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오스트리아 작곡가

Franz Liszt(프란츠 리스트) - 4

정준극 2009. 5. 28. 22:18

Franz Liszt(프란츠 리스트) - 4

 

 

 

리스트는 제네바에 있으면서 우연히 멘델스존 및 쇼팽과 교류하게 되었다. 리스트가 파리에 다시 돌아왔을 때에 즈음하여 멘델스존과 쇼팽도 파리를 방문하였다. 파리의 문화생활이 호전되었기 때문이었다. 멘델스존과 쇼팽은 가방에 새로 쓴 악보들을 잔뜩 넣어가지고 왔다. 그러나 리스트는 내놓을 것이 없었다. 다만, ‘신부 판타지’(Bride Fantasy)라는 소품 한 곡 뿐이었다. 나중에 멘델스존과 쇼팽은 자기 친구들에게 리스트에 대한 인상을 다음과 같이 적어 보냈다. 멘델스존은 “리스트는 전체 악보를 암기하여 연주했다. 하지만 잘못 암기하고 연주했다. 그래서 잘못된 하모니가 나올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쇼팽은 한술 더 떠서 ’파리에 있는 피아니스트들은 리스트를 포함하여 모두 수준이 제로이다. 독일의 칼크브렌너(Kalkbrenner)에 비견할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칼크브렌너는 당시 독일의 신예 피아니스트였다. 리스트로서는 충격적인 사항이었다.

 

네 시절의 리스트 (소년시절, 청년시절, 장년시절, 노년시절) 

 

또 다른 사항이 리스트의 활동에 영향을 주었다. 이번에는 종교문제였다. 성시몬 수도회에 속한 앙팡탱(Enfantin)신부가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결혼은 여성을 감옥에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결혼은 죄악과 같다’는 주장을 했다. 앙팡탱 신부를 추종하는 리스트는 새로운 결혼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결혼이란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좋으며 만일 연애가 필요하면 진정한 연애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때 리스트는 예쁘고 재능 있는 발레리 부이씨어(Valerie Boissier)라는 여학생에게 피아노 레슨을 하고 있었다. 발레리의 어머니는 리스트를 장래의 사윗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기미를 알아차린 리스트는 앙팡탱 신부의 주장을 상기하고 당장 레슨을 중지하였다. 그후 리스트는 오로지 예술가로의 자기 개발에만 집중하였다. 그랬을까? 리스트는 훤칠하게 잘 생겼다. 배우처럼 생겼다. 게다가 천재적인 피아니스트이며 언변도 좋다. 그에게 수많은 여성들이 호감을 보였던 것은 숨길수 없는 사실이다.

 

리스트는 1832년 4월 니콜로 파가니니가 주관하는 파리 콜레라 희생자를 위한 자선음악회에 참여하였다.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보고 자기도 그와 같은 거장(비르투오조)이 되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로부터 리스트는 매일 12시간씩 연습을 하였으며 어떤 때는 올빼미처럼 밤을 꼬박 지새우며 피아노와 씨름하기도 했다. 3도 음정, 6도 음정, 옥타브, 트레몰로, 복주(複奏), 카덴짜, 아르페지오, 트릴 등을 수없이 반복하며 연습했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면 오히려 효율이 줄어든다고 생각한 리스트는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휴가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리스트가 마리 다구(Marie d'Agoult)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리스트가 휴가를 떠난 1933년-1935년 사이에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간 중에 리스트는 펠리시테 드 라메네(Felicite de Lamannais)도 만났다. 두 사람과 친교를 맺게 된 이후부터 리스트의 작곡 활동은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열정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기간동안 리스트는 10여편에 이르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 쇼팽의 마주르카 주제에 의한 피아노와 바이올린 2중주 소나타, 멘델스존의 ‘무언가’의 가곡을 주제로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 등을 작곡했다. 그러나 1935년 5월, 리스트는 갑자기 작곡을 중지했다. 더 이해할수 없던 것은 나중에 리스트는 조르즈 상드(George Sand)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작곡했던 모든 작품을 불속에 던져 넣고 싶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변덕?

 

마리 다구를 만나기 전, 리스트의 생애에서 제자였던 캐롤린 드 생 크리크(Caroline de Saint-Crique)와의 러브 어페어는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 캐롤린은 참으로 순진무구한 여자였다. 주위에서 그를 ‘세상의 천사’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세상의 온갖 욕정은 도무지 생각하지도 않는 여자였다. 다만, 캐롤린은 대단한 미인이었고 게다가 부자였다. 1828년, 리스트는 16세 때에 캐롤린의 피아노 선생이 되었다. 그때 캐롤린은 17세였다. 리스트는 연애니 애정이니 하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오로지 피아노 레슨에만 치중했다. 두 사람은 우연히 종교적인 성스러운 것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가 서로 견해가 같은 것을 알고 마음을 터놓게 되었으며 급기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캐롤린의 어머니도 두 사람의 관계를 묵인하고 언젠가 결혼하게 되기를 바랐다. 몇 달후 불행하게도 캐롤린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캐롤인의 아버지는 샤를르 10세 정부에서 상무장관이었다. 캐롤린의 아버지는 리스트를 '웬 빌어먹을 깡깽이같은 놈이냐'면서 리스트와 캐롤린의 결혼을 적극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어느날 드디어 캐롤린의 아버지는 캐롤린을 찾아온 리스트에게 현관문을 가리키며 나가라고 했다. 캐롤린은 쓰러져 눕게 되었고 리스트는 신경쇠약에 걸려 고생해야 했다. 캐롤린은 신앙심이 남달리 깊었던 것 같다. 캐롤린이 리스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나의 인생을 유일하게 이끌고 가는 빛나는 별로 생각합니다. 나는 매일 하나님께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할수 없는 축복을 내려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당신의 뜻을 이루어주기를 기도합니다’라고 썼다.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2년후 캐롤린은 아버지가 정해준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결혼후 캐롤린은 남편과 함께 파리를 떠나 남불의 작은 마을로 이사 갔다. 나중에 리스트는 ‘나는 캐롤린이 보기에 어린아이였다. 거의 바보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리스트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코지 판 투테'(여자는 다 그래)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H 단조 오리지널 악보 

 

그로부터 얼마후에 불태운 아델르 드 라프뤼나데드(Adele de Laprunarede)와의 사랑도 언급하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아델레는 비록 결혼한 여성이었지만 대단히 매력적인 미모를 지니고 있으며 더구나 부유했다. 가난한 집 출신의 남자가 부자 여인을 만나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인지상정이리라. 리스트는 처음으로 아델레와 오랜 연애를 즐겼다. 두 사람은 1932년의 겨울에 사보이에 있는 말리오츠(Marliotz)성에서 추억어린 시간을 보냈다. 사방이 온통 눈과 얼음으로 둘러싸인 적막한 곳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의 불길은 차가운 얼음을 녹이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 때에도 리스트는 캐롤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는 한낱 바보에 불과했다. 나는 용기가 없었다.’라는 독백으로 마감하였다. 이밖에도 젊은 리스트에게는 수많은 러브 어페어가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리스트가 제비여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여인들이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의 딸을 리스트와 결혼시키고자 했던 여인이 리스트를 좋아했던 일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리스트의 어머니의 친구가 리스트를 좋아하여 이상한 관계에 놓일뻔 한 일도 있었다. 평생여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