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낭만의 프라터

하코아 스포츠 센터(Hakoah Sports Centre)

정준극 2009. 6. 1. 12:27

하코아 스포츠 센터(Hakoah Sports Centre)

 

오스트리아 사람으로서 하코아(Hakoah)축구팀을 모른다면 말이 안된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축구를 밥 먹는 것보다도 더 좋아한다. 일요일에 성당은 나가지 않더라도 집에 앉아서 비록 생중계가 아닌 재탕이라고 해도 축구 중계는 봐야 한다. 하코아 축구팀은 1924-25년 축구 시즌에 오스트리아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한 팀이다. 하코아 축구팀 출신의 벨라 구트만(Bela Guttmann)은 브라질과 포르투갈에서 전설적인 축구코치로서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구트만은 당시에는 생소하였던 4-2-4전법을 도입하여 소속 팀들을 승리로 이끌었다. 구트만은 브라질팀의 코치로 있을 때 축구황제 펠레를 비롯하여 디디(Didi), 바바(Vava) 등과 함께 경기를 이끌었으며 리스본팀에 있을 때에는 전설적인 유세비오를 발탁하여 포르투갈팀을 세계 최강으로 만든 인물이다. 그러므로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은근히 오스트리아야 말로 세계 축구의 사령탑이라면서 자랑하고 있다. 그러한 하코아 축구팀의 본부가 프라터에 있었다. 현재는 ‘칼 하버 스포츠 센터’라는 명칭의 시설에 속해 있다.

 

하코아 축구팀. 건장한 유태인 남성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운동팀이다.

 

하코아 축구팀은 비엔나에서 야기된 하코아 운동의 일환으로 출범하였다. 하코아 운동은 유태인식 ‘체력이 국력’ 운동이지만 배경에는 시온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하코아 운동은 기본적으로 체력이 강해야 애국을 할수 있다는 운동이다. 유태인들 스스로가 강인한 스파르타 정신을 지니자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하코아(Hakoah)는 ‘힘’(Kraft: Strength)을 말한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이 운동을 남성적 유태주의(Muskeljudentum: Muscular Judaism)라고 불렀다. 하코아 운동은 1909년에 시작되었다. 비엔나에 있는 유태인 대학생들이 일반 대학생들의 사회로부터 소외되자 스스로 자부심을 키우기 위해 조직한 운동이다. 중심인물은 캬바레 음악의 작사자인 프릿츠 베다 뢰르너(Fritz Beda Löhrner)와 치과의사인 이그나즈 허만 쾨르너(Ignaz Herman Körner)였다. 이들은 허약한 유태인으로서는 냉혹한 사회에서 생존하기 힘들므로 우선 체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1차 대전이 끝난후 하코아 운동은 유태인 대학생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유태인 사이에서도 공감을 얻어 환영을 받았다. 이어 비엔나의 유태인 사회는 체력함양을 위해서는 스포츠를 강화해야 한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하여 ‘유태인스포츠협회’가 조직되었다.

 

위대한 축구인 벨라 구트만. 1900년 당시 오스트리아제국인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출생. 1981년 서거.

 

1차 대전이 끝나고 유럽의 지도가 다시 그려지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말기에 비엔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민자의 도시로서 각광을 받았다. 동구의 새로 생기는 나라에서는 민족간의 분규가 극렬하였으며 추방과 강제이동이 반복되었다. 특히 유태인에 대한 핍박은 날이 갈수록 더하였다. 전쟁 후의 사정을 예상했던지 유태인들은 전쟁 중에도 비엔나로 몰려들었다. 비엔나는 유태인 이민의 목적지가 되었다. 특히 갈리시아(Galicia: 옛 스페인 지역)에 있던 유태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비엔나로 생활터전을 옮겼다. 그리하여 1930년대 중반에는 비엔나에 약 20만명의 유태인들이 살게 되었다. 비엔나에서 유태인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하코아 운동은 1920년대에 들어서서 유태인 사회의 각분야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하코아 축구팀은 그렇게 하여 생겨났다. 하코아 축구팀은 1924-25년 시즌에 오스트리아 챔피언의 타이틀을 차지할 정도로 훌륭한 팀이 되었다. 하코아 축구팀은 자체 홍보를 위해 여러 나라를 순방한 최초의 축구팀이었다. 런던과 뉴욕에서의 축구경기는 열렬한 환영을 받은 것이었다. 1926년에도 뉴욕에서 축구경기가 개최되었다. 당시는 나치의 발호로 유태인들의 앞날이 불안하던 시기였다. 뉴욕에 간 비엔나의 유태인 축구선수들은 미국에서 반유태주의의 기색이 보이지 않자 미국 이민을 결심했다. 이들은 뉴욕에 남아서 ‘뉴욕하코아축구팀’을 결성했고 1929년에는 US Open Cup을 차지하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일부 선수들은 시온주의의 영향으로 이스라엘로 돌아가 ‘하오카 텔아비브 ’팀을 결성했다.

 

프라터의 축구장(Stadion) 부근에 있던 하코아 운동센터 건물은 비단 운동만 하는 시설이 아니라 비엔나 유태인 사회의 ‘만남의 장소’ 역할을 하였다. 특히 진보성향의 유태인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그러나 1933년부터 정치상황이 악화되는 것과 함께 유태인들의 스포츠 행사는 대단히 어렵게 되었다. 이 기간중에 상당수의 유태인 체육인들이 비엔나를 떠났다. 뛰어난 수영선수 겸 수구(워터 폴로)선수이며 또한 훌륭한 시인인 프리드리히 토르버그(Friedrich Torberg: 1908-1979)도 그 때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토르버그는 1920년대 후반에 오스트리아 수구팀을 기적의 팀으로 이끈 주역이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간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포츠시라고 할수 있는 Auf den Tod eines Fussballspielers(어떤 축구선수의 죽음에 붙여)를 발표한바 있다. 1938년 나치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다. 현재의 에른스트 하펠 스타디움(Ernst Happel Stadium) 부근에 있던 하코아 건물과 운동장은 나치에게 입수되었다. 나치는 이것도 소위 아리안화(Aryanised)정책의 일환이라고 내세웠다. 1941년부터는 모든 기록에서 하코아라는 명칭 자체를 완전히 제거했다. 비엔나의 유태인에 대한 체계적인 제거가 뒤를 이었다.

 

 

                  하코아 스포츠 클럽 로고

 

2차 대전이 끝난후 비엔나를 떠났던 일부 유태인들이 돌아왔다. 당시 비엔나의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 이후 약 6천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하코아 비엔나’를 재건코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예전에 프라터에서 사용하던 하코아 시설을 다시 사용할수 있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인 2002년이었다. 그전에 되돌려 받지 못했던 것은 전후의 복잡한 사정 때문이었으며 특히 오스트리아 정부의 까다로운 행정절차를 이기지 못해서였다. 그러다가 2002년 이른바 ‘워싱턴 협정’(Agreement of Washington)이 발효되자 오스트리아 정부는 유태인 사회가 프라터의 옛 하코아 부지를 사용하도록 허용하였다. 다만, 유태인종교공동체(IKG: Jewish Religious Community)가 프라터의 부지를 획득하고 이를 하코아협회에 임대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현대식 칼 하버 스포츠 센터(Karl Haber Sports Center)가 옛 부지에 건설되었다. 이 센터에는 다목적 강당, 소규모 경기장, 야외시설 등이 구비되어 있다. 야외시설로는 테니스 코트, 육상 트랙, 일광욕 잔디밭 등이 포함된다. 카스텔레즈가쎄(Castellezgasse)에 있던 유태인학교와 Maimonides 노인요양소도 프라터로 옮겨왔다. 교육센터에는 600명 학생을 수용할수 있으며 유치원, 초등학교, 김나지움이있다. 새로운 하코아 시설의 건설비는 약 1천만 유로가 들었다. 하코아 축구팀 대신에 SC 마카비 비엔나(Maccabi Wien) 팀이 설립되었다. 그리스(Seleucid Empire)군을 쳐부신 위대한 장군 마카비우스를 기리는 명칭이다. 2008년 3월에 모든 시설들이 완성되었다.

 

유다스 마카베우스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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