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orgy Ligeti(기요르기 리게티)
루마니아의 헝가리어를 사용하는 유태계 가정에서 태어난 기요르기 리게티는 20세기를 주도한 현대 작곡가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헝가리 스타일로 리게티 기요르기 산도르(Ligeti Gyorgy Sandor)이지만 서구식으로 기요르기 리게티라고 짧게 부른다. 리게티는 1923년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의 티르나베니(Tirnaveni)에서 태어났다. 오늘날의 타르나베니(Tarnaveni)이다. 루마니아에서는 디치오산마르틴(Diciosanmartin)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리게티는 한때 잠시 헝가리에 살았으며 나중에 오스트리아 시민이 되었다. 리게티의 작품은 고전음악계에서 상당한 관심을 끌었지만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의 작품이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의 작품은 스탠리 쿠브릭(Stanley Kubrick)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A Space Odyssey), ‘샤이닝’(The Shining), ‘아이스 와이드 셧’(Eyes Wide Shut)에 나오기 때문에 익숙해 졌다.
스탠리 쿠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쎄이'의 한 장면. 우주 셔틀
그가 태어난 트란실바니아의 타르나베니에는 대부분 헝가리인들의 마을이지만 유태인들이 많이 살았다. 리게티는 헝가리어와 유태어를 사용하며 자랐다. 그래서 다른 언어가 있는 줄을 몰랐다고 한다. 그는 6세 때에 가족과 함께 클루이(Cluj)라는 마을로 가서 살았으며 1900년까지 고향 타르나베니로 돌아가지 않았다. 리게티는 클루이(헝가리어로는 Kolozsvar)에서 음악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음악공부는 1843년 나치가 그를 유태인이라고 하여 강제 노역에 동원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그때 리게티는 20세였다. 당시 16세 였던 그의 동생은 마우타우젠(Mauthausen) 강제수용소로 보내졌고 부모는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리게티의 가족은 나치에 의해 2차 대전중 거의 죽임을 당하고 오로지 리게티와 그의 어머니만이 천신만고 끝에 생존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리게티는 부다페스트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여 1949년 부다페스트음악원을 수료했다. 그는 부다페스트에서 졸탄 코다이(Zoltan Kodaly), 산도르 베레쓰(Sandor Veress)등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얼마후 리게티는 모교에서 화성악, 대위법, 음악분석학 등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리게티의 재능은 뛰어났지만 서구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헝가리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서 철의 장막으로 유럽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리게티가 태어난 타르나베니의 중심가
1956년 12월, 역사적인 헝가리봉기가 소련의 탱크에 의해 진압된지 두달 후에, 리게티는 극적으로 비엔나로 넘어 갈수 있었으며 나중에 비엔나 시민이 되었다. 독일의 쾰른으로 간 리게티는 이곳에서 칼하인츠 슈토크하우젠(Karlheiz Stockhausen), 고트프리트 미하엘 쾨니히(Gottfired Michael Koenig)등 아방 갸르드의 기수들을 만나 현대음악의 스타일과 작곡 방식에 대하여 배울수 있었다. 슈토크하우젠과 쾨니히는 모두 전자음악의 기초를 닦은 작곡가들이다. 이들의 스튜디오에서 함께 일한 리게티는 이곳에서 들은 사운드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그러나 리게티는 전자음악을 중점으로 작곡하지는 않았다. 그의 음악은 기악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다만, 간혹 전자음악적 음향효과는 표현하기도 했다.
리게티의 작품은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다. 1958년에 내놓은 Apparitions(환영)으로부터 1967년의 Lontano(론타노)까지가 전성기라고 할수 있다. 물론 그의 마지막 오페라인 Le Grand Macabre(1978)도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최근에 내놓은 피아노 연습곡(Piano Etudes)도 특별한 관심을 끌었다. 리게티는 1973년부터 함부르크음악대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1989년 은퇴하였다. 아마 이때가 그의 작곡 생활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작곡을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리게티의 마지막 작품은 18개의 피아노 연습곡인 ‘캐논’(Canon)으로서 2001년 완성했다. 이작품의 형식은 리게티의 고향인 중부유럽의 음악적 언어가 담겨 있는 것이다. 리게티는 2006년 6월 12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리게티는 말년의 3년동안 휠체어를 타야 했고 상당기간 동안 병마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났지만 가족들은 그가 무슨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지 밝히지를 않고 있다.
오페라 '그랑 마카브르'의 한 장면
리게티는 작곡가이면서도 문학과 미술과 건축, 그리고 과학과 수학, 특히 미적분 수학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 리게티는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레오폴드 아우어(Leopold Auer)의 손자격이 된다. 리게티의 아들인 루카스 리게티(Lucas Ligeti) 역시 작곡가 겸 타악기 주자로서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다.
루카스 리게티
'비엔나와 음악 > 오스트리아 작곡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Heinz Karl Gruber(하인츠 칼 그루버) (0) | 2009.05.29 |
---|---|
Hanns Jelinek(한스 옐리네크) (0) | 2009.05.29 |
- 말러의 부인 Alma Schindler(알마 쉰들러) (0) | 2009.05.29 |
Gustav Mahler(구스타브 말러) - 5 (0) | 2009.05.29 |
Gustav Mahler(구스타브 말러) - 4 (0) | 2009.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