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오스트리아 작곡가

Robert Stolz(로베르트 슈톨츠)

정준극 2009. 6. 10. 23:32

Robert Stolz(로베르트 슈톨츠)

요한 슈트라우스 이후의 가장 위대한 비엔나 오페레타 작곡가

 

비엔나 슈타트파르크의 로베르트 슈톨츠 기념조각

 

로베르트 슈톨츠는 요한 슈트라우스 이후의 가장 뛰어난 비엔나 오페레타 작곡가라고 불리고 있다. 그는 그라츠에서 태어났고 미국에서도 살았지만 결국은 비엔나를 영원한 고향으로 삼고 지냈다. 비엔나에는 의외로 그를 기념하는 장소가 여러 곳이 있다. 1구 오페른 링 건너편에는 로베르트 슈톨츠 플라츠가 있다. 그가 그 근처의 건물에서 말년을 살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 건물에 기념 명판이 있다. 슈타트파르크에도 기념상이 세워져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황금기념상이 세워져 있는 슈타트파르크이다. 세계적인 유원지인 프라터에도 로베르트 슈톨츠 기념 조형물이 있다. 로베르트 슈톨츠는 평생에 30여편의 비엔나 오페레타를 작곡했다. 그의 멜로디는 너무나 인기를 끌어서 프라터의 기념비에는 멜로디의 한 소절이 그려져 있을 정도이다. 로베르트 슈톨츠의 발자취를 따라가본다.

 

독일이 로베르트 슈톨츠 탄생 100주년을 맞아 1980년에 발행한 기념우표

 

로베르트 슈톨츠의 원래 이름은 로베르트 엘리자베트 슈톨츠(Robert Elisabeth Stolz)이다. 1880년 그라츠에서 태어났다. 로베르트 슈톨츠는 유명한 소프라노 테레사 슈톨츠(Teresa Stolz)의 조카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테레사 슈톨츠로서 보면 로베르트 슈톨츠가 손자 뻘이 된다. 테레사 슈톨츠는 말년의 베르디를 헌신적으로 돌보아 주었던 여인이었다. 테레사 로베르트 슈톨츠의 아버지인 야콥 슈톨츠는 지휘자였고 어머니 이다는 콘서트 피아니스트였다. 음악적 환경에서 태어난 로베르트는 어릴 때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으며 특히 피아노를 누구의 도움 없이도 잘 쳤다. 그래서 불과 일곱 살때에 아버지와 함께 유럽의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주로 모차르트의 피아노 작품을 연주했다. 사람들은 그라츠에서 모차르트의 후배가 태어났다고 하면서 기특해 했다. 로베르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 로베르트를 훌륭한 음악가로 만들기 위해 비엔나로 보냈다. 로베르트 슈톨츠는 비엔나음악원에서 로베르트 푹스와 엥겔베르트 훔퍼딩크(Engelbert Humperdinck)에게서 배웠다. 로베르트는 마르부르크(Marburg), 잘츠부르크, 브르노 등지에서 지휘자 생활을 하다가 1907년에는 비엔나로 돌아와 테아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에서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 있는 중에 1908년에 오스카 슈트라우스의 Der tapfere Soldat(초콜릿 솔져)의 초연을 지휘했다. 3년동안 테아터 안 데어 빈의 지휘자로 활동하던 그는 1910년부터는 프리랜서 작곡가 겸 지휘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로베르트 슈톨츠는 여러편의 오페레타와 노래를 작곡하였으며 대부분은 큰 히트를 기록한 것이었다.

 

로베르트와 아인치 슈톨츠

                                     

1차 대전중에는 오스트리아 군대에 들어가 참전했으며 전쟁이 끝난지 얼마 후인 1925년에는 베를린으로 자리를 옮겨 주로 캬바레 음악에 전념하였으며 1930년부터는 영화음악을 작곡했다. 슈톨츠는 독일 최초의 유성영화인 Zwei Herzen im Dreivierteltakt(왈츠의 마음)의 음악을 작곡했다. 로베르트는 이 곡을 쇼제작자와 점심을 먹다가 멜로디가 생각이 나서 식탁에 있던 메뉴판에다가 작곡을 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 곡은 오늘날 까지도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그가 작곡한 오페레타 Die lustigen Weiber von Wien(비엔나의 유쾌한 아낙네들)은 영화로 만들어져 오페레타에 나오는 아리아인 Adieu, mein kleiner Gardeoffizier(잘있어요, 나의 귀여운 근위대 장교님)는 영화를 통해 대단히 유명해 졌다. 베를린에서 나치가 득세하자 그는 비엔나로 돌아왔다. 그는 비엔나에서도 주로 영화음악을 작곡했다. 그런 중에 Ungeküsst soll man nicht schlafen gehn(키스를 하지 않고서는 잠들지 마라)가 히트를 했다. 그러면서 지내는 중에 1938년에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었다. 로베르트는 이상하게도 나치에 의해 '적국의 시민'이라는 낙인이 찍혀 감시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가 유태계였기 때문이며 오리진이 폴란드였기 때문이었다. 로베르트는 비엔나에서 도저히 지낼수가 없어서 취리히로 갔다가 파리로 옮겼다. 파리에서 그는 연합군의 간첩으로 오인되어 사형에 처해질 운명이었으나 친구들의 도움으로 빠져 나왔다. 그런 일이 있은후 그는 곧바로 뉴욕으로 떠났다.

 

말년의 로베르트 슈톨츠

                                  

미국에 온 그는 카네기 홀에서 ‘비엔나의 밤’(A Night in Vienna)이라는 연주회를 가져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어 그에게는 영화사와 극장으로부터 쇼음악과 영화음악을 작곡해 달라는 주문이 쇄도했다. 그가 미국에서 작곡한 영화 음악중 Waltzing in the Clouds(구름을 타고 왈츠를)는 1941년 최우수 영화음악으로 오스카상의 후보에 지명되었다. 1945년에는 It Happened Tomorrow(내일 일어날 일)이라는 영화의 주제음악이 오스카상 최우수 코미디영화음악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후인 1946년 그는 비엔나로 돌아왔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그는 비엔나에서 요한 슈트라우스, 프란츠 레하르, 엠메리히 칼만(Emmerich Kalman), 레오 팔(Leo Fall)등의 오페레타의 음반 취입을 지휘했다. 모두들 전부터 이런저런 경우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었다. 로베르트는 1952년에 비엔나 아이스쇼(Wiener Eisrevue)의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비엔나 아이스 쇼는 1945년부터 시작한 행사로서 오스트르아의 전통인 피겨 스케이팅을 바탕으로 국제적으로 유명한 피겨 스케이터들을 초청하여 공연을 하는 것이었다. 1970년 로베르트 슈톨츠는 90세 생일에 즈음해서 비엔나명예시민으로 추대되었다. 또한 비엔나 대명예훈장을 받았다. 이훈장은 음악가로서는 로베르트가 두번째로서 첫번째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받았었다. 로베르트는 말년에 프란츠 레하르가 사용하던 지휘봉을 받아서 사용했다. 그것은 원래 요한 슈트라우스가 사용했던 바톤이었다. 그래서 지휘봉의 은장식에 요한 슈트라우스의 서명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로베르트 슈톨츠는 1975년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났으나 비엔나로 옮겨진 시신은 비엔나의 슈타츠오퍼 회랑에 마련된 공식 빈소에 놓여져서 조문을 받았다. 그후 중앙공동묘지의 음악가 묘역에 공식적으로 안장되었다. 요한 슈트라우스와 브람스의 묘지로부터 가까운 곳이다. 로베르트 슈톨츠는 오스트리아 우표에 여러번 등장하였고 그의 기념상은 프라터와 슈타트파르크(Stadtpark)에 설치되었다.

 

비엔나 프라터의 로베르트 슈톨츠 기념비

                                                         

로베르트 슈톨츠는 다섯번이나 결혼했었다. 첫번째 부인인 그레테 홀름과 두번째 부인인 프란치 레셀은 모두 오페레타 성악가였다. 세번째 부인은 요제피네 체르니츠라는 이름의 여인이었으며 네번째 부인은 릴리라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다섯번째 부인이 이본느 루이스 울리히(Yvonne Louise Ulrich: 1912-2004)로서 예명으로는 '아인치'(Einzi)라고 한다. 아인치는 로베르트의 부인이면서 매니저였다. 아인치는 첫번째 결혼에서 딸 하나를 두었는데 로베르트와 결혼하자 로베르트가 딸로 입양하였다. 로베르트가 아인치를 만나 결혼하게 된데에는 사연이 있다. 로베르트가 나치를 피해서 비엔나에서 파리에 왔을 때 그는 나이가 거의 60에 가까운 노인이었다. 그의 넷째 부인인 릴리는 나이 많은 로베르트를 버리고 어떤 젊은 프랑스 남자에게로 갔다. 로베르트는 돈도 없었고 신분증명서도 없었다. 그때 프랑스의 어떤 은행가의 딸인 이본느 루이스 울리히가 파리에서 결혼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이본느는 일찍이 19세에 파리에 와서 법학을 공부하였고 영국의 어떤 부유한 상인을 만나 결혼하여 에바라는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이본느는 가정적으로 부유할뿐만 아니라 성정이 착해서 가난하고 어려운 예술가들이나 갈곳없는 이민자들을 보면 재정적으로 도와주고 있었다. 그래서 이본느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유일한 사람'(Die Einzige)라고 불렀다. 그것이 아예 그의 이름처럼 아인치(Einzi)가 되었다.

 

말년의 로베르트 슈톨츠와 부인 아인치 슈톨츠

 

어느날 로베르트는 우연히 파리의 어느 카페에서 아인치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 아인치는 26세였다. 그날은 그렇게 지났다. 그후 아인치는 로베르트가 다른 이민자들(주로 불법입국자) 7만여명과 함께 임시 수용소인 파리의 축구장에 억류되다시피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돈을 주선해서 담당 관리들을 매수하여 로베르트를 수용소에서 빼어내었다. 그리고는 로베르트가 건강을 회복할수 있도록 정성껏 돌보아 주었고 이어 미국으로 떠날수 있는 서류를 만들어 주었다. 아인치의 남편인 영국 상인은 아인치와 이혼하였다. 아인치는 로베르트와 함께 미국으로 가서 함께 지내면서 일자리를 알아보아 주는 등 돌보아 주었다. 이어 두 사람은 1946년에 네바다주의 르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후 두 사람은 35년을 부부로서 함께 지냈다. 로베르트는 아인치보다 32년이나 연상이었다. 로베르트는 점차 미국의 영화음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데아나 더빈이 출연한 Spring Parade(스프링 퍼레이드)의 음악과 오손 웰스의 The Third Man(제3의 사나이)의 음악을 작곡하여 두번이나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다. 아인치는 원래 법률에 대한 조예가 깊은데다가 행정능력이 뛰어나서 로베르트의 매니저로서 훌륭한 역할을 하였다. 아인치는 로베르트와 함께 비엔나에 돌아온 후에도 그의 매니저로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로베르트 슈톨츠가 1975년에 세상을 떠난 후에 아인치의 활동은 로베르트 슈톨츠의 작품들이 정당하게 공연될수 있도록 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아인치는 훌륭한 인품으로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아인치는 1912년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태어났으며 2004년 1월 18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2세였다.

 

비엔나의 로베르트 슈톨츠 플라츠에서 딸 에바와 스웨덴 출신의 사위 보와 함께. 이건물은 미국에서 돌아온 로베르트와 아인치가 지내던 집이었다.

 

로베르트 슈톨츠는 오페레타와 영화음악과 대중가요들을 작곡했다. 그중에서 그가 작곡한 오페레타는 다음과 같다. 

 

♦ Studentenulke(학생들의 농담: 1901. 마르부르크 안 데어 드라우) ♦ Schön Lorchen(아름다운 로르헨: 1903. 잘츠부르크) ♦ Manöverliebe(사랑연습: 1906. 브륀) ♦ Die lustigen Weiber von Wien(비엔나의 유쾌한 아낙네들: 1908. 브륀) ♦ Die Commandeuse(콤만도이제: 1909. 비엔나) ♦ Grand Hotel Exelsior(그랜드 호텔 엑셀시오르: 1910. 에어푸르트) ♦ Das Glücksmädel(행운의 아가씨: 1910. 비엔나 라이문트극장)

♦ Der Minenkönig(광산의 왕: 1911. 비엔나) ♦ Die eiserne Jungfrau(철과 같은 처녀: 1911. 비엔나) ♦ Du liebes Wien(사랑스런 빈: 1913. 비엔나 인티메스 극장) ♦ Das Lumperl(룸펜: 1914. 비엔나 빌헬마 극장) ♦ Der Favorit(총애하는 사람. 1916. 베를린) ♦ Der Tanz ins Glück(행복으로의 댄스. 비엔나 코메디엔하우스) ♦ Die Rosen der Madonna(마돈나의 장미. 1920. 비엔나) ♦ Das Sperreschserl(1920. 비엔나 코메디엔하우스) ♦ Kikerki(꼬꼬댁 꼬꼬. 1921. 비엔나) ♦ Die Tanzgräfin(댄스 백작부인. 1921. 베를린 발너 극장)

♦ Mädi(매디. 1923. 베를린) ♦ Märchen im Schnee(눈이야기. 1925. 베를린) ♦ Eine einzige Nacht(특별한 밤. 1927) ♦ Prinzessin Ti-Ti-Pa(티티파 공주. 1927. 비엔나 뷔르거테아터) ♦ Peppina(페피나. 1930) ♦ Der verlorne Walzer(잃어버린 왈츠: 영화 Zwei Herzen im Dreivierteltakt의 무대 버전. 1930. 드레스덴) ♦ Venus in Seide(비단옷의 비너스. 1932. 취리히) ♦ Wenn die kleinen Veilchen blühn(작은 오랑캐꽃이 필때. 1932. 덴 하그)  ♦ Zwei Herzen im Dreiveirteltakt(왈츠의 두 마음. 1933. 취리히 슈타트테아터) ♦ Himmelblau Träume(푸른하는 꿈. 934. 취리히 슈타트테아터) ♦ Rise and Shine(떠오름과 빛남. 1936. 런던 드러리 레인 극장) ♦ Die Reise um die Erde in 80 Minuten(80분간의 세계 일주. 1937. 비엔나 폭스오퍼) ♦ Der süsseste Schwindel der Welt(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거짓말. 1937. 비엔나 요한 슈트라우스 극장) ♦ Balaike(발라이카. 1938. 파리 모가도르 극장) ♦ Night of Love(사랑의 밤. 1941. 뉴욕 허드슨 극장) ♦ Mr. Strauss goes to Boston(슈트라우스씨가 보스턴에 가다. 1945. 보스턴 슈베르트 극장) ♦ Schicksal mit Musik(음악과 함께 하는 운명. 1946. 비엔나 아폴로 극장) ♦ Drei von der Donau(도나우에서 온 세사람. 1947. 비엔나 슈타트테아터) ♦ Ein Lied aus der Vorstadt(서골의 노래. 1948. 비엔나 독일 폭스테아터) ♦ Fest in Casablanca(카사블랑카 축제. 1949. 뉘른베르크) ♦ Frühling im Prater(프라터의 봄. 1949. 비엔나 슈타트테아터) ♦ Karneval in Wien(비엔나 카니발. 1950. 비엔나) ♦ Das Glücksrezept(행복 처방. 1951. 비엔나 뷔르거테아터) ♦ Rainbow Sqaure(무지개 광장. 1951. 런던 스톨극장) ♦ Ballade vom lieben Augustin(사랑하는 아우구스틴에 의한 발라드. 1953. 비엔나) ♦ Kleiner Schwindel in Paris(파리에서의 조그마한 거짓말. 1956. 비엔나 요제프슈타트 극장) ♦ Trauminsel(꿈의 섬. 1962. 브레겐츠 호수극장) ♦ Ein schöner Herbst(아름다운 가을. 1963. 비엔나 요제프슈타트 극장) ♦ Frühjahrsparade(새해 퍼레이드. 1964. 비엔나 폭스오퍼) ♦ Hochzeit am Bodensee(보덴제에서의 결혼. 1969. 브레겐츠 호수극장)

 

'왈츠의 두 마음' 무대. 2010년 라이프치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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