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오스트리아 작곡가

프릿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

정준극 2009. 5. 29. 22:28

프릿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

 

 

 

프릿츠 크라이슬러는 비엔나에서 태어났지만 젊은 시절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활동하다가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음악가이기도하고 미국의 음악가이기도하다. 크라이슬러는 세기적인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작곡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준 인물이다. 1875년 프란츠 요셉 황제 시절에 비엔나에서 태어난 그는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서 감미로운 음조와 풍부한 감정의 개성적인 멜로디를 만들어 만인의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크라이슬러는 연주기법이 프랑스-벨기에 학파에 속하지만 그의 스타일은 전쟁 전의 비엔나 생활스타일인 게뮈틀리히(Gemütlich: Cozy)를 회상케 해준다.

 

엘리자베트 왕비(씨씨)의 결혼전 모습 

  

크라이슬러는 1875년 비엔나에서 유대인 아버지와 가톨릭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은 2구 레오폴드슈타트의 그로쎄 쉬프가쎄 21번지로서 생가라는 명판이 붙어 있다. 크라이슬러는 유대교인이었지만 모계를 따라 12세 때에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그는 일찍이 비엔나음악원과 파리음악원에서 공부했다. 그의 스승으로는 레오 들리브(Leo Delibes), 요셉 헬메스버거(Joseph Helmesberger), 쥘르 마스네(Jules Massenet) 등을 꼽을수 있다. 1888년 그는 13세의 나이로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뉴욕의 슈타인웨이 홀(Steinway Hall)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그후 비엔나로 돌아온 그는 비엔나 필하모닉의 단원으로 응모했다. 당시 악장이던 아놀트 로세(Arnold Rose)는 그의 입단 요청을 거절했다. 로제는 비브라토를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크라이슬러는 비브라토를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서로의 취향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낙담한 크라이슬러는 약학을 공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아 군에 입대하였다. 잠시 동안 군에 머물렀던 그는 1899년 다시 바이올린을 잡았다. 베를린 필과 협연을 갖게 된것이다. 이로부터 크라이슬러의 인기는 날마다 높이 올라갔다. 크라이슬러는 다시 미국행 배를 탔다. 1901-03년의 미국 순회연주는 대성공이었다. 이제 크라이슬러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가 되었다.

 

크라이슬러가 태어난 2구 그로쎄 쉬프가쎄 21번지의 기념 명판. '바이올린의 대가이며 작곡가인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1875년 2월 2일 이 집에서 태어났다'는 내용이다.

 

1910년 크라이슬러는 에드워드 엘가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초연하였다. 이 협주곡은 엘가가 크라이슬러에게 헌정한 작품이었다. 몇 년후 1차 대전이 발발하였다. 크라이슬러는 다시 군에 입대하여 전투에서 부상당한후 명예제대하였다. 미국으로 건너간 크라이슬러는 1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미국에 체류하면서 연주활동을 했다. 1924년 유럽으로 돌아온 그는 처음에 베를린에서 살았다. 그후 1938년 나치가 득세하자 파리로 건너왔다. 얼마후 2차 대전이 터졌다. 그는 유태인에 대한 학대를 피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1943년 그는 미국시민으로 귀화하였다. 이후 생의 마칠 때까지 미국에서 살았다. 크라이슬러는 1962년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무대 연주는 1947년이었다. 1950년대 말에 그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로 인하여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는 말년을 고통 속에서 지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음악처럼 신사답고 세련되었으며 사랑스러운 모습을 잃지 않았다. 크라이슬러와 그의 부인은 정식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프릿츠 크라이슬러 

 

크라이슬러는 수많은 바이올린 작품을 남겼다. 솔로곡으로는 ‘사랑의 슬픔’(Liebesleid)와 ‘사랑의 기쁨’(Liebesfreud) 등이 있다. 어떤 곡들은 초기 음악가들의 작품을 인용한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사람들은 크라이슬러가 비발디나 타르티니의 음악을 인용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크라이슬러는 순전히 자기의 작품임을 강조하였다. 크라이슬러는 오페레타도 작곡하였다. 1919년에 Apple Blossoms(애플 블라썸스)를, 1932년에는 Sissy(씨씨)를 작곡했다. ‘씨씨’는 영광과 비운의 합스부르크 왕비인 엘리자베트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그는 브람스의 D장조 바이올린 협주곡, 파가니니의 D장조 바이올린 협주곡, 베토벤의 D장조 바이올린 협주곡에 카덴짜를 붙여 발표했다. 베토벤의 협주곡에 대한 카덴짜는 오늘날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이다. 크라이슬러는 골동품 바이올린 수집가였다.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피에트로 과르네리, 주세페 과르네리, 카를로 베르곤지의 바이올린을 보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