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러의 부인 Alma Schindler(알마 쉰들러)
결혼후 이름은 알마 말러 베르펠(Alma Mahler-Werfel)
알마 쉰들러. 오스카 코코슈카 그림
20세기 초반 비엔나를 중심으로 한 저명인사들의 리스트를 파악하려면 알마 쉰들러의 생애를 보면 된다. 알마 쉰들러는 20세기에서 비엔나의 문화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이었다. 때문에 당시 비엔나의 뛰어난 문화예술인들로서 알마 쉰들러를 모른다거나 만나 본 일이 없다고 하면 그건 말이 안되는 소리였다. 1879년 비엔나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알마 쉰들러는 미모와 지성으로 당시 사회를 주름잡았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알마 쉰들러는 문화예술계의 인사로서 유명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스캔들 제조기로서 더 유명했다. 그래서 혹자는 알마 쉰들러를 팜므 파탈레(Femme fatale)의 일원으로 간주했다. 다시 말해서 알마 쉰들러는 좋게 말해서 정열의 여인이고 나쁘게 말해서 요부이다. 알마 쉰들러의 남성 편력을 요약해 보면, 알마 쉰들러는 20세기를 주도한 위대한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구스타브 말러(Gustav Mahler)의 첫번째 부인이었으며 뛰어난 건축가로서 세계적인 바우하우스의 창시자인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의 부인이었고 유명한 작가 프란츠 베르펠(Franz Werfel)의 부인이었다. 알마 쉰들러는 세번이나 결혼했지만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알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정사를 한번도 아니고 몇번이나 펼쳐서 대단히 유명했다. 대표적인 경우는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와의 스캔들이었다. 그건 그렇고 알마는 세 번이나 결혼했기 때문에 자기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표기할 때에 어떤 남편의 성(姓)을 따라야 하는지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결혼전의 성인 쉰들러를 고수하여 알마 쉰들러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마 쉰들러보다는 보통 알마 말러라고 부르고 있다. 위대한 작곡가 구스타브 말러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그러나 알마는 공식적으로 자기 이름을 표기할 때에는 알마 말러-베르펠(Alma Mahler-Werfel)이라고 적었다. 남편들의 이름을 모두 나열하면 너무 길기 때문에 첫번째와 세번째 남편의 성만 따랐고 두번째 남편이었던 그로피우스의 이름은 생략한 것 같다. 알마는 재능있는 작곡가였으며 재는있는 화가였다. 알마는 17곡의 가곡을 작곡하였다. 그리고 여러 미술작품들을 남겼다. 알마는 당대의 유명한 화가 에밀 야곱 쉰들러(Emil Jakob Schindler)의 딸이다. 알마의 어머니는 안나(Anna)로서 알마의 아버지 에밀 야콥 쉰들러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제자인 칼 몰(Carl Moll)과 재혼하였다. 칼 몰은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화가 중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알마는 법적으로 칼 몰의 딸이다. 알마의 아버지인 에밀 야콥 쉰들러가 비엔나의 저명인사인 것은 비엔나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슈타트파르크(시립공원)에 그의 기념상이 있는 것만 보아도 알수 있는 일이다.
위대한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구스타브 말러
알마의 아버지인 에밀 야콥 쉰들러는 비엔나의 여러 지식인, 예술가들과 친분을 맺고 지냈다. 그중에는 구스타브 클림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알마는 처녀시절에 클림트를 좋아하여 그에게 첫 키스를 했다. 클림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키스’(Der Kuss)는 알마 쉰들러와의 첫 키스를 생각하여서 그린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알마는 당시 상류층 가정의 처녀답게 바람기가 있었다. 알마는 화가 클림트, 감독인 막스 부어카르트(Max Burckhard), 작곡가 알렉산더 쳄린스키(Alexander Zemlinsky)등과 염문을 뿌렸다. 그러다가 알마는 22세 때에 구스타브 말러와 결혼했다. 그때 말러는 알마보다 20년이나 나이가 많았다. 말러와 알마 사이에서는 두 딸이 태어났다. 첫째 딸 마리아 안나(1902-1907)는 장질부사로 열살 때 쯤 세상을 떠났고 둘째 딸 안나(1904-1988)는 오래 살아서 나중에 조각가 겸 작가가 되었다. 알마와 말러의 결혼은 그다지 순탄하지가 않았다. 알마는 음악과 그림에 대하여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결혼으로 예술에 대한 열심을 계속 밀고나가기가 어렵게 되었다. 말러도 알마가 예술활동을 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다. 일종의 묘한 경쟁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얘기가 있었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알마는 자기의 예술에 대한 열망을 충족하기 위해 다른 예술가들과 러브 어페어를 가지게 되었다. 첫 상대는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였다. 이 사실을 안 말러는 프로이드를 찾아가 자문을 받기까지 했다. 알마는 말러가 1911년 세상을 떠나자 그로피우스와 결혼했다. 알마와 그로피우스 사이에서는 딸이 하나 태어났다. 마농(Manon: 1916-1935)였다. 마농은 17세의 꽃같은 나이로 소아마비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알반 베르크는 마농의 죽음을 애도하여 바이올린 협주곡 '천사의 죽음에 붙여'(On the Death of an Angel)를 마농에게 헌정했다.
구스타브 클림트의 '키쓰'. 알마가 모델이라는 얘기다.
알마의 누드를 그린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 알마의 세번째 공식 남편인 베르펠의 가족들은 이 그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여 소송을 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 그림을 베르펠의 가족에게 반환할지도 모른다. 1억5천만불에 해당한다.
알마와 그로피우스의 결혼생활은 그야말로 소란스럽고 거친 것이었다. 알마는 2년동안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와 관계를 갖고 지냈다. 코코슈카는 유명한 ‘바람의 신부’(Bride of the Wind)라는 작품을 그려 알마에게 선사하였다. 두 사람의 사랑을 표현한 작품이었다. 알마에 대한 코코슈카의 열정은 두려울 정도였다. 알마는 그런 열정이 두려워 코코슈카를 떠나 이번에는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Franz Werfel)에게 갔다. 알마는 베르펠의 아이까지 임신하였다. 알마는 1920년 그로피우스와 이혼하고 베르펠과 결혼했다. 그러나 이혼전에 베르펠과의 관계에서 임신한 아이는 미숙아로 태어났다가 10개월만에 삶에 대한 투쟁을 포기하고 숨을 거두었다.
알마 쉰들러의 남자들: 왼쪽으로부터 발터 그로피우스, 오스카르 코코슈카, 프란츠 베르펠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유태인에 대한 핍박이 시작되자 알마는 유태인인 베르펠과 함께 프랑스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도 안심하고 지낼 형편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마르세이유에서 미국 언론인인 버라이안 프라이(Varian Fry)를 만나 그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갔다가 이어 포르투갈로 건너가 미국으로 도피할수 있었다. 버라이안이 프랑스에서 유태인 지식인들을 구출하는 얘기는 영화 Varian's War(더러운 전쟁)에 소개되었다. 두 사람은 처음에 뉴욕에 도착하였으나 나중에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베르펠은 그의 소설 ‘베르나데트의 노래’(Song of Bernadette)가 제니퍼 존스(Jennifer Jones)의 주연으로 영화가 되어 히트하는 바람에 성공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1945년 베르펠이 세상을 떠나자 알마는 뉴욕으로 옮겨 사교계의 주요인사로 활동했다. 알마는 거의 20년후인 1964년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가수 톰 레러(Tom Lehrer)는 ‘알마’라는 제목의 노래로 알마의 분방한 결혼생활을 노래하였다. 2001년 브루스 베러스포드(Bruce Berersford)가 ‘바람의 신부’라는 영화를 제작하였다. 알마의 일생을 조명한 작품이었다. 알마의 시신은 비엔나로 이송되어 그린칭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로피우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나 일찍 세상을 떠난 마농의 묘에 합장되었다. 알마의 묘는 말러의 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다. 말러의 묘지 옆에는 알마와의 사이에서 태어나 4살 때에 성홍렬로 세상을 떠난 큰 딸 마리아의 묘지가 있다. 베르펠의 유해는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결혼 전의 알마 쉰들러. 23세 때.
알마 말러와 오스카 코코슈카의 러브 어페어를 그린 영화 '바람의 신부'. 알마역은 사라 윈터(Sarah Wynter), 코코슈카 역은 조나탄 프라이스(Jonathan Pryce), 그리고 구스타브 클림트 역은 빈센트 페레즈(Vincent Perez)가 맡았다.
알마 말러가 그린 풍경화
두 딸인 마리아와 안나와 함께. 큰딸 마리아는 4살 때에 세상을 떠났으나 안나는 나중에 유명한 조각가가 되었다.
세번째 공식적인 남편인 작가 베르펠과 함께 (뉴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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