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z Xaver Süssmayr(프란츠 사버 쥐쓰마이르)
모차르트의 레퀴엠 완성
모차르트와 쥐쓰마이르가 완성한 레퀴엠(진혼곡) 음반 쟈켓
작곡가 프란츠 사버 쥐쓰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는 모차르트 최후의 작품인 진혼곡(Requiem)의 마지막 부분을 완성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쥐쓰마이르는 1766년 슈봐넨슈타트(Schwanenstadt)에서 태어났다. 모차르트보다 꼭 10년 나중에 태어났다. 쥐쓰마이르의 아버지는 슈봐넨슈타트 성당의 성물관리인 겸 교사였다. 쥐쓰마이어의 어머니는 그가 6세 때에 세상을 떠났다. 쥐쓰마이르는 13세 때에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 쥐쓰마이어는 크렘스뮌스터(Kremsmünster)의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음악공부를 하면서 성가대의 솔리스트로 활동하였다. 쥐쓰마이어는 목소리가 변성이 되자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주자가 되었다. 수도원에서는 간혹 손님들(신도들)을 초청하여 오페라와 징슈필을 공연하였다. 쥐쓰마이르는 글룩, 살리에리 등의 오페라를 공부할 기회를 가졌다. 작곡에 재능을 보인 쥐쓰마이어는 수도원을 위하며 여러편의 미사곡과 무대음악을 작곡하였다. 1787년 이후 쥐쓰마이어는 비엔나에 가서 살리에리의 제자가 되었다. 1792년에는 캐른트너토르극장의 부음악감독 겸 전속 작곡가가 되었다.
쥐쓰마이르가 음악공부를 했던 크렘스뮌스터 수도원
모차르트와의 인연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티토의 자비’와 ‘마술 피리’의 악보를 정리해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791년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작인 진혼곡을 완성하여 음악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쥐쓰마이르는 살리에리의 제자이면서 모차르트로부터 작곡 공부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쥐쓰마이르와 모차르트의 관계는 모차르트의 부인인 콘스탄체가 적극 권장하였다고 한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선금까지 받은 진혼곡의 작곡을 늦추고 있자 친구 겸 제자인 쥐쓰마이르에게 진혼곡 작곡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모차르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완성한 부분까지의 진혼곡 악보를 쥐쓰마이르에게 주며 마지막 파트를 완성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쥐쓰마이르는 약속대로 1백일 후에 모차르트의 스타일을 참고하여 진혼곡을 완성한후 콘스탄체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쥐쓰마이르가 합창지휘자로 활동했던 비엔나 국립극장(부르크테아터: 궁정극장)의 완공 당시의 모습
쥐쓰마이르는 또한 모차르트가 1791년에 초고만 만들어 놓은 혼(Horn)을 위한 론도를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후 완성하였다. 쥐쓰마이르는 오페라도 작곡하였다. 에마누엘 쉬카네더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1792년 초연된 첫 작품인 모세(Moses 또는 출애급: Der Auszug aus Ägypten)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1794년에 내놓은 Der Spiegel von Arkadien(아르카디아의 거울)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유럽 여러 곳에서 공연되었다. 역시 쉬카네더 프로덕션이었다. 이 오페라의 성공으로 쥐쓰마이르는 국립극장에서 독일 오페라를 제작하는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때로부터 1800년까지 쥐쓰마이르는 비엔나에서 성공적인 음악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활동을 할수 없게 되었고 마침내 1803년, 3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폐렴이었다. 쥐쓰마이르는 어떤 여인과 결혼키로 약속되어 있었으나 결혼식도 치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없었던 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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