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z Liszt(프란츠 리스트) - 3
파리에 도착한 이래 리스트는 프랑스어를 아주 빠르게 습득했다. 아마 천부적인 언어 재능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프랑스어는 리스트의 일반어가 되었다. 리스트는 1824년(13세) 파리의 이탈리아극장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사람들은 리스트를 ‘프티 리스트’(Petit Liszt: 어린 리스트)라고 부르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후 파리에서는 ‘어린 리스트’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리스트는 아버지와 함께 세 번이나 런던을 방문했다. 리스트는 런던에서 ‘마스터 리스트’로 알려졌다. 그렇게 하여 리스트는 돈을 많이 벌었다. 아버지 아담은 6만 프랑이라는 거금을 주식에 투자하였다. 한때 그의 고용주였던 에스터하지 공자의 주식을 샀던 것이다. 투자된 돈은 1866년 리스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간직되었다. 리스트의 어머니는 투자된 돈에서 나오는 이자로 생활을 했었다. 1824년 리스트는 안톤 라이하(Anton Reicha)와 페르디난도 패르(Ferdinando Paer)의 문하에서 작곡을 공부했다. 그때 이미 리스트는 몇곡의 협주곡, 소나타, 실내악곡 등을 작곡했다고 한다. 당시에 리스트가 작곡했다는 곡들은 악보를 잃어버려 알수 없지만 피아노 곡만은 1824년에 출판되어서 남아 있다.
젊은 시절의 리스트
리스트의 작품들은 한때 스승이었던 체르니의 스타일을 닮은 것이었다. 리스트의 피아노 재능은 당대의 거장이라고 하는 지기스몬트 탈버그(Sigismond Thalberg)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아버지 아담은 아들 리스트의 이름으로 출판된 악보들을 자랑스러운 심정으로 체르니에게 보냈다. 체르니는 아담에게 답장을 보내어 ‘이걸 도대체 작품이라고 썼느냐? 작곡에 대한 공부를 더 해야 할것 같다. 공연히 출판비만 낭비한 것 같다’라고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리스트의 작곡 솜씨가 형편없다고 완곡하게 표명했다. 아담은 체르니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다. 그래서 다른 작품들을 출판하지 않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스트에 대한 비평은 이곳저곳에서 나왔다. 알로이스 슈미트(Alois Schmidt)는 페르디난트 힐러(Ferdinand Hiller)에게 보낸 서한에서 ‘리스트는 자기가 작곡에 전혀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1858년의 리스트
1824년(13세), 리스트는 패르(Paer)의 도움을 받아 오페라 ‘돈 산체’(Don Sanche 또는 Le chateau de l'amour)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이 오페라는 이듬해인 1825년 아카데미 로얄 드 무지크(왕립음악아카데미)강당에서 초연되었다. 실패였다. 이후 리스트는 마치 음악에 취미를 잃은 사람처럼 보였다. 대신 종교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성당에 가서 하루종일 앉아 있기가 일수였다. 그러나 그게 맘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아버지 아담의 강요에 따라 계속 연주회를 가져야 했다. 작곡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1826년 마르세이유에서 작곡한 에뛰드는 오늘날 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1827년(16세), 리스트는 병에 걸려 꼼짝할수 없게 되었다. 너무 강행군으로 지방 순회연주를 했기 때문에 여독으로 병에 걸린 것 같았다. 아버지는 리스트를 영국해협에 있는 온천장인 불로뉴 쉬르 메르(Boulogne-sur-Mer)로 보냈다. 얼마후 리스트의 병세는 호전되어 건강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버지가 장질부사에 걸렸다.그해 8월 리스트의 아버지 아담은 세상을 떠났다. 리스트는 아버지의 장례를 위하여 장송곡을 작곡하였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아버지로부터의 해방을 표현한 곡이었다고 한다. 아담은 불로뉴에 안장되었다. 리스트는 생전에 아버지의 묘소를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리스트는 언제까지 ‘신동 리스트’에 머물수 있을지 회의에 빠졌다.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이제는 더 이상 신동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작곡에 있어서도 뛰어난 점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리스트는 인생의 방향을 정해야 했다.
리스트는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에 비하여 실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통하여 소양을 높이고 지식을 쌓고자 했다. 1886년(배재학당이 설립된 해), 그가 세상을 떠날 때에 그는 수천권의 귀중한 서적들을 남겼다. 그만큼 책을 많이 읽고 사랑하였다.
종교에 귀의한 시절의 리스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후 리스트는 파리로 돌아왔다. 그후 몇 년동안 리스트는 어머니를 모시고 힘들게 살았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누가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다. 리스트는 생활을 위해 피아노와 작곡 레슨을 했으며 어떤 여학교의 음악 강사로도 나갔다. 살론에서의 연주는 사례를 받을수 있는 것이기에 자주 참석하였다. 당시에 개인 저택이나 살론에서의 연주는 주로 친목을 위한 것이어서 사례가 거의 없었다. 음악가들에게 약간이나마 경제적 도움을 주기 위해 나선 사람이 로시니였다. 로시니는 간혹 자기 집에 몇몇 연주자들을 초청하여 연주회를 가졌다. 떠들고 마시고 하는 사교 모임의 연주회가 아니라 순수한 살론 연주회였다. 로시니는 나중에 참석했던 청중들로부터 후원금을 받아 연주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말하자면 음악회 매니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리스트는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로시니와도 친분을 맺었다.
1830년 7월 파리에는 혁명의 기분이 휩쓸었다. 샤를르10세가 입헌군주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절대군주제를 세우려고 시도했다. 이에 반대하는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혁명의 횃불을 들었다. 리스트의 아파트는 위치적으로 혁명의 중심지역에 있었다.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피흘리는 혁명을 본 리스트는 ‘혁명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혁명을 주도했던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악마를 사탄으로 바꾼 역할 밖에 하지 못했다. 새로 국왕이 된 루이-필립은 전보다 더 가혹한 법들을 제정하여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렸다. 실망한 리스트는 ‘혁명 교향곡’의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하지 않고 중지했다. 나중에 리스트는 교향시 Heroide funebre를 작곡할 때에 ‘혁명 교향곡’의 1악장을 인용하였다.
혁명으로 인하여 파리인의 문화생활은 더할수 없이 위축되었다. 새로운 정권에 반대하는 사회 지도층과 귀족들이 거의 모두 도시를 빠져 나갔기 때문에 음악회를 후원할 사람들이 없게 된 것이었다. 음악가들은 내무장관에게 탄원서를 내고 음악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어떤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청했다. 리스트도 이 탄원서에 서명했다. 그해 12월 파리에서는 베를리오즈의 환상적교향곡이 초연되었다. 대성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음악가들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듬해 초, 리스트는 파리를 떠나 제네바로 갔다. 그러나 제네바라고 해서 리스트를 두 손 들고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리스트는 거의 2년동안 두문불출하며 음악활동을 하지 않았다. 1832년 루앙(Rouen)에서 연주회 초청이 있었다. 리스트는 마음을 새롭게 하고 루앙의 연주회에 참석키로 했다. 그리하여 파리로 되돌아왔다.
리스트가 14세 때에 작곡한 오페라 '돈 산체'(돈 상슈)의 주인공 의상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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