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go Wolf(휴고 볼프)
열정을 담은 예술가곡
휴고 볼프(1860-1903)는 슬로베니아계열의 오스트리아 작곡가로서 특히 예술가곡(리트)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은 후기 낭만주의 음악에서는 특이하게도 인간 내면의 강렬한 심정을 집약되게 표현한 것이었다. 그는 제2 비엔나학파에 속한다고 볼수 있으나 그렇다고 그들의 작곡기법과는 관련이 없다. 볼프는 스스로 내면적인 감정이 폭발하여 작곡에 몰두했던 일이 몇차례 있었으나 말년에는 정신적 및 신체적인 어려움을 겪어 힘들어했다. 그는 1903년 매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음악가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볼프는 당시 오스트리아제국의 빈디슈그라츠(Windischgraz)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슬로베니아의 슬로베니 그라데츠(Slovenj Gradec)이다. 하지만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비엔나에서 보내며 ‘신독일 가곡’을 만들어냈다. 신독일 가곡이라는 것은 바그너의 드라마틱한 음악적 개혁의 추세를 이어 받은 것으로 표현력이 강하며 색채감이 충만한 가곡을 말한다. 볼프는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고 불릴만큼 음악적 재능의 뛰어났었다. 볼프는 네 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초등학교 시절부터 음악이론과 피아노를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볼프는 학교에서 음악 이외의 학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중학교 첫 학년에 ‘전적으로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아 퇴학을 당했다. 사실상 볼프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볼프에게 음악을 가르쳤지만 볼프가 음악가로서 생활하는 것을 꺼려했다. 힘들고 가난한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볼프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비엔나로 가서 비엔나음악원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비엔나음악원에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볼프는 학교의 규정들을 죽어라고 위반했다. 공부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었다. 결과, 비엔나음악원에서도 퇴학을 당하지 않을수 없었다. 볼프는 학교의 체제에 두려움을 느껴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비엔나에서 학교를 그만둔 볼프는 고향에 돌아와 식구들과 함께 몇 달을 지내다가 좀이 쑤셨는지 다시 비엔나로 갔다. 이번에는 음악 개인레슨을 시작했다. 볼프의 성격은 열화와 같았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그의 성격상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프에게는 어떤 개인적인 매력이 있었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고뇌에 넘친 지성인의 모습이었기 때문인듯 했다. 사회에는 그런 청년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었다. 볼프에게는 의외로 여러 명의 후원자들이 있게 되었다. 볼프를 가장 열심히 후원하는 사람의 딸이 볼프에게 작곡을 하라고 자꾸 권고하였다. 발리 프랑크(Vally Frank)는 볼프의 첫 사랑이었다. 두 사람은 3년동안 사귀었다. 발리 프랑크는 볼프의 가곡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발리 프랑크는 볼프가 21세 때에 그를 떠났다. 너무 박력이 없고 무기력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볼프는 발리 프랑크가 떠나자 크게 낙담했다. 더욱 의기소침해졌다. 비엔나에 머물 명분이 없어졌다. 볼프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볼프의 아버지는 그런 볼프가 밉기도 했지만 딱해 보였다. 아버지는 기왕에 아들 볼프가 음악을 하겠다고 하니 어떻게 해서든지 그 방면의 경력을 쌓도록 해주고 싶었다.
마침 잘츠부르크 대성당의 부지휘자 자리가 나왔다. 볼프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그 자리를 수락했다. 그러나 볼프에게는 지휘자로서 열정도 부족했고 지휘하는 기술도 부족했다. 더구나 바그너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종교음악을 지휘해야 했기 때문에 취향에 맞지도 않았다. 볼프는 잘츠부르크를 떠나 비엔나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전과 다름없는 음악 레슨을 하면서 지냈다. 바그너를 무척 숭배했던 볼프는 바그너가 세상을 떠나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볼프는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여 Zur Ruh, zur Ruh(편안히 잠드시라)는 가곡을 작곡했다. 아마 볼프의 초기 작품 중에서 가장 훌륭한 가곡일 것이다. 볼프는 우상과도 같았던 바그너가 사라지자 자기의 앞날에 대하여 말할수 없는 절망감을 가지고 무슨 일이든지 자포자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볼프는 자기가 헤쳐 나아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한데 그 길을 인도해줄 사람이 없어졌으므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볼프는 그러한 상태로 인하여 극도로 신경질적이 되었으며 친구들이나 후원자들과도 멀어졌다. 그런 중에도 볼프는 가곡의 작곡에 온 정성을 다 쏟았다.
프란츠 리스트가 볼프의 가곡을 깊은 관심으로 보게 되었다. 리스트는 볼프가 크게 존경하는 사람의 하나였다. 리스트는 볼프에게 보다 폭넓은 작품에 도전해 보라고 자문했다. 볼프의 음조시(Tone poem)인 Penthesilea는 이렇게 하여 탄생했다. 볼프는 비평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볼프의 비평은 무자비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특히 그는 그가 보기에 우수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에 대하여 가차 없는 비평을 가하였다. 예를 들어 안톤 루빈슈타인에 대하여는 형편없는 작곡가라는 식으로 비평을 가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적들을 많이 만들었다. 볼프는 ‘와일드 볼프’(Wild Wolf)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하지만 그는 천재라고 생각하는 리스트, 슈베르트, 쇼팽에 대하여는 열렬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볼프는 평로가로서 활동하던 시기에 그다지 작곡을 하지 않았다. 한편, 몇곡을 작곡한 것도 공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사람들이 볼프를 싫어해서였다. 비엔나 필의 멤버로 구성된 로제 4중주단(Rose Quartet)은 볼프의 작품을 아예 쳐다보려하지도 않았다. 그의 음조시인 Penthesilea는 오케스트라로부터 비웃음만 받았다. 볼프가 감히 브람스를 혹평했기 때문이었다.
1887년 볼프는 평론활동을 그만 두었다. 볼프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볼프는 대신에 작곡에 몰두하였다. 괴테, 아이헨도르프(Eichendorf), 폰 세펠(von Scheffel)의 시에 의한 가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시는 사람이 증오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내용이었다. 얼마후에는 Italienische Serenade(이탈리아 세레나데)를 완성했다. 이 시기를 그의 성숙한 시기라고 한다면 이탈리아 세레나데는 볼프의 성숙한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그해에 볼프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볼프는 마치 자기가 버려진듯한 느낌이 들어 아무 작업도 하지 않고 지냈다. 1888년과 1889년은 볼프의 작품활동에 있어서 놀랄만큼 생산적인 시기였다. 이 시기야 말로 볼프의 경력에 있어서
일대 전환점을 이룬 시기였다. 볼프는 작곡에 더욱 정진하기 위해 휴가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비엔나 근교의 페르흐톨즈도르프(Perchtoldsdorf)에 있는 베르너(Werner)의 별장으로 휴가를 떠났다. 베르너는 볼프가 어린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 볼프는 이곳에서 유명한 뫼리케 가곡(Mörike Lieder)을 완성했다. 얼마후 볼프는 에크슈타인(Eckstein)의 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에크슈타인은 볼프와 오랜 친구사이였다. 이곳에서 볼프는 아이헨도르프 가곡(Eichendorf Lieder)과 51편에 이르는 괴테의 시에 의한 가곡을 작곡했다. 볼프는 1889년의 여름휴가가 끝난 후에 Spanisches Liederbuch(스페인 가곡집)를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스페인 취향의 작곡이 성행했지만 볼프는 다른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았던 스페인의 시문학을 가곡으로 승화했다. 이로부터 비엔나 이외의 세계가 볼프의 작품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테너 페르디난트 얘거(Ferdinand Jäger)는 볼프의 뫼리케 가곡을 처음으로 노래 불렀다. 볼프는 여름휴가 때에 페르디난트 얘거가 주역으로 출연한 바그너의 파르지팔을 보고 매우 감동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페르디난트 얘거가 볼프의 가곡 초연에 출연하였던 것이다. 페르디난트 얘거는 볼프의 뫼리커 가곡을 연주한후 볼프음악의 강력한 챔피언(수호자)가 되었다. 페르디난트 얘거의 연주로 인하여 볼프의 가곡은 독일어 지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뮌헨의 Allgemeine Zeitung(알게마이나 차이퉁)은 볼프의 가곡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언제나 호평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볼프의 경우에는 과거에 지나치게 신랄한 비평을 서슴치 않은 탓에 애매한 적들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들이 볼프에게 한마디 할 차례였던 것이다. 브람스의 신봉자들은 볼프가 브람스를 무자비하게 비평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브람스의 전기작가인 막스 칼베크(Max Kalbeck)는 볼프의 가곡에 대하여 미숙한 작곡일뿐만 아니라 음조마저 괴상하다면서 날카로운 비평을 던졌다. 바그너 소프라노인 아말리 마테르나(Amalie Materna)는 볼프의 가곡 연주회를 취소하지 않을수 없었다. 볼프반대주의자들이 아말리에게 만일 볼프의 가곡을 부른다면 앞으로 블랙리스트에 포함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1891년 말에 볼프의 정신적 및 신체적 건강은 다시한번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지난 몇해동안 너무 지나치게 작곡에 열중했던 것도 큰 이유였다. 게다가 성병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로부터 몇해 동안 볼프는 아무 것도 작곡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는 그의 작품이 계속 연주되어 호평을 받았다. 심지어는 볼프에 대하여 혹평을 아끼지 않았던 브람스 추종자들까지도 볼프의 가곡에 대하여 호평을 했다. 그러나 볼프는 절망가운데 작곡을 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렇게 작곡을 하지 못하자 더욱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는 중에도 오페라와 같은 대작을 만들어야겠다는 열망은 항상 가슴에 품고 지냈다. 볼프가 오페라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안 어떤 사람이 1890년에 볼프에게 Der Corregidor(지방판사)의 대본을 보낸 일이 있다. 볼프는 대본을 보고 ‘이런 유치한 내용을!’이라면서 경멸하듯 거절했다. 그러나 1891년의 절망의 시기가 지나자 그는 Der Corregidor의 대본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볼프는 어두운 유머와 같은 이 작품이 마치 자기의 얘기를 쓴 듯한 인상을 받았다. Der Corregidor는 3각 관계에 대한 줄거리였다. 볼프는 몇 년전 멜라니 쾨헤르트(Melanie Köchert)와 깊은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멜라니는 볼프의 친구인 하인리히 쾨헤르트(Heinrich Köchert)와 결혼했다. 볼프와 멜라니의 관계는 일찍이 1884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쾨헤르트 식구들과 함께 휴가를 갔을 때에 멜라니를 알게되어 밀애를 거듭해 왔던 것이다. 1893년에 남편 하인리히가 두 사람의 사이를 발견했으나 하인리히는 볼프의 파트론으로 계속 남아 있었다. 오페라 Der Corregidor는 9개월만에 완성되었다.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역시 텍스트(대사)가 취약하여 볼프의 형이상학적인 음악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리하여 계속 실패로 남아 있게 되었다. 볼프는 또 하나의 오페라 Manuel Venegas에 도전하였으나 Der Corregidor의 실패를 보고 미완성으로 남겨 두었다.
볼프의 마지막 콘서트는 1897년 페르디난트 얘거가 출연하여 볼프의 새로운 가곡을 연주한 것이었다. 이후, 그는 매독이 악화되어 정신이상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볼프는 아무런 작곡도 하지 못했다. 한때 그는 강물에 빠져 죽으려고 한 일도 있었다. 그로 인하여 볼프는 비엔나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볼프가 강하게 주장하여서 정신병원에 수용했다. 멜라니는 그러한 볼프를 1903년 2월 22일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주 찾아와 정성으로 보살펴주었다. 그러나 멜라니는 남편 하인리히에게 성실치 못함을 크게 괴로워했다. 멜라니는 1906년 자살했다. 멜라니의 자살이야말로 진실한 자살이었다. 누구처럼 자기의 부정과 가족의 비리를 감싸기 위해 자살하는 치사한 것은 아니었다.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볼프 묘비
볼프의 가곡은 크게 여섯 편으로 나눌수 있다. 뫼리케 리더(1888), 아이헨도르프 리더(1889), 괴테 리더(1890), 스페인 가곡집(1891), 이탈리아 가곡집(1892, 1896), 미켈란젤로 리더(1897)이다. 그의 음악은 바그너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다. 볼프는 실제로 바그너를 비엔나음악원에서 한번 만난 일이 있다. 이때 바그너는 젊은 작곡가 지망생인 볼프에게 대작을 구상해 보라고 권고했다. 이후 바그너는 볼프의 음악적 우상이었다. 볼프가 브람스에 대하여 감정이 나빴던 것은 바그너에 대하여 지나치게 집착한 때문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브람스에 대한 오해, 그리고 자기 자신의 정신적 문제로 반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며 브람스 측의 잘못은 없었다고 한다.
'비엔나와 음악 > 오스트리아 작곡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Ignaz Brull(이그나즈 브륄) (0) | 2009.06.10 |
---|---|
Johann Ritter von Herbeck(요한 리터 폰 헤르베크) (0) | 2009.06.10 |
Sigismond Thalberg(지기스몬트 탈버그) (0) | 2009.06.10 |
Robert Stolz(로베르트 슈톨츠) (0) | 2009.06.10 |
Robert Fuchs(로베르트 푹스) (0) | 2009.06.10 |