 레스코’와 ‘나비부인’의 리허설에 참석하여 자문한다는 것이었다. 푸치니가 탄 여객선은 카이제린 오거스트 빅토리아(Kaiserin Auguste Victoria)였다. 여객선은 대서양에서 높은 파도를 만나 항해에 어려움을 겪었다. 푸치니는 리허설 날짜에 맞추어 뉴욕에 도착해야 하는데 늦어지자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1월 17일 여객선은 뉴욕에서 가까운 샌디 후크(Sandy Hook)해안에 가까스로 정박할수 있었다. 1월 18일에는 하루종일 검역으로 시간을 허비했다. 푸치니와 메트로는 비록 지척에 있었지만 전보로 연락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마농 레스코’의 리허설은 이미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마농 레스코’의 미국 초연은 1월 18일 밤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리나 카발리에리가 타이틀 롤을 맡고 상대역은 카루소였다. 푸치니는 최소한 공연시간에라도 극장에 도착하고 싶어서 안절부절이었다.
1월 18일 오후 5시쯤 카이제린 오거스크 빅토리아호는 스팀을 내뿜으며 허드슨 강을 거슬러 가서 뉴욕항에 도착할수 있었다. 메트로폴리탄의 관계자와 한 무리의 취재 기자들이 아침부터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푸치니의 모습이 보이자 기자들은 이것저것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그러는 와중에서 이들은 푸치니로부터 놀라운 뉴스를 듣는다. 미국을 소재로 한 오페라를 작곡하겠다는 얘기였다. 기자들에게는 특종이었다. 지금까지 푸치니의 모든 오페라는 이집트, 비엔나, 파리, 나가사키 등이 배경이었지만 미국을 배경으로 한 오페라는 없었다. 생존하는 이탈리아 작곡가중 가장 위대한 푸치니가 미국의 서부를 배경으로 한 오페라를 작곡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대단한 뉴스였다. 기자들은 특히 푸치니의 핸섬한 모습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들은 작곡가라고 하면 긴머리에 수염을 기른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으로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기자들과의 회견은 6시에 끝났다. 여권검사도 끝났다. 푸치니와 부인 엘비라는 비로소 배를 떠날 수 있었다.
오후 7시에 푸치니는 애스터(Astor) 호텔에 도착할수 있었다. 방에는 이미 저녁에 준비되어 있었다. 푸치니는 저녁을 먹는둥 마는둥하고 옷가방에서 검은 프록코트를 꺼내어 입고 밖에 대기하고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푸치니는 저녁 8시에 메트로에 모습을 나타냈다. 이미 ‘마농 레스코’는 공연이 시작되었다. 푸치니는 얼른 코트를 맡기고 음악감독실을 통하여 칸막은 객석(박스)으로 몰래 스며들 수 있었다. 1막이 끝나고 불이 들어오자 관중들은 처음으로 그들의 우상인 푸치니의 모습을 볼수 있었다. 극장안에 있던 모든 관객들은 환호와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어 푸치니를 환영하였다. 오케스트라는 미리 준비하였던 금관악기의 팡파르로서 푸치니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관중들의 기립 박수는 무려 10여분이나 계속되었다. 푸치니는 나중에 ‘박수가 그치지 않아서 계속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해야 했다’고 말했다. 2막이 끝나자 카루소와 카발리에리는 박스에 앉아 있는 푸치니에게 한걸음 더 앞으로 나와 모습을 보여 줄것은 간청하였다. 푸치니는 당황했지만 이내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로서 갈채를 보내고 있는 관중들에게 답례하였다. 드디어 메트로의 황금색 막이 내려지고 오페라가 끝나자 푸치느는 흥분한 관중들 때문에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푸치니는 자리에서 계속 일어나 손을 흔들고 답례를 해야 했다.
다음날 아침 푸치니는 뉴욕시내를 구경하러 나섰다. 주위 사람들은 토레 델 라고와 같은 한적한 곳에서 지내던 푸치니가 뉴욕과 같은 어수선하고 활기에 넘친 대도시를 어떻게 볼지 은근히 걱정이었다. 하지만 푸치니는 그런 활기를 몹시 즐기는 태도였다. 그는 특히 거리를 쉴새 없이 왕래하는 신형 자동차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푸치니 자신도 자동차광이어서 유럽 여러 지역을 자동차를 직접 운전하여 다닌 일이 있다. 푸치니는 미국 여인들도 주의 깊게 관찰하였다. 푸치니는 나중에 그의 친구에게 미국 여인들이 자기의 취향에 맞는다고 털어 놓았다. 오후에 메트로에 들른 푸치니는 유럽에서 알고 지내던 여러 음악가들을 만나 반가운 시간을 가졌다. 유럽의 음악가들은 가난이 재산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삶을 찾아 신대륙에 와서 대체로 성공하여 잘살게 되었다. 카루소는 노동자의 아들이었다. 토스카니니는 가난한 양복장이의 아들이었다. 베르디의 아버지는 작은 여관주인이었다. 리나 카발리에리는 1913년에 러시아의 짜르와 모나코의 대공으로부터 당시 돈으로 3백만불 상당의 보석을 선물 받았다. 리나는 그를 추종하는 수많은 사람으로부터도 많은 선물을 받았다. 그러나 30년전만 해도 리나는 로마의 길거리에서 새우잠을 잤으며 어머니와 함께 먹을 빵부스러기를 위해 이리저리 방황해야 했다. 푸치니는 투스카나 지방의 음악가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생활에 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홉 살 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의 손에 어렵게 자라났다. 어머니는 루카(Lucca)시와 이탈리아의 왕비에게 어린 푸치니의 학비를 지원해 달라고 청원을 넣어야 했다. 이들 음악가들은 고생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으며 재산이라는 것은 변덕스러운 것이라는 것도 인식하고 있었다. 고향을 떠난 그들은 함께 의지하며 함께 도우며 살았다.
메트로 최초의 나비부인을 맡은 리나 카발리에리
카루소는 푸치니와 마찬가지로 애스터 호텔이 투숙하고 있었다. 카루소는 바리톤 안토니오 스코티(Antonio Scotti)와 함께 있었다. 푸치니는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카루소, 스코티와 거의 떨어지지 않고 함께 지냈다. 매일 아침마다 나비부인의 미국 초연을 위한 리허설이 메트로에서 있었다. 카루소는 핀커튼 역할을 맡았고 스코티는 샤플레스를 맡았다. 제랄린 화라는 나비부인의 미국 초연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다. 매일 아침 11시, 메르토의 무대에는 이 세사람의 리허설이 진행되었으며 이를 푸치니가 지켜보았다. 이밖에도 극장 안에는 수백명에 이르는 합창단원, 오케스트라 단원, 의상 담당자, 무대장치 담당자등 스태프들이 리허설에 참여하고 있었다. ‘나비부인’이라는 새로운 오페라가 궁금해서 몰려든 사람들도 많았다. 제랄딘 화라는 목소리를 아껴서 홀 안에서만 들릴 정도로 연습에 임했지만 카루소와 스코티는 풀 보이스를 내며 기염을 토했다. 아마 이탈리아에서 온 푸치니에게 이탈라이 성악가들의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나비부인'의 메트로 공연
그러나 푸치니는 리허설이 불만이었다. 우선 제랄딘 화라가 나비부인의 이미지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다고 느꼈다. 특히 제랄딘 화라의 음성이 가냘프면서도 강인 초초상의 이미지와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리허설에서도 열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참석한 것 같았다. 푸치니는 ‘화라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멜로디에 맞지 않게 멋대로 노래를 부르는 경우가 있다. 목소리는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 같다’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푸치니는 지휘자에 대하여도 만족해하지 않았다. 푸치니는 지휘자를 ‘저능아’라고 불렀다. 그래서 푸치니는 무대 지시를 모두 스스로 해야 했다. 푸치니는 심지어 카루소에 대하여도 ‘게으르다. 새로운 스타일을 배우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자기만족에 빠진 사람과 같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치니는 카루소에 대하여 ‘대단하다. 훌륭하고 장엄한 음성이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스즈키를 맡은 미국출신의 메조소프라노 루이스 호머(Louise Homer)는 연습에는 정신을 두지 않고 다른 일에만 신경을 썼다. 호머는 얼마전 쌍둥이를 낳았다. 그러므로 호머의 유일한 관심은 보모가 쌍둥이 아이들을 잘 보살피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리허설은 거의 난장판이나 다름없었다. 리허설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온 인파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샌드위치와 마호병을 들고 와서 점심을 먹었다. 데이비스 켈라스코(David Kelasco)도 구경꾼 중의 한 사람이었다. 켈라스코는 일찍이 1900년에 브로드웨이 연극인 ‘나비부인’을 쓴 사람이다. 그는 마치 신부와 같은 하얀 컬러를 하고 다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브로드웨이의 추기경’이라고 불렀다. 푸치니는 나비부인에 대한 리허설이 시작된지 얼마후 메트로에서 일하고 있는 어떤 젊은 여성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푸치니는 영어를 하나도 못했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남이 보더라도 눈에 뜨일 정도로 분위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본 카루소가 마치 초등학생이 선생님에게 일러바치듯 푸치니의 부인에게 살을 붙여 얘기했다. 카루소는 푸치니가 지난 몇 해 동안 자기에게 퍼부었던 농담을 복수할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음악의 역사상 푸치니의 부인 엘비라(Elvira)만큼 질투의 화신은 없을 것이다. 엘비라는 푸치니와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채 함께 살기 시작하여 아들까지 두었다. 그런 엘비라이기 때문에 푸치니의 눈빛만 보아도 그가 현재 어떤 상황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카루소의 보고를 받은 엘비라는 한시도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그로부터 엘비라는 매일매일의 리허설에 참석하여 푸치니의 옆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느날 아침, 그날도 엘비라는 리허설을 보고 있는 푸치니의 옆에 바싹 앉아있었다. 그러다가 푸치니의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가 없는 것을 발견했다. ‘반지는 어디 있어요?’라고 엘비라가 물었다. 푸치니는 일부러 못들은척했다. 엘비라가 다시 ‘어디다 두었냐는 말이에요!’라고 다그쳤다. 그제서야 푸치니는 엘비라의 의중을 알고 ‘조용하 하지 못해요? 지금 리허설 중인 것을 몰라요?’라며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엘비라를 조용하게 만들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푸치니는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대답했다. 엘비라는 ‘설마 호텔에 두고 온 것은 아니지요?’라며 집요하게 따졌다. 푸치니는 짐짓 ‘그래, 그런것 같아! 좀 생각해 봅시다’라고 대꾸했다. 그러나 엘비라의 날카로운 눈빛은 위층의 박스에 앉아 있는 어떤 아리따운 아가씨를 그대로 지나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푸치니가 저 젊고 예쁜 아가씨에게 반지를 선물한 것 같았다. 엘비라는 여자의 직감으로서 카루소가 보고한 그 여자가 저 여자인 것으로 짐작했다. 엘비라는 푸치니에게 ‘잔말 말고 어서 찾아 와요! 당신이 누구하고 같이 있었는지 알고 있으니까 알아서 하세요!’라고 명령했다. 푸치니는 ‘그래! 리허설이 끝나면 가서 호텔에 가서 찾아 올테니 걱정하지 말아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엘비라도 만만치 않았다. ‘당장 가서 찾아오라는데 웬 말이 그렇게 많아요!’라며 남편을 밀어 일으켰다. 그러면서 ‘만일 당신이 찾아오지 못하면 내가 가서 찾아오겠어요!’라고 협박조로 말했다. 엘비라의 목소리가 하도 컸기 때문에 푸치니는 어쩔수 없이, 그렇지만 투덜거리면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푸치니는 엘비라의 눈길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하고 그 예쁜 아가씨에게 슬쩍 다가갔다. 하지만 엘비라는 먼발치에서 푸치니의 행동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얼마후 푸치니가 반지를 들고 돌아왔다. ‘이제 만족하오?’라고 엘비라에게 물었다. 이어 푸치니는 ‘내가 가톨릭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줄 모른다오. 당신이 나를 야단치고 몰아세울 때에 나는 성안토니오에게 기도해서 반지를 찾게 해 달라고 했오. 성인께서 기도에 응답하셨다오! 얼마전 내가 앉았던 의지 아래에서 반지를 찾았지 뭐요!’라고 설명했다. 엘비라는 ‘그래요? 당신은 나중에 성안토니오에게 특별 헌금을 내야 할거요!’라고 차갑게 말했다. 리허설이 끝나고 나오다가 엘비라는 그 예쁜 미국 아가씨를 만났다. 엘비라는 ‘디어 시뇨리나! 내 남편이 반지를 되찾아와서 그대와 성안토니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다오’라고 말했다. 뉴욕을 떠나기 전날 밤, 푸치니는 메트로가 마련한 리셉션에 참석했다. 엘비라는 감기가 걸려 함께 참석하지 못했다. 푸치니는 그 예쁜 미국 아가씨와 밤새도록 춤을 추었다.
잃을 물건을 찾아주는 성인인 성안토니우스(아기 예수와 함께. 백합은 성모수태를 의미함)
‘나비부인’은 2월 11일 메트로에서 미국 초연을 가졌다.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신문마다 극찬을 퍼부었다. 극장에 몰려든 관중들을 집으로 돌아갈 줄을 몰랐다. 그러나 푸치니는 ‘내가 집어넣은 시적 감흥이 부족하다’면서 아쉬워했다. 나비부인 역의 제랄린 화라는 수백만 미국인의 우상이 되었다. 하지만 푸치니는 ‘아니야! 저 여자가 아닌데!’라고 생각했다. 푸치니는 오페라를 떠나서 뉴욕의 일반 음악을 즐겨 들었다. 특히 래그타임 음악과 슬픔에 젖은 듯한 니그로 음악을 좋아했다. 푸치니는 미국 서부개척사에 대하여도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푸치니는 오페라 공연이 없는 날이면 매일 밤마다 뉴욕의 드라마극장을 다니며 오페라의 소재를 찾았다. 푸치니는 매일 수많은 연극이 공연되지만 오페라의 소재로 적합한 것은 불과 한두개에 불과하다고 털어 놓았다. 마침내 푸치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을 얼마 두지 않고서 소재를 찾았다. ‘황금서부의 아가씨’(The Girl of the Golden West)였다. 푸치니는 영어를 알아듣지도 못하지만 이 드라마를 보고 ‘바로 저것이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황금서부의 아가씨’는 1853년의 캘리포니아주의 메리스빌(Marysville)을 배경으로한 스토리이다. 폴카 살론의 여주인인 미글스(Miggles: 나중에 오페라에서는 Minnie)에 대한 이야기이다. 푸치니는 Camptown Races, Coal Oil Tommy, Rosalie the Prarie Flower, Pop Goes the Weasel과 같은 미국 서부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음악들을 그의 오페라에 사용하였다. 대본가인 벨라스코는 푸치니에게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즉시 대본을 만들어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푸치니는 유명 음악가로서 미국을 떠났지만 1910년 다시 돌아 올 때에는 신으로 돌아왔다. 그의 라보엠, 나비부인, 토스카가 미국의 오페라 극장들을 휩쓸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을 배경으로 한 새로운 오페라를 선물로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황금 서부의 아가씨’는 메트로에서의 특별 초연을 위해 벌써 준비 중이었다. 푸치니의 오페라 초연으로 미국의 오페라 극장들은 이제 유럽의 한다하는 오페라 극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수 있게 되었다. ‘우리도 초연을 했다’는 자부심 때문이었다. 푸치니와 그의 일행들은 ‘황금 서부의 아가씨’를 위해 미국으로 올때 호화 여객선인 조지 워싱턴 호의 특실을 사용했다. 뉴욕은 푸치니에 대하여 마치 제왕이 방문한 것과 같은 환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뉴욕에 도착한 푸치니는 대본가 벨라스코와 함께 리허설을 주관하였다. 지휘자 토스카니니가 배역을 선정하였다. 세계의 어느 오페라극장에서도 찾아 보기 힘든 최정상급 배역이었다. 악당인 딕 존슨(Dick Johnson)역은 카루소였다. 미미역은 위대한 소프라노 에미 데스틴(Emmy Destinn)이었다. 파스쿠알레 아마토(Pasquale Amato)는 보안관 잭 라니(Jack Ranee)역을 맡았다. 푸치니는 이제야 만족이라고 말했다. 푸치니는 카루소에 대하여 ‘더할수 없이 훌륭하다’며 찬사를 보냈고 토스카니니에 대하여는 ‘최정상’(Zenith)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했다.
'황금서부의 아가씨'에서 미니 역을 최초로 맡은 에미 데스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는 1910년 12월 10일 초연 당일의 아침부터 몰려든 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작품인가?’라며 한없는 궁금증을 표현했다. 사람들은 혹시 출연자의 모습이라도 볼수 있을까하여 자리를 뜨지 않았다. 오후 3시쯤에는 기마경찰이 동원되어 교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자 메트로의 현관 앞은 줄을 이은 마차와 자동차로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었다. 어떤 귀빈은 멀리서부터 걸어와야 했다. 메트로는 암표를 방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표를 살 때에 표에다 자기의 서명을 하도록 했다. 그래서 입장할 때에는 출입문에서 마치 여행자수표에 카운터 사인을 하는 것처럼 그 표에 자기의 서명을 다시 하도록 했다. 극장안은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였다. 모두들 ‘도대체 어떤 오페라일까?’라며 궁금해 했다. 마침내 밤 8시15분 조명이 꺼지고 토스카니니가 바톤을 들었다. 음악평론가들은 그날 저녁 토스카니니가 청중들을 환상과 현실의 세계로 번갈아 안내했다고 말했다. 막이 내리자 메트로의 점잖은 관중들은 체면불구하고 푸치니에게 환호와 함께 박수갈채를 보냈다. 카루소는 최정상의 테너로서 최선을 다했다. 신문들은 카루소에 대하여 ‘그대 신이여, 어떻게 그렇게 노래를 부를수 있단 말인가!’라며 찬사를 보냈다. 사람들은 악당인 딕 존슨에 대한에 대하여 한없는 헌신적인 사랑을 보낸 여주인공 미니에 대하여 박수를 보냈다.
'황금서부의 아가씨'에서 악당인 딕 존슨 역의 카루소
사람들은 푸치니의 유럽풍의 스코어에 미국 스타일의 음악이 가미된데 대하여 놀라움을 표시했다. 푸치니는 래그타임을 위시하여 주니(Zuni)인디안의 선율, 조지 코한(George ohan)의 Belle of the Barber's Ball, 그리고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마지막 장면의 Addio, California에 대하여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흥분과 감격에 약한 푸치니는 55회의 커튼 콜을 받았다. 푸치니는 마치 환호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겨우 서서 메트로가 마련한 은으로된 월계관을 받아썼다. 관중들의 환호소리가 어느정도 수그러들자 푸치니는 손을 들어 장래를 조용하게 한후 ‘세계의 어느 극장에서도 이같은 대단한 환호와 환영은 받아 본 일이 없다고’고 말했다. ‘황금서부의 아가씨’의 공연으로 여유가 생긴 푸치니는 우선 5번가의 상점에서 눈여겨 본 날협하고 강력한 동력의 모터보트를 사고 싶었다. 푸치니의 눈동자에는 고향인 토레 델 라고의 호수가 비치고 있었을 것이다. 보트는 3천불이었다. 투스카나 사람 답게 절약이 몸에 밴 푸치니로서는 상상도 못할 거금이었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을수 없었다.
어는 날 저녁 푸치니를 위해 반더빌트(Vanderbilt) 저택에서 연회가 열렸다. 그때 뉴욕의 어떤 유명한 은행가가 푸치니에게 다가와 자기는 ‘뮤제타 월츠’를 가장 좋아하는데 만일 푸치니가 ‘뮤제타의 왈츠’ 악보에 자필 서명만 해준다면 어떤 요구라고 기꺼이 들어주겠다고 말했다. 푸치니는 ‘아니, 정말 어떤 요구라고 들어주신단 말입니까?’라고 되물으면서 ‘3천불이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다음날 그 은행가는 푸치니가 서명한 ‘뮤제타의 월츠’ 악보를 받았으며 푸치니는 모터보트를 가지게 되었다. 모터보트는 푸치니가 고향에 돌아간지 한달후에 배달되었다. 고향에 돌아온 푸치니는 미국이 자기에게 베풀어준 호의에 대하여 결코 잊지 않겠다고 밝히고 미국에는 미래가 있다고 말했다. 메트로는 ‘황금서부의 아가씨’의 초연에 대한 로열티로 푸치니에게 12만 리라(약 2만2천불)를 지급하였다. 그 옛날 푸치니의 어머니가 자녀들을 기를 때 연금으로 받은 돈의 1천6백배가 되는 금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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