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오스트리아 작곡가

Franz Liszt(프란츠 리스트) - 2

정준극 2009. 5. 28. 22:16

Franz Liszt(프란츠 리스트) - 2

 

 

리스트는 어릴 때부터 집시 음악에 젖어서 지냈다. 그래서 시간만 있으면 집시 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했다. 하지만 소년 리스트의 사정은 달라졌다. 집시음악을 잊고 고전음악에 매달려야 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인도했던 것이다. 아버지 아담은 어린 리스트에게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클레멘티, 훔멜, 크라머 등의 피아노 악보를 건네주며 매일처럼 연습토록 했다. 리스트가 7세 때였다. 아담은 생활이 넉넉하지도 않은 처지에 8,800페이지에 이르는 귀중한 피아노 악보를 사서 소년 리스트에게 주고 연습토록 했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소년 리스트는 자주 아팠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많은 악보를 모두 연습했다고는 볼수 없다. 리스트가 처음으로 공식 연주회에 참석한 것은 1920년, 그가 고작 9세 때였다. 외덴부르크(Ödenburg)라는 곳에 있는 카지노에서 프라운 남작(Baron von Praun)이 주관한 음악회에 참가하였다. 프라운 남작은 바이올리니스였다. 리스트는 연주회의 제2부에서 페르디난트 리스(Ferdinand Ried)의 피아노 협주곡 E플랫 장조를 연주하였다. 사름들은 어린 리스트에 게 모차르트가 다시 왔다고 하며 대단한 찬사를 보냈다. 리스트는 자기가 만든 즉흥곡(Improvisation)도 연주하여 다시 한번 갈채를 받았다.

 

 헝가리 브라티슬라바 음악원의 리스트 명판

 

아버지 아담으로서 어린 리스트를 대중에게 더 잘 선보일 기회가 생겼다. 프레스부르크(브라티슬라바)에서 13년만에 처음으로 의회가 열리게 되었다.1820년 11월 어린 리스트는 프레스부르크에 있는 미하엘 에스터하지 백작 궁전에서 콘서트를 가졌다. 의회에 참석했던 귀족들과 사회저명인사들이 참석한 콘서트였다. 어린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에 감탄한 몇몇 귀족들은 리스트가 외국에 가서 정식으로 공부할수 있도록 기금을 모으기로 했다. 귀족들은 리스트에게 해마다 비엔나 돈으로 6백 굴덴을 6년 동안 지급키로 약속했다. 실은 아버지 아담은 이미 주인인 에스터하지 공자에게 청원서를 내어 아들 리스트를 비엔나에 데려가 공부시키려고 하는데 1년에 1,300-1,500 굴덴의 돈이 필요하니 후원해 달라고 요청한바 있다. 아담은 에스터하지 공자가 자기의 청원을 들어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직장을 비엔나로 옮겨 달라고 요청했다. 아들과 함께 비엔나에 가서 살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설명도 했다. 그러나 비엔나에 아담을 위한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그 요청은 묵살되었다. 그러던 차에 프레스부르크의 귀족들이 어린 리스트를 위해 1년에 6백 굴덴을 지급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아담은 에스터하지 공자에게 다시 청원을 넣어 1년가 휴가를 얻었다. 아담은 라이딩에 있는 집을 팔고 가족과 함께 비엔나로 떠났다.

 

비엔나 학생시절의 리스트

 

비엔나에서 리스트는 칼 체르니(Carl Czerny)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체르니는 청년 시절에 베토벤에게 레슨을 받은 일이 있다. 훗날 체르니는 회상록(Lebenserinerungen)에 서 ‘어린 리스트는 피아노에 대한 소질이 뛰어나 보였지만 운지법(雲脂法)에 대하여는 제대로의 지식이 없어 보였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 스타일은 ‘상당히 혼잡스러웠다’고 적었다. 체르니는 리스트에게 클레멘티의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 쉬운 것을 한번 쳐보라고 했다. 리스트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연주했다. 그러나 리스트는 세세한 표현까지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스승인 체르니와 학생인 리스트는 운지법에 대하여도 서로 의견이 달랐다. 리스트는 체르니로부터 레슨 받는 것이 싫어서 꾀를 부렸다. 악보에 이상한 운지법을 기록하고 그것을 아버지에게 보여주며 이것은 체르니 선생님의 운지법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체르니가 피아노 연주에 대하여 전혀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담은 체르니를 찾아가 얘기를 나누었다. 결과, 리스트는 체르니로부터 계속 레슨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결정 났다.

 

리스트에게 많은 영향을 준 파가니니

 

리스트에 대한 소문은 비엔나에 퍼지기 시작했다. 비엔나도 역시 좁은 사회였다. 얼마후인 1822년, 리스트가 11세 때에 그는 비엔나에서 처음으로 공식 연주회에 데뷔하였다. 리스트는 란트슈탠디세 잘(Landstandische Saal)에서 있은 연주회에서 훔멜의 협주곡 A단조, 로시니의 오페라 첼미라(Zelmira)의 아리아에 의한 즉흥곡,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의 알레그레토를 주제로 한 즉흥곡을 연주했다. 사람들은 어린 천재에 대하여 감탄의 박수를 보냈다. 이듬해인 1823년, 리스트는 호프부르크 궁전의 레도우텐잘(Redoutensaal)에서 연주할 기회를 가졌다. 어린 소년으로서 그런 훌륭한 곳에서 연주한다는 것은 대단한 발전이었다. 리스트는 이번에는 훔멜의 협주곡 B 단조와 자신이 만든 즉흥곡을 연주했다.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의하면 리스트는 베토벤을 감동케 했다고 한다. 비록 청각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베토벤은 리스트라 어떻게 연주하는지를 잘 보았던 것이다. 베토벤은 무대 위로 올라와 리스트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칭찬의 말을 건네주었다. 그런데 나중에 리스트는 ‘피아노를 연주할 때에 베토벤이 저 뒤편에 아무 표정도 없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나에게 다가와서 키스를 해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베토벤이 남긴 대화책에 의하면 베토벤은 그날 리스트의 연주회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리스트의 스승인 칼 체르니

 

리스트는 11세때부터 한편으로는 체르니로부터 레슨을 받으며 또 한편으로는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로부터 레슨을 받았다. 살리에리가 에스터하지 공자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살리에리는 리스트에게 음악이론의 기초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후 살리에리는 리스트에게 작곡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살리에리는 리스트를 가르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무척 조심하였다. 왜냐하면 벌써부터 사람들은 신동과 같은 리스트를 새로운 모차르트와 베토벤이라고 치켜세우며 찬사를 보낼 것이기 때문이었다. 1823년 9월, 리스트와 가족은 비엔나를 떠나 파리로 향했다. 파리로 가면 돈을 더 잘 벌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리스트는 파리로 가는 도중 뮈헨, 슈투트가르트, 아우구스부르크, 스트라스부르 등지에서 피아노 연주회를 가졌다. 사람들은 모차르트가 돌아왔다고 하면서 박수를 보냈다. 리스트는 당시의 모차르트보다 4살 위였다. 그해 12월 11일 리스트와 가족들은 파이에 도착했다. 아버지인 아담은 당장 다음날 리스트를 데리고 파리음악원을 찾아가 입학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담은 파리음악원이 아들 리스트의 천재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두말하지 않고 입학을 허가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학장이던 케루비니(Cherubini)는 파리음악원의 피아노과에는 프랑스 학생들만 레슨을 받을수 있다는 규정을 들어 리스트의 입학이 곤란하다고 말했다. 이제 절망스럽기는 했지만 리스트의 유일한 교사는 아버지뿐이었다. 아담은 리스트에게 메트로놈을 놓고 스케일과 에튀드를 연습토록 했다. 그리고 매일 바흐의 후가를 각각 다른 키(調)로 연습토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